갈라디아서의 중요성 사도 바울의 갈라디아서는 율법문제로 인하여 복음을 놓쳐버린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십자가의 복음에 기초하여 성령에 의한 성숙한 신앙을 가르치기 위해서 쓴 서신이다. 당시의 유대 그리스도교인들은 예수의 12제자가 아닌 바울이 전한 복음은 진정한 복음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들의 주장은 율법과 함께 할례를 받고 그들의 절기를 지켜야 변화된 생활, 즉 온전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갈 1:6)하고 바울은 경탄하였다.
사도의 서신 중에는 무엇이 복음이라고 정의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복음은 그 복음의 출처인 “신적 기원”(cf. 갈 2:3-4, 21)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복음과 함께 모세의 율법과 아울러 유대교의 전통인 할례를 곁들여야 온전한 복음이 된다고 거짓 교사들의 꾀임에 빠져 들어간 갈라디아 교인들은 혼란에 휘말리게 된다. 그러나 이 문제는 사도행전 15장에서 보듯이 사도의 제1차 전도 여행이 끝난 후, 안디옥 교회에서 논쟁하다가 결국 예루살렘 총회에 상정되었다. 거기서 모든 사도들과 초대교회 지도자들은 그리스도의 복음 외에는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주인 것과 피를 멀리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율법의 강요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였다(행 15:19-20). 바울은 바로 이 결정을 모든 교회에 알려줌으로써 그리스도의 교회를 굳건한 복음 위에 세울 수 있었다. 생각컨데 사도 바울의 논쟁적 서간문인 이 갈라디아서가 아니었다면, 오늘의 그리스도교의 진정성은 찾아 볼 수 없었을 것이고, 한낱 당시 유대교의 한 종파로 머무를 수도 있었다는 비판적 신학자의 말을 되새겨 볼 수 있다. 최창락, “갈라디아서-복음을 위한 투쟁(Ⅰ)”,『기독교사상』(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88, 358호), pp. 204-205.
따라서 사도의 갈라디아서는 오늘날의 그리스도교를 위기의 상황에서 구축하였다는 제1차적 공헌과 함께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구원을 받는다는 칭의의 교리를 확립시킨 제2차적 효과, 그리고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인하여 우리가 참 신앙을 적 그리스도로부터 쟁취하고, 나아가서 현실의 교회에 만연하고 있는 갖가지 신앙적 오류를 극복하는 데 갈라디아서의 진정한 의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갈라디아서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갈라디아서 본문을 언어적으로, 문학비평적으로 분석하는 것으로서는 달성할 수 없다. 그것은 갈라디아서의 배후에 놓여있는 삶의 정황과 관련시켜야 올바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바울의 칭의론은 중세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주석가들이 갈라디아서의 중심 주제요 바울신학의 핵심이며 그리스도의 복음의 정수(精髓)로 중요하게 취급하였다. 최창락,『갈라디아서』(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9), pp. 16-17. 그러나 그들의 관념론적 성서해석의 저변에는 정작 사도가 칭의론을 말하려는 복음과 거짓 복음(갈 1:6-9)에 대한 극명한 대립적 구도의 범주를 깊이 있게 다루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과 단독자 인간사이에 일어나는 추상적이고 실존적인 문제로 해석하는 결과로 칭의론의 역사적 정황을 지나쳐 버렸다.
이신칭의(以信稱義)의 신약적 이해에 대한 바울의 가장 위대한 공헌은 하나님과 더불어 의(義)에 놓여지는 방법에 관심을 둔 것이다. 바울에 의하면, 칭의(稱義)란 율법으로 말미암이 아니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발생한다. Alister McGrath, Justification by Faith, 이재덕 역,『칭의이론의 현대적 의미』(서울: 한국로고스연구원, 1992), p. 35; cf. 롬 3:22-24; 갈 2:21. 루터 이후 예수를 믿음으로 인하여 의로움(Righteousness, Justification), 즉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를 발견한지 500년이 가까워졌어도 율법과 복음의 관계는 아직도 교회의 관심사로 남아있다. 뿐만 아니라 목회의 현장에서 많은 설교자들은 오늘도 율법준수를 역설하고 있다. 또한 현대 구약신학은 신약신학과의 만남이라는 등위론(等位論)적 관계에서 율법과 복음의 종속(從屬)적이면서 보완(補完)적 관계를 운위(云謂)하는 가운데 구약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런가 하면 율법은 ‘그리스도의 법’ 즉 사랑의 법에 의하여 완성되었다는 바울의 가르침에서 우리는 적지 않은 혼란스러움을 감출 수 없다.
갈라디아서의 주제이자, 바울이 전한 복음의 중심이며 기독교 자체의 가장 중심적인 내용은, 곧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일컫는다’(sola fide)라는 말이다. 이는 율법의 행위로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단순히 믿는 행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접될 수 있다는 기쁜 소식이다. 이에 대해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이것이 복음의 진리이다. 이는 또한 그 안에 모든 경건(勁健)의 지식이 담겨있는 기독교 이론의 중요부분이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부분을 잘 깨달아서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가르치며 계속하여 그들의 뇌리에 박히게 해 주는 것”이라고 하였다. Martin Luther, Commentary on the Epistle to the Galatians(1531), John R. W. Stott, Only one Way, 문인현․김경신 역,『자유에 이르는 오직 한길』(서울: 아가페, 1990), p. 69.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소위 칭의의 교리가 가장 중요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것이 진정한 기독교인을 만드는 이론이기 때문이다. 루터는 이어서 말하기를 “칭의의 부분이 없어진다면 이는 모든 기독교의 교리를 잃는 것”이라고 하였다. Ibid. 이 교리는 그리스도의 진정한 영광을 나타내고 인간의 헛된 영광을 뒤엎는다. 이를 부인하는 자는 진정한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없으며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지 못하고 오히려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에 대한 적수(Anti-Christ)가 되며, 인간의 헛된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쓰게 된 주된 목적은, 예루살렘 교회에 소속된 유대주의 순회전도자들이 갈라디아 교회에 찾아와서 바울 자신의 사도직(使徒職)과 복음의 진정성을 훼손시키고, 그리고 신도들에게 유대인들처럼 할례(割禮)를 받아야만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거짓된 복음을 가르침으로써 그들을 혼란시키고 있었다. 이에 격분한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과 복음의 신적(神的) 기원을 말하고, 또 다시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詛呪)받게 하리라고 반박하였다. 최갑종,『성령과 율법』(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4), pp. 222-23.
바울 당시의 율법주의(legalism)는 율법이 가르친 대로 사람이 선한 행위를 함으로써 하나님께 은혜를 받을 수 있으며, 따라서 충분한 선행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한 율법주의는 자기숭배에 기원을 두고 있는 것이다. 만일 사람들이 율법에 순종함으로써 의롭게 된다면 그들은 칭찬과 영예와 영광을 받을만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율법주의는 하나님보다는 사람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을 의미한다. 율법은 바울의 신학과 윤리에 있어서 여러 다른 주제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중심적인 주제이기 때문에, 바울의 율법관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소론의 주제인 참된 복음과 거짓된 복음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관심사이다.
지난 수세기 동안 많은 성경학자들은 바울의 율법사용에 대한 구분을 함으로써, 예를 들면 율법주의적 율법과 하나님의 뜻의 표현으로서의 율법, 제의(祭儀)적 율법과 도덕적 율법, 혹은 모세의 ‘토라’(Torah, הꕗוֹתּ; Nomos, νὁμꐠ: 율법) 유대 전승에 따르면, 구약 성서 중에서도 율법서라 불리는 토라(오경)에는 613개의 계명이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이것을 분류하여 보면, 창: 1-3 출: 4-114 레: 115-361 민: 362-413 신: 414-613개의 조항으로 세분된다. 이를 최초로 분류한 사람은 중세 시대의 유대의 저명한 랍비이며 사상가로 알려져 있는 마이모니데스(Maimonides)라고 한다. 그 가운데서 ‘하라’는 긍정적인 형태로 된 계명은 248개이며, ‘하지 말라’고 하는 부정적인 형태로 된 금지 계명은 365개이다. 248이라고 하는 숫자는 사람의 몸을 이루고 있는 모든 부분의 총합이라고 하며, 365라고 하는 숫자는 1년을 뜻한다고 하는데 이에 대한 적극적인 증명은 아직 모호하다.
와 메시야적 토라를 구분함으로써 율법에 대한 바울의 어떤 불일치한 현상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최갑종, op. cit., pp. 227-28. 바울이 아무도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다고 단언할 때, 그는 전체로서의 율법을 말하고 있는 것이며 그리하여 아무도 율법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로워질 수 없음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Thomas R. Schreiner, The Law and Its Fulfillment- A Pauline Theology of Law, 배용덕 譯,『바울과 율법』(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7), pp. 18-19. 바울이 주장한 믿음으로써 의롭게 된다는 사상은 기독교 신학에 있어서 진정한 복음을 위한 전형이다. 바울은 단순히 종교적 이론이나 사상적 갈등 때문에 칭의론을 전개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기리스도교 신앙과 신학이 서느냐 쓰러지느냐 하는 그리스도교 복음의 사활의 문제였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바울의 율법과 복음에 관한 주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문제의식을 가지고, 사도 바울의 율법관을 포괄적으로 탐구하여 특수한 상황에 따른 개개의 율법 주제를 파악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주제의 난해함과 방만함을 극복하기가 쉽지가 않다. 따라서 바울이 율법의 문제를 처음으로 다루고 있는 갈라디아서의 거짓복음에 대한 바울의 반격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되, 오늘날 일부 퇴색되어 가고 있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회복하고, 비신앙(非信仰)적 요소를 담고 있는 극단적인 기독교회 집단의 이단적 행태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참 복음의 실천적인 내용을 알리는 데, 작은 역할을 담당하고자 하는 것이 본고의 소망이다.
1. 율법에 대한 바울의 용법과 개념
루터가 말한 대로 바울의 율법(νὀμος, Law)과 복음에 관한 올바른 이해는 성경의 진수를 아는 데 중심 요건이 된다. 바울이 일반적으로 말할 때 율법은 5가지 범주 내에서 사용된다. ① 모세의 율법(갈 3:13) ② 구약성경(롬 3:19) ③ 일반적 의미의 규범 또는 원리(롬 3:27) ④ 필요(롬 7:21, 23, 25) ⑤ 명령(갈 6:2) 등이다. 그런데 루터는 성경에 나타난 율법의 용도에 대하여 두 가지로 말한다. 첫째, 일반적 용도로서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억제하기 위하여 주셨다. 일반적 용도를 사무엘 볼톤(Samuel Bolton, 1606-1654)은 정치적 용법이라고 하였다. The True Bounds of Christian Freedom(1645), 박우석 역,『크리스챤의 자유의 한계』(서울: 생명의 말씀사, 1984), p. 87. 둘째, 신학적 용도로서 인간에게 그의 죄성을 보여 주어 회개를 깊게 하기 위해서라고 하였다. 1531년에 쓴 갈라디아서 주석을 보면 루터의 율법관을 잘 이해 할 수 있다. cf.『루터 전집』26권 p. 308ff.
그러나 칼빈은 루터의 이중용도 외에 한가지를 더 추가한다. cf.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1537), 제2권, 7장 12항. 그것은 도덕적 생활을 위한 용도로서 이것은 멜랑히톤(Phlip Melanchthon, 1497-1560)에 의해서도 지적되고 있다. 신성종 저,『신약역사』(서울: 개혁주의신행협회, 1985), p. 265.
헬라어 “νὀμος”(nomos, Law: 율법)는 갈디아서에 32번 나오고 로마서에서는 무려 72번이나 나온다. 정관사가 첨부된 ‘ὀ νὀμος’와 관사가 없는 ‘νὀμος’사이에는 의미상의 차이가 있다고 하여 전자를 모세의 율법으로, 후자를 일반법으로 보는가 하면, J.B. Lightfoot, St. Paul's Epistle to the Galatians(London: Mcmillan, 1880), p. 118. 최갑종,『성령과 율법』(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4), p. 254에서 재인용. 전자를 모세의 율법으로, 후자를 모든 종류의 율법주의로 보고자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바울의 다른 서신의 경우에서 처럼 갈라디아서에서도 의미상의 차이가 없이 상호 교횐적으로 사용되는 것을 볼 때(갈 3:11-12, 23-24), 이러한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 최갑종, ibid.
2. 율법의 목적 3. 율법의 기능
Ⅱ. 칭의와 율법의 관계
1. 의인론의 배경
바울의 의인론(義人論) 갈2:15-21의 본문이 바울서신 중에서 최초로 “의인론”을 전개된 곳이라는 주장은 Karl Kertelge, ("Zur Deutung des Rechtfertigungsbegriffs im Galaterbrief", Biblsche Zeitschrift, 1968. 12. p. 211)가 지지한다. 갈라디아서와 고린도전서 가운데서 어느 쪽이 먼저 집필되었는지 판가름하기가 어렵지만, 확실한 것은 두 서신이 거의 같은 시기에 씌어졌다는 것이다. 고질도전서에서도 ‘의’ 또는 ‘의롭게 되다’라는 개념이 세 곳(1;30; 4:4; 6:11)에 나타나지만, 율법의 행위와 믿음과의 연관에서 사용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본격적인 의인론의 전개라고 보기는 힘들다. 따라서 본문에서의 의인론의 등장이 최초의 주장이라는 말은 양서신의 선후문제를 떠나서 타당하다. 김창락, “갈라디아서-복음을 위한 투쟁”, (갈라디아서 연구시리즈, 12),「기독교사상」(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89, 370호), p. 243, fn. 2). 은 그것이 발현된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바울이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문제를 의인론이라는 올바른 사상적 관점을 근거로 해결했다는 것이다. 특히, 유대 그리스도인들에 의하여 자기 권리를 침해당하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편에 하나님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의’(δίκαίοσὐνη θεού)라는 용어는 단지 하나님의 속성만을 나타내는 추상명사가 아니다. 그것은 역사 내적이며 현실 변혁적인 행위명사이며 동작명사이기도 하다. 의(義)는 대상을 분명히 가지고 있다. 그 대상은 세계(世界)이다. 하나님의 의는 의롭지 못한 세계를 향해 하나님께서 의롭게 하는 사건이며, 심판의 사건이다. 바울은 의롭게 됨의 근거를 '하나님의 의'에서 찾는데 여기서 의(義)라는 명사는 하나님의 속성이나 존재의 신비를 나타내는 정적(靜的)인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활동을 나타내는 동적(動的)인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의를 ‘법정적’(法廷的, forensic)인 의미로 사용한다. 구약성서를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의는 왜곡된 인간관계를 정상적인 인간관계로 회복시킨다.
이른바 바울의 의인론, 즉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인정받는다는 교설(敎說)은 바울신학의 중심일 뿐만 아니라,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라고 모든 신학자들이 생각하고 있다. 특히 종교개혁의 전통 위에 서 있는 개신교회들은 의인론을 교회의 존망이 걸려있는 ‘신앙조항’(articulus stanti et cadentis ecclesiae)으로 여기고 있다. Heinrich Ott, 김광식 역,『신학해제』(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74), p. 284. 바울의 의인론은 안디옥 사건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바울이 그의 최초의 의인론을 안디옥 사건과 연결시켰다는 것은 의인론의 삶의 자리를 밝혀내는 데 상당히 중요하다. 식탁친교의 자리에서 게바를 책망한 이른바 안디옥 사건은, 바울의 선교활동에 있어서 중요한 획을 긋는 또 하나의 결정적 사건이다. 바울은 ‘거짓교사’들이 할례를 강요하여 갈라디아 교인들을 혼란에 빠뜨렸기 때문에 ‘역사적’인 안디옥 사건을 통하여 갈라디아 교인들을 설득하고자 하였다.
바울은 ‘예루살렘’ 회의에서 거짓교사들이 주장하는 할례가 복음의 진리에 위배되는 것으로 본 것(갈 2:5)처럼, 안디옥에서 게바와 바나바가 취한 오류를 복음의 진리에 위배되는 행동이라고 규정했다(갈 2:14). 그러므로 안디옥 사건은 바울에 있어서 에루살렘 회의와 마찬가지로 복음의 진리를 수호하느냐 허물지느냐 하는 아주 중대한 기로에 서 있는 것이다. 김창락, “갈라디아서-복음을 위한 투쟁”, (갈라디아서 연구시리즈, 10),「기독교사상」(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89, 368호), p. 236. 갈라디아서 2장 11-14절에 기록된 안디옥 사건은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식탁 예식과 정결법을 주장함으로써 유대인과 이방인의 평등한 권리를 상징하는 밥상공동체가 파괴되는 장면을 묘사한다.
이에 대해 바울은 즉각 침해당한 이방 그리스도인들의 권리를 수호하기 위해서 15-21절을 통해 의인론을 전개한다.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이방인이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는 이유로 유대인에게 차별과 멸시를 당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율법이라는 무기로 이방인들을 차별하고 억압하였다. 바울은 이런 차별기능을 정확히 인식하고, 그로 인해 차별 당하는 이방 그리스도인들의 자리를 수호하기 위하여 율법의 의가 아닌 믿음의 의를 선언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의인론은 더 이상 유대인들이 율법이라는 특권을 가지고 이방인들을 차별하고 멸시할 수 없음을 나타낸다. 이런 맥락에서 바울의 의인론은 강자에 대한 약자의 보호법이며 지배자에 대한 피지배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하나의 인권선언문이다.
또한 바울의 의인론은 모든 불평등과 불의, 착취, 수탈로 점철되는 왜곡된 인간관계에서 생기는 모순된 구조를 해결하려는 인권에 대한 구체적이며 치열한 하나님의 해방사건 이다. 바울의 의인론은 긍정적 명제와 부정적 명제로 구성된다. 먼저 긍정적인 면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의롭다는 판정을 받게 된다는 것이고, 부정적인 면은, 사람이 율법의 행위에 의해서 의롭다는 판정을 받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부정적인 명제는 바울의 적대자들의 주장을 부정한 것이다. ‘율법의 행위에 의해서’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의 대립관계에 있어서 양쪽의 핵심어를 각각 무엇으로 규정하느냐에 따라서 의인론의 핵심은 달라진다. 김창락, “갈라디아서-복음을 위한 투쟁”(갈라디아서 연구시리즈, 14),「기독교사상」(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89, 372호), p. 232.
2. 칭의
(1) 칭의의 개념 바울의 칭의교리(稱義敎理)는 ‘하나님의 의’(δίκαίοσὐνη θεού)를 전제한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하나님의 의의 개념이 바울의 칭의교리의 핵심을 이룬다. 홍인규 지음,『바울의 율법과 복음』(서울: 생명의 말씀사, 1996), pp. 273ff.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 할 것은 의롭다함을 받았다는 것은 단순한 법정적(法廷的, )인 개념 이상이라는 것이다. 즉 칭의란 죄의 용서를 선언한다는 것보다 더 함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그것은 죄의 용서를 바탕으로 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칭의라는 말은 생명이라는 말과 판단이라는 말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그의 대리인, 그리고 구세주(救世主, Saviour)로 믿는 사람들에게 의롭다고 선포하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위의 총체이다. 우리가 이 단어의 용법을 따라 의롭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의롭다고 선포하는 것을 말한다. 하롤드 M. 프레리, 김점옥 옮김,『구원에 이르는 길』(서울: 반석문화사, 1994), p. 95.
칭의는 司法的인 행위가 아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죄인을 의롭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칭의는 죽음, 즉 유한한 인간실존의 한계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극복되어졌음을 선포한다는 점에서 또한 생명의 말씀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믿어 구원받은 인간존재의 마지막 사건은 사망이 아니라 부활이다. 비록 부활에 이르는 길은 십자가의 그림자를 통하여 도달하는 길이지만, 그리스도는 우리보다 앞서 이 길을 걸었으며, 그의 길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다. 죽음이란 인간이 실존하는 데 있어서 하나의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에 이르는 두 번째 사건이며 죽음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일으키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통하여 인간은 유한성과 필멸의 인간 실존을 초월할 수가 있는 것이다. 율법이 우리를 의롭다고 할 수 없는 이유가 세 가지 있다. Gordon Bridger, Bible Study Commentary, ⅠCorinthians- Galatians(London: Scriptur Union, 1985), 김명수,『고린도전서- 갈라디아서』(서울: 한국성서유니온, 1989), p. 62.
첫째,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롬 8:3)하다는 것이다.
즉 율법은 우리의 죄를 정죄할 수는 있지만, 그 죄를 사하여 줄 수는 없다. 율법은 우리의 더럽혀진 죄를 거울처럼 비추어줄 수는 있지만. 그것을 깨끗하게 씻어 줄 수 없다는 한계를 극복할 수 없다. 우리는 너나없이 죄인들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므로(롬 6:23) 율법은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를 죽여왔다. 칭의는 곧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둠’을 뜻하는 데 율법은 그 일을 행할 수 없다.
둘째, 율법은 전혀 자비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엄격한 규범이다. 율법에 의하여 의롭다함을 얻기 위해서는 그것을 완전히 지켜야만 한다. 결국 율법은 축복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저주를 초래하였다. “무릇 율법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행하지 아니한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사도 바울은 가르치고 있다.
셋째 이유는, 율법이 과거를 교정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아담의 모든 후손들을 오염시킨 내적인 죄성을 정화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이 새 삶을 시작하고 율법을 흠 없이 지켜나간다고 하여 지나간 삶의 여정이 바뀌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교정을 받아야만 하는 것은 새 삶을 시작한 이후의 한 부분의 삶이 아닌 그의 전체적인 삶에 대한 교정이어야 한다. 설령 그의 전 생애동안에 율법을 완전무결하게 지켰다고 하더라도 그의 본성의 내재적인 근본적인 죄성은 제거하지 못한다. 프레리, op. cit., p. 98. 다윗이 그 안에 정한 마음과 정직한 영을 창조해 주기를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바로 그의 내부적인 결핍 때문이었다(시 51:10). 사실상 율법은 어느 누구도 의롭게 해주지는 못하였다. 그것은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고 주어졌다(롬 7:13). 그렇다고 율법이 악한 것은 아니다(cf 롬 7:12). 악함은 인간에게 있을 뿐이다. 다만 율법은 인간에게 악이 있다는 사실을 밝혀주는 등불이다. 다시 말하여 인간의 절망적인 상황과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그의 칭의가 불가함을 보여 주기 위하여 주어진 것이다. 율법으로는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고(cf. 롬 3:20),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개인교사로 표현하였다
기독교에서 이신칭의의 교리는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실존상황에 침투하여 우리에게 의롭다하심을 선물로 주심으로 인하여 인간의 실존상황은 인간의 외적 행위로 말미암아 변화될 수 있음을 선포하고 있다. 우리 자신은 무능력하여 우리를 곤경에 처하게 하는 근본적인 요인들을 변화시킬 수는 없지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우리가 변화 받을 수 있도록 허락하셨다. 복음은 타락한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통하여 선물로서 진정한 존재가 주어지는 것임을 선포하고 있다. 진정한 존재란 우리가 선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 의하여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복음은 우리의 현존재를 판단함에 있어서 진정하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질책하고, 우리 인간의 진정한 존재 방법으로부터의 우리 소외됨을 없이해 주는 가능성을 제시해 주고 있다. 우리는 이제 자기 만족적 추구를 포기하고 일시적인 세상 물질에 의존함을 버리게 하며 대신에 우리의 존재를 영원무궁하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이 약속에 기초를 두도록 초대받는다.
신약성경에서는 인간의 진정한 본성의 회복은 인간의 힘으로 회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부정 즉 노력에 의한 칭의(稱義)나 자기 칭의의 입장을 거부함으로써 성취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환상적인 자기 충족성에 기초를 둔 모든 타락한 인간이 스스로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인간은 역사를 초월하는 자에 의하여 인간의 실제 상황으로부터 자유스러워져야 한다.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이 진정한 존재로 변화되도록 하기 위하여 인간 역사에 친히 개입하신다. 우리는 우리를 위하여 사역하시는 하나님을 통하여 우리 힘으로 결코 누릴 수 없는 자유를 얻었다.
(2) 믿음으로만 얻어지는 칭의 갈라디아서에서 가장 중요한 이 단어는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의 중심이며, 또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이다. 이 말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기독교를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단어의 뜻을 간단히 말하면, ‘의롭게 되다’이다.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는 것’은 바로 삶, 참 생명을 획득하는 것이다. 이 말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갈 3: 26)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이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난 구원사건(cf. 갈 3:25-27)을 의미함은 물론이다. 여기에는 차별이 없다. 사도 바울의 무차별 의식은 믿음에 의한 義의 완성이다. 이신칭의의 본질을 결론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1) 인간은 원죄의 결과로서 모든 인류는 그들의 신분이나 시대나 또는 어느 곳에 살든 막론하고 칭의를 필요로 한다.
2) 크리스챤은 성령을 통하여 그들에게 주어진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그저 주시는 선물로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 앞에서 최종적 구원에 이를 희망이나 칭의를 위한 근거를 전혀 갖지 못한다. 우리의 칭의와 구원의 전적인 소망은 하나님의 약속들과 복음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에 놓여 있다.
3) 칭의 는 전적으로 하나님 은혜의 값없는 사역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그 아무 것도 우리 칭의의 근거나 토대가 된다고 말할 수 없다. 믿음조차도 신적 선물이며 우리 속에서의 신적 역사로서 인식되어져야 한다.
4) 칭의에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선포되며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역사를 통하여 그의 면전에서 우리를 의롭게 만드는 과정이 시작된다. 그 칭의에서 우리가 복음에 인격적 구약성경에서 의란 인격적, personal 개념이다. 즉 그것은 본질적으로 두 인격간의 요구의 성취와 관계의무이다. McGrath, op. cit., p. 31. 으로 응답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효력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며, 또 성경과 하나님 말씀의 선포와 성례를 통해서 우리가 복음을 만남으로써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들인다.
5) 의롭다 함을 받는 자는 누구든지 뒤따라 성령에 의해 새롭게 되어지며, 선행을 행하도록 자극 받고 또한 가능하게 되어진다. 이것은 개인의 구원을 위하여 이 선행들에 의존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함이 아니니 이는 영생이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제공된 선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Ibid., pp. 94-95.
신약성경에서는 인간의 진정한 본성의 회복은 인간의 힘으로 성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환상적인 자기 충족성에 기초를 둔 모든 타락한 인간이 스스로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인간은 역사를 초월하는 자에 의하여 인간의 실제상황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이 전정한 존재로 변화하도록 하기 위하여 사역하시는 하나님을 통하여 우리 힘으로 결코 누릴 수 없는 자유를 얻었다. 칭의는 우리 인간 자신에 대한 환상을 드러내어 파괴하며, 우리 인간이 죄악으로 인하여 반드시 죽어야만 하는 온당치 못한 산물들임을 폭로해 준다. 칭의라는 말은 그것이 죽음, 곧 유한한 인간실존의 한계이며 마지막 사건에 이르렀고 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극복되어졌음을 선포한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생명의 말씀을 제공한다. 믿어 구원받은 인간존재의 마지막 사건과 경계는 이제 사망사건이 아니라 부활이다. Ibid., p. 115
(3) 칭의에 의한 은택 칭의란 그리스도의 은택(恩澤)이 무엇과 관계되는가의 포괄적 모습을 형성하기 위해 특히 바울의 서신에서 사용된 몇 가지 개념들 중의 하나이다. 칭의의 개념은 우리에게 정죄의 제거와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 및 신분의 확립에 간하여 말해 준다(롬 3:22-27, 4:5, 5:1-5). 양자 됨의 사상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우리의 새로운 신분을 가리킨다. 화해와 용서의 개념은 깨어진 관계의 회복을 지적해 준다(고후 5:18-21, 엡 2:13-18). 구속과 해방의 개념은 속박과 노예상태로부터의 구출을 가리키는 것이요 또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에 의하여 지불된 값임을 가리킨다(막 10:45, 엡 1:7).
여기서 칭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삶의 모습이 무엇과 같은가에 대한 중요하기는 하나 철저하지 못한 기술이다. 즉 죄가 없이는 칭의를 받을 필요가 없다. 마찬가지로 은혜 없이는 칭의의 가능성도 없다. 이신칭의의 교리는 그리스도의 진정한 인격적, 변화적 임재가 믿는 자들 속에 선물로서 주어진다는 것을 말해 준다. 칭의에 대한 이러한 강조는 이 문제에의 신약성경의 진술들을 초월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비록 그렇다 할지라도 그 교리의 중요성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따라서 칭의의 교리는 기독교 신앙의 결정적 통찰을 확증 시켜주는 하나의 슬로건이요 암호이며 속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Ibid., pp. 192-93
Ⅲ. 율법과 은혜
1. 은혜의 원천
갈라디아서는 비교적 간략한 서신이지만, 그러나 신약성서에서 보여 주는 교리 가운데 중요하고 실제적인 진리로 가득 차 있다.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 제시되어 있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교훈을 알지 않고서는 아무도 율법과 은혜, 믿음과 행위, 이스라엘과 교회의 관계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이 서신의 핵심단어는 “은혜”이며, 은혜의 결실은 “평화”이다(cf. 갈 1:3). M.R. De Haan, Galatians Twenty-two Simple studies in Paul's Teaching of Law and Grace, 김창엽 옮김, 갈라디아서 강해『율법과 은혜에 관한 바울의 가르침』(서울: 도서출판 엠마오, 1989), p. 33.
“은혜와 평화”(χἀρις καὶ εἰρἠνη)라는 표현은 축복을 바라는 기도의 형태로서 사도의 서간문에서 인사의 형식으로서 다른 서신에서도 발견된다. cf. 롬 2:10; 고전16:23; 고후 13:11. “은혜와 평화”는 하나님과 그리스도 안에 기원을 두고 있다. Hans Dieter Betz, Galatians- A Commentary on Paul's Letter to The Churches in Galatia, 번역실 옮김,『국제성서주석 갈라디아서』(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7), p. 124.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내용은 첫째, 우리의 죄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통해서 둘째, 우리를 이 악한 세대에서 건지시려는 목적으로 셋째,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원천으로서 세세토록 하나님께 영광 돌리도록 주어진 것이다(cf. 갈 1:3-4). De Haan, op. cit., p. 34f.
하나님의 은혜를 적절히 정의한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은혜란 가장 천(賤)한 죄인을 하늘나라의 지극히 높은 자리로 끌어올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디모데후서에서 말씀하신 은혜의 정의는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것이므로 이제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름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헤대로 하심이라”(딤후 1:9). 은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행사이다. 조그마한 행위나, 공적이나, 인간의 노력 등을 은혜에 덧붙이면, 그것은 더 이상 은혜가 아니다.
2.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의 율법과 은혜의 상반성
무엇이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 있는 은혜인지를 보여 주는 가장 익숙한 구절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에서 찾을 수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 은혜는 하나님이 육신이 되신 그분 곧 그리스도를 말함이다. Witness Lee, The law and the grace in the God's economy,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의 율법과 은혜』(서울: 한국복음서원, 1996), p. 29.
따라서 하나님이 그분 자신 안에서만 머물러 계셨다면, 결코 은혜가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은혜라는 단어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신약에 이르러 하나님은 육신이 되셨고 그 육신은 은혜가 되셨다. 진리의 말씀 가운데 가장 뚜렷한 구분은 율법과 은혜이다. 사실상 상호 대조를 이루고 있는 이 원리들은 가장 중요한 두 시대, 곧 유대교시대와 기독교시대의 특징을 이루고 있다. 율법이 모세로부터 말미암은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다. cf. 요 1:17.
이것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 이전에는 은혜와 진리가 없었다는 뜻이 아닌 것처럼 모세 이전에도 율법이 없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따먹지 말라고 아담에게 금한 것은 율법이었다. cf. 창 2:17.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 범죄 한 그 죄인들을 찾으며 가죽옷을 입히는 일은 확실히 은혜이었다. cf. 창 3:21. 이것은 우리에게 의로움이 되신 그리스도를 잘 상징하는 것이다. cf. 고전 1:30. 하나님의 뜻이 나타난 의미에 있어서의 율법과 하나님의 선하심이 나타난 의미에서의 은혜는 언제나 있었던 것이고. 또한 성경은 그것을 곳곳에 증거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이 어느 시대에서도 이 두 원리를 결코 혼합시키고 있지 않다는 것을 주목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율법은 언제나 은혜와 구분되며 전적으로 이질적인 입장에 있고, 또한 그렇게 역사(役事)한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금하고 요구하는 것이며, 은혜는 하나님께서 권하고 부여하는 것이다. 또한 율법은 정죄 하는 일을 하고 은혜는 용서하는 일을 한다. 율법은 말하기를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고 한다. 하나님의 응징하심의 대명사로서 오늘날 형벌론에 있어서 응보형주의의 원형이다. 은혜는 말하기를 “악한 자를 대적치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라고 가르친다. 은혜의 가장 특징적인 본질은 가장 악한 사람이라도 값없이 의롭다고 하신다. cf. 눅 23:43; 롬 5:8; 딤전 1:15; 고전 6:9-11.
3. 율법과 은혜에 따른 오류의 양상
사도 바울이 오직 은혜로써만 구원받음을 전파한 후에 이 율법주의적 유대주의자 유대주의자(Judaist)는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인 신자 중에서 할례와 모세의 율법 준수를 주장하는 자들이다. 유대인들과 다르다. 들이 갈라디아 지방의 교회에 끌어들였던 것은 다름아니라, 율법과 할례를 보존시켜야 한다는 것을 가르쳤다. 이에 격분한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은혜에 대한 자기의 가르침에서 벗어났다는 소식을 접하고 이 글을 쓴 것이다. 바울 당시에 은혜와 율법에 대한 오류는 크게 보아 다음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De Haan, op. cit., pp. 11-13.
(1) 율법주의 의식과 규례와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써 구원받는다는 가르침이다. 이와 같은 영혼을 해치는 그릇된 가르침에 대한 해답을 위해서 신약성서 중 한 권이 완전히 할애되었다. 그것은 로마서인데,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요약되어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8).
(2) 반율법주의 또는 무법주의 신자들에게는 이제 자유만이 있고 아무런 율법적 제한이 없다고 주장하는 주의로, 이는 신자가 자신의 선행 없이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거룩한 생활을 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은 그들이 하나님을 입으로는 시인하지만, 행위로는 부인함으로써 스스로 선한 일을 저버리는 것이라고 분명히 책망하고 있다. cf. 딛 1:16. 이러한 그릇된 교리에 답하기 위한 말씀은 야고보서 2:17에서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다”라고 요약된다.
(3) 갈라디아인주의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소위 “다른 복음”을 쫓는 사람들을 책망하는 대목에서 찾을 수 있다. 즉 율법과 은혜의 혼합주의로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일부는 은혜, 일부는 율법으로 말미암는다고 하는 거짓 복음을 가리킨다. 갈라디인주의(Galatianism) '갈라디안주의’ 또는 ‘갈라디아주의’라고도 하지만, ‘갈라디안’이라는 말 자체는 영어의 ‘음역’이므로 ‘갈라디아인’이라고 칭함이 옳다. De Han, op. cit., p.12, fn. 의 오류에 대해서 바울에 의한 갈라디아서의 엄숙한 경고, 대응할 수 없는 논리 및 강력한 선언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최종적인 답이다. cf. 갈 1:6-8; 3:2-3.
구원은 은혜로써 얻지만, 그 다음에는 율법에 의해서 보존되며 우리의 궁극적 구원도 우리의 행위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가 아니라고 가르치는 그릇된 교리가 소위 ‘갈라디안주의’의 그릇된 교리이다. 이러한 오류와 싸우기 위해서 성령께서 바울을 택하시고 ‘갈라디안주의’에 대항하기 위하여 갈라디아서를 쓰게 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라 은혜로써 구원받고 보존되며, 궁극적으로 구속(救贖)된다는 가장 강력한 논조를 시사하는 사도의 가르침이다.
갈라디아 교회의 문제는 “성령으로 시작했는데” 이제 육체로써 완전해지려고 하는 것이다(갈 3:3). 신자가 은혜로써 구원받은 후에는 오직 율법을 지킴으로써만 그 구원이 보존된다는 거짓된 가르침에 대해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함이니라”(갈 2:19). 구원에 있어서 행위를 주장하는 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이다. 그 이유는 그러한 거짓 교사들에게 저주가 선포되었다는 사실(갈 1:7-9)과 그들은 거짓 복음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헛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는 사실, 또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쓸데없이 희생시켰다고 비난하는 이 엄청난 사실 속에 잘 나타나고 있다.
이 갈라디아서는 복음을 이미 믿는 갈라디아 지방의 이방인들을 위해서 쓰여졌다. 그러나 이 메시지는 오늘날도 당시와 같이 절실할 정도로 필요하며, 은혜와 율법이 뒤섞인 복음이 주장되고 진정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마냥 주여! 주여! 하는 오늘날에는 더욱더 필요한 것이다. 이 갈라디아인주의는 구원에 있어서 율법 행위의 위치를 그릇되게 가르치는 모든 잘못된 가르침 중에서 가장 미묘한 것이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이렇게 가르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이러한 갈라디아서의 메시지의 궁극적 목적을 우리는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구원이란 율법과 은혜(Law and Grace)의 문제가 아니라, 율법이냐 은혜이냐(Law or Grace)의 문제이다. 왜냐하면, 구원이란 그 양자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cf. 롬 11:6).
第 一 節 바울 복음의 기원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갈 1:11-12)
갈라디아서 1:11-12절은 독점적이지는 아닐지라도 사도 바울의 복음의 기원을 말하고 있다. 그 주장인즉 바울의 복음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복음이란 바울이 갈라디아를 첫번 방문했을 때 갈라디아인들에게 전한 복음을 가리킨다. 홍인규 지음,『바울의 율법과 복음』(서울: 생명의 말씀사, 1996), pp. 86ff; cf. 갈 1:6-9, 3:1-4: 13-14. 바울은 그의 복음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밝히려는 것은 아니다. 그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그의 복음의 기원을 말하려 하는 것이다. “내가 전한 복음”이란 분명히 갈라디아의 거짓 선동자들이 선전하는 복음에 대한 대립개념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김창락 지음,『갈라디아서』(서울: 대한 기독교서회, 1999), pp. 114ff. 만일 바울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원사도들의 복음과 일치되는가 아닌가 하는 문제를 염두에 두었다면, 그리스도의 복음의 일치성에 따르는 논리적 함정에 빠질지도 모른다. 적대자들의 주장은 사도 바울의 복음이 원사도들의 복음과 다르다는 것을 주장하면서 바울의 복음을 적대한 것이다.
이하에서 복음이라는 말의 어원을 살펴봄으로써 ‘복음’이라는 말 자체가 인간의 사유의 산물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지겠지만, 바울의 사유 가운데 있는 복음의 내용은 결코 그 자신이 창작해낸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 배운 것도 아니고, 다만 그가 다메섹으로부터 거슬러 올라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에 의함이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즉 바울은 갈 1:1과 병행되는 갈 11:12절에서 바울이 전파한 복음이 왜 참된 그리스도의 복음인지, 왜 바울이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전하는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는지를 갈 1:11-12절과 갈 1:1절과 똑같은 병행 구절을 사용하여 자신이 전파한 복음의 신적 기원을 강조한다. 최갑종,『바울연구 Ⅱ』(서울:기독교문서선교회, 1997), pp. 198-201. 우리가 바울 자신의 서신과 사도행전을 통하여 그릴 수 있는 그림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그의 모든 생애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데 헌신하였고 그 복음을 위해 살다가 마침내 그 복음 때문에 순교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주후 2세기의 감독 폴리갑은 바울을 가리켜 “복음을 위해 자신의 전 생애를 희생한 영광스런 분”이라고 하였다. ibid., p.47.
복음(εὐαγγἐλιον, evangelium, gospel)이라는 말의 사전적(辭典的) 정의(定義)는 인간과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선포하는 일이다. 한국 카톨릭 대사전 제5권, p. 3501. 즉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통치와 구원의 기쁜 소식을 말한다. 헬라언어권에서 사용된 복음은 ‘유안겔로스’(εὐἀγγελος,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라는 명사에서 유래하였다. 다시 말하여 유안겔로스가 도착했다고 하는 것은 기쁜 소식을 전해 줄 사람이 도착했다는 뜻이며, 이 기쁜 소식을 전해 준 대가로 주어지는 상(償)이 ‘유안겔리온’(εὐαγγἐλιον)이었다. 이런 식의 표현은 시간이 지나면서 ‘기쁜 소식을 전해 주는 이에게 주어지는 상’의 개념은 사라지고 단지 ‘기쁜 소식’만을 의미하였다. 헬라어 문화권에서의 용법은 ‘승리의 기쁜 소식’이라는 의미의 기술적(技術的) 용례가 있다. G. Kittel and G. Friedrich, eds., Theological Dictionary the New Testament, Ⅱ(Grand Rapids: Eerdmans, 1982), p. 722. 이하 TDNT로 약칭함. 그러나 이 용어가 종교적으로 사용될 때는 다만 ‘제의를 축하하다’ 또는 ‘신탁의 말씀’ 등으로도 사용되었다.
2. 유대교의 용법
칠십인(LXX)역에서는 복음이라는 단어의 단수형은 등장하지 않고 '유안겔리온‘의 복수형인 ‘유안겔리아’(εὐαγγἐλια)가 단 한번 나오는 데(삼하 4:10), 그 뜻은 ‘기쁜 소식에 대한 대가’이다. 따라서 이 말은 전혀 종교적 용법이 아니므로 신약성서의 ‘복음’과는 관계가 없다. 그러나 유대 랍비들(Rabbinic Judaism)의 문헌에는 ‘기쁜 소식’이라는 의미의 ‘바사르’(רꙵꔯ)가 있지만, 종말론적으로나 하나님 나라를 뜻하는 종교적 의미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한국 카톨릭 대사전, op. cit., p. 3502.
3. 구약성서
구약성서에서는 명백하게 복음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용어는 없다. 유대인들은 단지 사생활(私生活)에서나 공생활(公生活)에서 벌어진 경사스런 일들, 즉 여호와의 승리(cf. 시 68:12), 유대의 광복(cf. 나훔1장) 등에서 일반적으로 기쁜 소식으로 사용하였다. TDNT, op. cit., pp. 707-8. 그러나 이사야서 40-66장에서의 이 단어는 엄밀한 의미로 종교적 성격을 갖고 있다. 기쁜 소식의 사자(使者)는 유배 생활의 종말과 동시에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시온으로 돌아오는 하나님의 능력인 복음은 산에서 울려 퍼지고(사 40:9) 이 복음은 그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고 이제 유배지에서의 귀환이라는 경사스러운 사건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승리와 통치의 안전한 성취를 예고한다.
4. 신약성서
신약성경에서의 복음(εὐαγγἐλιον, evangelion)이라는 이 명사는 초기 기독교인들의 전도활동과 그들이 전했던 메시지를 언급할 때 특별히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이 기록되기 전에는 일반적으로 통용되지는 않았지만, 신약성경이 형성될 때부터 광의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Ibid., pp. 710ff: Interpreter's Dictionary of the Bible, Ⅱ(New York: Abingdon, 1962), pp. 422f. 유안겔리온의 동사형 ‘유안겔리쪼마이’(εὐαγγελιζὠμαι, evangelizomai)는 사도 바울이 편지를 쓸 때나 설교를 할 때 주제 요소로 삼았음이 틀림없다. Bruce Kaye, "Law and Morality in the Epistles of the New Testament", J.I. Packer 편저,『율법과 윤리』(서울: 백합출판사, 1985), p. 260.
갈라디아서 1장과 2장에서 사도 바울이 복음을 상세하게 옹호하고 있는 것을 보면(갈 1:11, 2:1-14) 분명히 알 수 있다. 고린도 전서 4장 15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낳았다고 하는 사실에서 복음이라는 것은 사도 바울의 사역을 받아들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이 되는 은혜이다. 신약성서에서 복음이라는 말은 총 76회 나오는데 마가복음에 8번, 마태복음에 4번, 사도행전 2번, 그리고 베드로전서와 요한계시록에 각각 1번씩 나오는 것을 제외하면 바울 서신에만 60번 나오는 것을 보면, 복음이라는 단어는 사도의 애용어라고 할 수 있다. TDNT, op. cit., p. 727.
예수는 그 자신의 행적과 가르침을 “복음(good new, gospel)”이라고 규정하였으며(마 11:5; 막 1:14-15), 또한 사람들을 불러서 그와 “복음”을 위하여 헌신하도록 명하였다(막 8:35, 10:29).사람들은 예수사역에 관한 후대의 기록들 자체도 그것이 구전의 형태이든 자료이든, 역시 “복음”이라고 불렀다(막 1:1, 13:10, 14:9; cf. 고전 15:1ff). The Expositor's Bible Commentary,『엑스포지터스 성경연구주석』(서울: 기독지혜사, 1983), p. 591.
1. 복음의 내용
갈라디아서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난점 중의 하나는 바울이 '복음을 위한 투쟁'을 전개하면서도 복음이 무엇인지를 한번도 개념적으로 정의 내리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최창락, "갈라디아서-복음을 위한 투쟁(Ⅲ)",「기독교사상」(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88, 360호), pp. 239ff. 사실 사도 바울이 복음에 대한 개념 정의를 내리지 아니한 것은 그가 이론 정립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도는 복음의 개념을 위한 투쟁이 아니라 복음의 실질적 내용, 실제적인 구원의 현실을 수호하기 위하여 투쟁한 것이다. 바울이 수호하려는 복음의 실질적인 내용은 갈라디아서 전체를 통한 분석에서 구하는 것이 올바른 자세이다. 바울에 있어서 복음은 하나의 유개념(類槪念)이 아니라 유일무이한 절대적 가치이기 때문이다.
바울 서신 속에서는 사람들을 기독교인으로 만드는 전도활동이나 설교를 꼭 복음이라고 국한시키지는 않는다. 복음은 말씀 또는 그리스도를 지칭하기도 하지만, 고린도 전서 15장 1절에서는 전통이라는 의미의 단어가 나타난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전해 준 것을 고린도 교인들이 받아들였다는 뜻이다. 이 전통은 바로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이 그 실체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로마서 6장 17절에 나타나는 전통의 내용은 교훈의 표준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교훈의 표준은 거기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일정한 윤리행위를 제시한 것이다. 사도 바울은 기독교인으로 변화될 때의 상태를 가리켜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의롭다 함(justification), 화목(reconciliation), 구속(redemption), 성결케 함(sanctification), 택함(adoption), 유업을 얻게 함(inheritance), 부르심(calling), 구원(salvation), 건짐(deliverance), 새롭게 함(to create a new), 화평케 함(make peace) 등이다. Bruce Kaye, op. cit., p. 261.
신약성서에서 유안겔리온이라는 낱말을 제일 처음 사용한 것은 사도 바울이다. 그는 이 말을 다만 기쁜 소식이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그것은 서신을 읽는 독자들이 이 낱말에 익숙하였을 것이라고 짐작되지만, 그 뜻은 쉽게 파악될 성질이 아니다. 복음의 내용을 일별하여 보면: 먼저, 유안겔리온이란 복음을 전파한다는 전도활동과 관련해서 사용된다. 여기서 복음을 전하는 일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된 자를 일컫는다. 다음으로 바울이 사용한 복음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롬 1:3). 따라서 바울이 사용한 복음의 실체를 파악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관을 살펴봄으로써 복음의 구체적인 의미를 알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육적으로는 다윗의 후손이다(롬1:3).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야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그가 구약을 성취한 것(롬 1:1ff; 고전 15:1ff)에서 구약성서 자체는 복음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해 주는 책이다. 나아가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고전 15:3-4) 그리고 재림(살전 1:10)은 사실상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의 진수(眞髓)이다. 여기서 육적으로는 다윗의 후손이요, 영으로는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 됨을 보인 것은 바로 예수 자신이 복음이라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는 증거이다.
2. 복음의 효과로서 구원의 정복(淨福)
복음에서 파생되는 효과는 구원이다. 복음의 내용, 즉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엡 1:13; 롬 1:16; 고전 15:2). 복음을 믿는 자마다 구원을 얻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며, 복음은 믿음을 싹트게 만들기도 한다. 믿음은 복음을 통해 성장하며(빌 1:27), 평화를 가져오고(엡 6:15), 거듭나게(重生) 하여 새 삶을 주며(고전 4:15), 죽음을 넘어 생명에 이르게 하며(딤후 1:10), 무엇인가 미래에 희망을 보여 준다(골1:5). 한국카톨릭대사전, op. cit., pp. 3502-3503.
사도 바울의 의인론에 맞추어 복음이 가지는 구원의 측면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복음은 믿는 이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먼저 유대인 그 다음에는 헬라인도 구원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롬 1:16). 복음은 유대인의 독점물이 아니고 세계인의 구원정복으로 확장되면서 하나님의 의로움이 지니는 보편성을 분명히 한다(cf. 롬 3:25, 4:25; 고전 6:11).
둘째, 모든 인간이 율법 아래에서는 죄인이었지만(롬 1:18ff), 이제 이들에게 하나님의 의로움이 선물로 주어졌으므로 율법의 행함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유대인의 전통적인 사고방식은 폐기된다. 셋째, 바울은 인간을 육(Σαρξ), 죄, 죽음의 세력에서 종살이하는 존재로 이해하였다. 인간은 이러한 힘에 의하여 짓눌려 있는 존재로 파악하였다. 이 때 복음은 이러한 상태에 있는 인간을 예수 안으로 옮겨 앉게 만들어서 죄의 힘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역할을 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그 내용으로 하는 복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로움이 드러나고, 인간은 이 복음을 믿음으로써 비로소 악의 세력에서 해방된다. 잠정적 결론으로 복음은, 곧 구원에 이르는 유일무이한 길이라고 정의 내릴 수 있다. Ibid., p. 3503.
3. 복음의 사도성
바울 서신의 내용을 살펴보면, 사도 자신이 전하는 복음을 그의 사도직(使徒職)과 깊이 연관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서신의 서두에서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도가 된 사람임을 거듭 밝히고(갈 1:1; 롬 1:1; 고전 1:1; 고후 1:1), 나아가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파할 사명을 가지고 있음을 강조한다(롬 15:14-21). 이토록 사도가 자신의 사도직을 예민할 정도로 밝히고 있는 것은 그가 받았던 사도직에 대한 도전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그가 전하는 복음은 다른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과 다를 바가 없는 단 하나밖에 없는(갈 1:16) 우리들의 복음(고후 4:3; 딤전 1:5; 딤후 2:14; cf. 고전 15:1; 갈 1:6)이라고 함으로써 복음의 단일성을 그의 사도직과 연계시키고 있다. Ibid.
4. 바울 복음의 종말론적 특색
바울의 서간에서 복음이 지니는 특징은 종말론적 차원이 담겨져 있다. Ibid. 닥쳐 올 예수 그리스도의 날이 너무도 임박한 나머지 예수 생애의 핵심인 십자가 사건을 우선 전파하고, 심판의 날에 예수 앞에 서는 사람은 그날이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기쁨의 날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살전 4:13 ff). 종말의 전개과정에서 가장 놀라운 두 가지 종국적 사건은 부활(復活)과 심판(審判)이다. 심판은 죄에 의해서 도덕적 비정상성에 빠진 세계의 진전과정의 필연적 총괄이다. 마찬가지로 부활도 황폐와 죽음에 사로 잡혔던 것을 회복시키는 구실을 한다.
이 두 가지가 모두 이루어진 곳에서는 그 성취 자체가 이 세대에서 무엇이 잘 못되었는가를 하나하나 보이며, 그것을 배제하는 역할을 한다. 구속사(救贖史)의 마지막 사건에서 부활과 심판이라는 이 양면은 특별한 메시야적인 색채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구약에서는 여러 번 심판과 변혁에 의한 사물의 종결이 메시야적 도움이 없이 여호와 자신의 현현(顯現)과 연관되어 있다. 우리가 종말론을 고찰할 때, 그리스도의 강림은 매우 중심적인 위치에 놓이게 된다. 신약 종말론의 가장 중요한 국면은 그리스도의 강림(降臨)에 대한 기대이다. 사실상 이러한 기대는 신약교회의 믿음을 지배하였다고 할 수 있다. Eschatology of the New Testament, International Standard Bible Encyclopedia, ed. James Orr(Chicago: Howard-Sererance, 1915; Grand Rapid: Eerdmans, 1935), Ⅱ, p. 979. Anthony A. Hoekema, The Bible and The Future, 류호준 역,『개혁주의 종말론』(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86), p. 152.
(1) 파루시아 그리스도의 강림이 파루시아(Parousia)란 형식으로 나타난 경우로서는 고전 15:23, 살전 2:19, 3:13, 4:15, 5:23, 살후 2:1, 8을 들 수 있다. 이 용어는 원래 일반적인 말이었으나,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서 하나의 고유명사로 변하였다. 즉 예수의 강림이란 파루시아를 일컫게 된다. 그러나 유대 문헌 가운데는 파루시아가 메시아의 강림을 지칭한 일은 없다. Geerhardus Vos, The Pauline Eschatology(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79), 이승구․오광만 역,『바울의 종말론』(서울: 엠마오, 1989), p. 120ff.
원래 이 말은 ‘도착과 현존’의 두 가지 내용이 밀접히 연관된 개념을 표시하였다. 즉 파루시아는 도착과 어느 정도의 시간적으로 현존해 있음을 나타낸다. 파루시아란 그 정적(靜的)인 의미가 원래적인 것이었고, 이것으로부터 다른 의미가 발전된 것으로 생각되어져 왔다. 주의해야 할 점은 이 말에는 ‘다시’란 개념은 없다. 즉 이 명사는 도착을 의미하지 귀환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 말은 ‘재림’(再臨, second coming)이라고 옮길 수 없는 것이다. 본고에서는 ‘재림’이라는 말보다 ‘강림’이라는 말을 선호한다. 특별히 ‘초림’이라는 말이 필요하거나 ‘재림’이라는 말은 선택적으로 사용된다.
바울에 있어서 사건으로서의 파루시아는 격변적(激變的)이다. 그 개념 내적 발전이나, 그 사건의 이중화나 삼중화의 흔적은 어디에나 없다. 그러므로 파루시아는 일련의 사건이 아니라, 어느 한 점에 이루어질 사건이다. 물론 강림이 천년왕국을 가져오는가, 아니면 영원한 상태를 가져오는가 하는 문제는 이 자체로서는 아무 것도 결정될 수 없는 것이다.
(2) 계시 그리스도의 강림을 뜻하는 두 번째 용어로서 계시(revelation, ἀποκἀλυϕις)라는 말은 살후 1:7, 고전 1:7, 3:13, cf. 롬 2:5; 8:18에 나타난다. ‘메시야의 계시’란 개념은 기독교보다 더 오랜 것이다. 신약성경에서 아포칼?시스는 19회 사용되었는데 바울이 그중 13회, 요한 饔첨臼?1회 사용되었다. 이 개념은 예수가 승천함으로써 그의 숨겨진 삶이 시작되었고, 마침내는 마지막 날 그가 다시 공개적으로 나타나심을 통하여 그쳐지게 되리라는 신념에서 발생한 말이 아니다. 옛 종말론은 이미 이 계시함의 이중적 의미를 파악하고 있었다. 어떤 경우에는 그 개념이 전적으로 지상적인 영역 안에서 움직였다. 즉 숨기는 것과 드러내는 것 모두가 땅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아포칼?시스’(ἀποκἀλυϕις)라는 용어에 부과된 의미는 파루시아란 말에 의해서 전달되는 그것과는 좀 다르다. 파루시아는 주로 신자들에 관심하고, 계시(啓示)는 하나님 백성의 대적들에게 관심한다. Vos, op. cit., p. 126.
살후 1:7-8에는 형벌적인 계시가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라.” 신자들도 이전에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가시적으로 볼 수 있었던 것도 아니므로, 그들에게 있어서도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이 ‘계시’의 성격을 갖는다. 예수의 종말론적 계시는 명백히 순간적이고, 이적적인 행위의 특성을 갖는다.
(3) 그 날 그리스도의 강림을 지칭하는 세 번째 용어는 ‘그 날’(ἡ ἡμερα, 헤 헤메라)이다(살전 5:4; 고후 3:13; cf. 히 10:25). 이 말은 여러 부가어와 함께 다양한 형식으로 나타난다. 바울의 서신에서 보면 다음과 같이 긴 지칭들이 나타난다. 1) “주의 날”(ἡ ἡμερα τού Κυρἰου, 살전 5:2; 살후 2:2; 고전 5:5; cf. 행 2:20; 3:10) 2) “우리 주의 날”(ἡμερα τού Κυρἰου ἡμών, 고전 1:8) 3) “주 예수의 날”(ἡ ἡμερα τού Κυρἰου Ίησού, 고후 1:14) 4) “예수 그리스도의 날”(ἡ ἡμερα Ίησού Χριστού, 빌 1:6) 5) “그리스도의 날”(ἡ ἡμερα Χριστού, 빌 1:10; 2:16) 이중 “주의 날”(ἡ ἡμερα τού Κυρἰου) 다드(C.H. Dodd)는 이 파국적인 신의 개재의 때가 ‘주의 날’이라고 불리워지는 것인데 ‘주의 날’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보고 있다.
1) 초자연적으로서 역사에 있어서의 신의 감추어져 있었던 지배가 드러난다.
2) 악에 대한 승리와 죄의 심판으로서 신의 의지는 절대적 의이므로 악의세력은 멸망당하고 인간의 죄는 심판 받는다.
3) 생명의 완성으로서 인간에 대한 신의 의지는 자기와의 친교에 있어서의 생명의 완성이므로 신의 뜻에 합당한 자들에게는 영광이 넘치고 끝없는 신생이 주어진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라고 할 때, 바울에게는 종말이 역사 안에 들어왔다는 것이 부동의 확신이었다. 황의상, “바울의 종말론에 있어서의 ‘때’의 이론”(신학논단, 1964, 제8집), p. 112. 이란 말은 구약의 “여호와의 날”이란 어구를 옮긴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구절에서는 그 구절에서 언급된 주가 여호와(여호와⇛ 아도나이⇒ 주)를 지칭하는 것인지, 아니면 주 예수를 언급하는 것인지가 분명하지 않다. 또한 ‘날’이란 말의 취지와 그 함의에서도 여러 이론들이 주장되고 있는데, 그 어느 것도 절대로 확실한 것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어떤 사람들은 그의 날을 가지실 승리의 용사로서 여호와의 개념이 있다고 한다.
바울의 글에도 이러한 생각을 지지할 만한 몇몇 구절들이 발견된다. 예를 들어 살전 2:9, 5:2에 의하면, 그날은 하나님 백성의 원수들과 대적들의 파괴를 가져오는 날이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이 개념의 기원이 법정적(法定的) 의미에서 심판 용어에서 찾아져야 한다고 한다. 즉 재판장이나 법정은 그 법정이 개정된 그들의 날을 갖는다는 말이다. 심판 날 개념은 “주의 날”(ἡ ἡμερα τού Κυρἰου)이란 어구와 쉽게 연관될 수 있었으니, 바울은 이 개념을 사용하는 곳마다 거룩한 삶을 촉구했던 것이다. cf. 롬 2:16; 고전 2:13; 빌 1:6, 10; 2:16
그러나 실재적 형벌 개념과 순전히 법정적인 개념(forensic conception)이 항상 분명하게 구별될 수 없었다는 것은 유념되어야 한다. 몇몇 구절에서 바울은 ‘날’이란 말을 연대기적 의미로서가 아니라, 종교적 의미에서의 빛을 밤의 어두움과 대립되는 주의 날을 상징하는 낮에 속하는 속성으로 연관시킨다. 정서적이든 종교적이든 빛이란 영적 기쁨에 대한 물리적 유비 구실을 한다. 최소한 부분적 해석에 의해서라도 이런 용법과 연관되는 두 가지 대표적 구절은 롬 13:11-14절과 살전 5:1-8절이다. 전자에 의하면, 세상의 밤이 대개 그러하듯이 방탕, 음란, 질투 등으로 특징지워지는 악한 때를 가리키고 있다. 밤이 깊었으므로 깨어서 부도덕성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빛의 갑옷’(armor of light)을 입고 구원의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급박한 상황을 암시하고 있다. 살전 5:1-8에서는 우리 주의 날이 임함이 악한 자들에게는 밤에 도적이 오는 것이나, 잉태된 여인에게 해산의 고통이 임하는 것처럼 갑작스럽게 오지만, 신자들에게는 그렇지 않다는 대조가 부각되어 있다. 3절 이전에는 빛과 어두움의 대조가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4-8절에서 그 대조가 도입된다. 이는 낮의 단정함과 밤의 방탕함, 그리고 악한 자들의 주의치 않음과 신자들의 조심스러운 준비를 대조시키기 위함이다.
그런데도 살전 5:5절의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는 로마서 13장에서 관찰할 수 있는 것과 비슷한 것을 상기시킨다. 이런 사유의 선을 따라 가면 위의 언급된 구절에서 “여호와의 날”에 대한 정당한 의역은 “여호와의 빛의 통치(의 날)”과 “그것을 도입하는 여명의 때” 모두가 될 것이다. 암 5:18에서 선지자는 악한 자들에게 “여호와의 날”은 빛이 아니라 어두움이라고 경고한다. 이 말에 비추어 보건대 사람들은 대개 그 날이 빛이라고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즉 그들이 그 날을 바랐다고 이야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자세히는 Gressman, Der Ursprung der Israelitisch-Jüdischen Eschatologie, pp. 141-159 참조.
사도는 이러한 주제를 아주 광범위하고 추상적인 방식으로 다루고 있다고 해도 좋다. 그러나 이것은 그 용어들이 구체적인 내용으로 가득 채워질 수 있는 그런 성격을 가졌다는 데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바울의 사상에서 작용하고 있었던 종말론의 구성적이고 역사 형성적 역할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이로부터 사도의 종말론적 위기 자체가 역사 과정과 연관이 없다고 추론하는 것은 잘못이다. 즉 두 개의 연속된 세계라는 구조 자체가 자의적(恣意的)으로 선택된 어느 순간에 갑자기 오는 세상이 현 세상을 대치하리라는 것을 생각하기 어렵게 하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 4:4의 “때가 차매”(πλἠρωμα τού Χρὀνου)란 어구는 확정된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구속사의 이전 단계들의 질서 있는 전개를 함의하고 있다. 물론 이 어구는 그리스도의 초림에 대한 말이지만, 그러나 우리는 두 강림사이에 있는 전체 드라마가 바울에 있어서는 하나의 단위를 구성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Vos, op. cit., p. 132.
사도는 구체적으로 현 세대의 지속이 명확한 한계를 지니고 있음을 말하고, 동시에 오는 세상의 도착점을 분명히 확정시킨다. 여기서 진정한 바울적인 종말론의 매우 조직적인 구도, 즉 바울 종말론의 모델이며 정점은 로마서 8:18-23에 나타난다. 로마서 8:18-23에서는 마지막 단계가 고통스러운 해산 과정으로 나타나는 바, “피조계가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한다”(롬 8:22)라는 구절이다. 이와 비슷한 유비가 히브리어의 “헤블레-하마쉬아흐”(חישׁמה־ילכח, cheblei-hamãšîah: 메시야 탄생의 고통)을 말하는 유대교 신학이 나타난다. 이것은 메시야 자신의 도착만을 지칭하지만, 그와 함께 급격한 변화의 개념 그리고 그의 임하심으로 인하여 새로운 상태가 도입된다는 개념도 전달되는 것이다. ibid., p. 133. 이 단락의 사유는 현재적인 고난으로 출발하여 이 고난에 대조되는 영광으로 나아가며(18절), 이 고난의 미래적인 실제 이유를 세 단계의 점층적인 표현으로 제시하고 있다. 즉 “피조물의 탄식”(19-22절), “그리스도인의 탄식”(23-25절), 그리고 “성령의 탄식”(26-27절)이다. 이를 분설 하면 다음과 같다. 기독교사상 편집부 엮음,『종말론의 올바른 이해』(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3), pp. 128-30.
1) 피조물의 탄식: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는 피조물의 탄식은 믿는 자들의 현재적인 아들 됨이(14-16절) 아직은 세상에 감추어진 실체임을 보여 준다. 2) 그리스도인의 탄식: 위와는 반대로 의심의 여지없이 구원은 일어났다. 그러나 이 구원은 이 세상에서는 희망으로 변화된다. 그렇다고 현재적인 종말이 거부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현재적 종말의 개념 규정이 중요하다. 즉 이 희망은 하나님의 구원하는 개입에 근거하며, 그 자체로서 구원의 현재를 내포한다. 그러므로 종말론적인 유보와 현재적인 종말론이 사도에게는 전혀 대립적이 아니며 오히려 현재적인 선물이기 때문에 이 구원에 대한 확신이 주어졌다. 3) 성령의 탄식: 구원에 대한 확신은 세상 역사의 흐름에 대해서도 파기될 수 없으며 무효화할 수도 없다. 또 구원의 미래를 위해서는 이를 인내하며 기다리는 것 외에 다른 어떤 것도 믿음에게 요구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그에게는 모든 것, 즉 시간과 역사 속에서 가능한 모든 것이 善을 이룬다.
(4) 이미와 아직의 긴장
신약의 종말론을 특징지워 주는 특성은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 사이에 일어나고 있는 긴장관계라고 할 수 있다. ‘이미’란 신자들이 향유(享有)하고 있는 것이며, ‘아직’이란 신자들이 아직 소유하지 못한 상태를 지칭한다. 쿨만(Oscar Cullmann, 1902-1999)은 이 점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신약성경에 나타난 새로운 요소란 종말론 그 자체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사이, 다시 말해서 결정적으로 ‘이미 성취됨’(already fulfilled)과 ‘아직 완성되지 아니함’(not yet completed) 사이에 일어나는 긴장감이 신약성경에 나타난 새로운 요소이다. 신약의 전체 신학구조는 바로 이러한 긴장관계 속에서 이해되어져야 할 것이다.” O. Cullmann, Salvation, p. 172. Anthony A. Hoekema, The Bible and The Future, 류호준 역,『개혁주의 종말론』(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86), p. 27에서 재인용. 종말의 가장 중요한 신호는 예수의 부활과 교회에 강림하신 성령이다. 갈라디아 4:4에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때가 차매”(πλἠρωμα τού χρὀνου) 세상에 오셨다고 한다. 바울이 의도하는 “때가 차매”라는 이 말은 확정된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구속사의 이전 단계들의 질서 있는 전개를 말한다. 물론 이 구절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그리스도의 ‘초림’을 뜻한다. 그러나 두 ‘강림’사이에 있는 전체적인 드라마가 바울에 있어서는 하나의 단위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어서 마지막까지의 질서 있는 진전이 초림의 특성이었다면, 전체의 절정적인 종국에 대해서도 비슷한 접근을 하여야 한다. Vos, op. cit., p. 132
여기서 “플레로마”(πλἠρωμα: 충만, 가득 참, fulness)라는 헬라어는 ‘성취’, 혹은 ‘완성시키다’라는 뜻을 가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시간이 차매 나타나셨다는 뜻은 역사의 위대한 중심점이 도착했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말들이 의도하는 중심사상은 구약의 색조로 바라보면, 신약시대는 “성취의 때”라는 것이다. 수년 후 서신에서 바울은 이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저희에게 당한 일들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고전 10:11). 여기에서도 분명히 ‘성취’의 의미가 나타나 있다. Ibid., p.30.
Ⅰ. 序說
사도 바울의 서신서인 갈라디아서는 총 6장 149절로 이루어졌다. 갈라디아서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처음 제 1, 2장은 개인적인 내용이며, 다음 3, 4장은 교리적 내용으로 되어 있고 나머지 5, 6장은 실천적인 내용이다. 갈라디아란 말은 고울(Gaul)사람들의 땅이란 의미이다. 갈라디아의 북쪽과 남쪽은 모두 소아시아에 있다. 로마령 갈라디아 지방은 B.C. 25년에 건설되었으며, 바울이 첫 번째 선교여행 때 방문했던 안티옥, 이코니움, 루스트라, 터베를 포함한다. 이 서신서의 전형적인 질문은 누가? 누구에게? 언제? 왜 이 서신을 썼는가? 를 먼저 물어야 한다. 바울 사도가 갈라디아에서 가르치고, 증명하고, 책망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구원의 길로 정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미 의롭다함을 얻었는데, 갈라디아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은 후에 할례를 받으므로 구원의 길로서 율법을 지킬 의무를 스스로 지녀 절기를 지키고, 이런 규례를 지키고 있음에 대하여 전적으로 불가하다는 것이 바울의 주장이다. 유대주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방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법의 준수를 구원에 필수적인 것으로 강요하였다. 서철원,『복음과 율법과의 관계』(서울: 도서출판 엠마오, 1987), pp. 16-18.
그러나 바울은 정반대였다. 율법은 지킬 수 없고, 또 율법은 구원의 길도 아니다. 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있고 그를 믿음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가르친 바울의 복음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율법을 다 준수하여 성취하여 하나님께 의를 획득하였고, 믿음으로 그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어 이제는 율법을 다시 지킬 필요가 없고 다만 본문의 내용이 적시하는 데로 서로가 남의 짐을 져 주고 그리하여 나의 의무를 다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1. 저작권(著作權)
저자는 본문에서 “사도 된 바울”(갈 1:1, 6:11)이라고 밝히고 있다. ‘작은 자’를 뜻하는 ‘바울’이라는 이름은 로마식 이름이며,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자’라는 ‘사울’(לןאש)이라는 이름은 히브리식 이름이다. 사울이라는 이름은 이미 그가 태생적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이제 바울의 자화상을 그가 스스로 밝힌 성경말씀에서 찾아보자. “나는 유대인입니다. 소읍이 아닌 길기기아 다소성의 시민으로서 이 성에서 유대인의 철저한 생활교육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나는 로마 시민권이 부여된 가정에서 태어난 것을 특권으로 여깁니다. 당시의 로마는 시민법과 만민법으로 제국의 백성을 통치하였다. 로마 시민권을 획득한 자는 시민법에 규율되었고 여타의 제국 노예나 일반 백성들에게는 만민법이 적용되었다. 오늘날의 표현으로 보자면 시민권을 획득한 자는 이를 데 없는 특권이 주어 졌으며, 속칭 특권층이라는 말이 이에 해당한다. 나는 예루살렘에 거하며 유명한 스승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바리새인에 의해 다져진 우리 조상들의 엄한 율법의 교훈에 따라 교육을 받았습니다. 나는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年甲者)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었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율법을 거의 흠 없이 순종하였다고 까지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행 21:39, 22:3, 22:28; 갈 1:13-14; 빌 3:5-6). John W. Drane, “바울은 어떤 사람이었을까”,「그 말씀」(서울: 그 말씀, 1998. 3월호), p. 63.
바울의 생애에 있어서 중요한 연대기는 다음과 같다.
* B.C. 4년: 바울의 탄생(그리스도의 탄생 연도와 거의 같은 시기이다) * A.D. 33년: 구원받음(행 9장) * 47년: 1차 전도여행 시작(행 13:1) * 49년: 제2차 전도여행 시작(행 15:36) * 52년: 제3차 전도여행 시작(행 18:23) * 56년: 바울 예루살렘에서 체포됨(행 21:18) * 61년: 로마에서 첫 번째 투옥(행 28장) * 62년: 감옥에서 석방 * 62-66: 자유의 기간 * 67년: 두 번째 투옥 * 67년: Nero 에 의해서 순교 당함
2. 수신자(受信者)
성경 본문에는 최초의 독자들이 “갈라디아의 여러 교회들”(갈 1:2, 3:1)이라고 되어 있다. 이 서신이 “여러 교회들”에게 보내진 바울의 유일한 서신다. 이러한 내용으로 말미암아 본서의 수신처가 북쪽 갈라디아 설과 남쪽 갈라디아 설로 나누어진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Irving L. Jensen, 강영래 옮김,『갈라디아서』(서울: 아가폐, 1991), pp.15-6 참조. 젠센도 남 갈라디아 설을 주장하고 있다. 일반적 견해로는 로마령 남 갈라디아의 여러 지역, 즉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등에 있는 교회들에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3. 연대(年代)
갈라디아서는 사도 바울이 처음으로 영감을 받아서 쓴 저술이다. 바울은 그의 제1차 전도 여행(행13장-14장) 이후와 예루살렘 총회(행 15장) 이전에 갈라디아서를 기록했다. 예루살렘 총회가 A.D. 49년에 열렸으니까 A.D. 48년이 이 서신의 기록 연대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4. 배경(背景)
갈라디아 지방의 그리스도인들이 개종 이후 처음으로 겪었던 반대는 그들 사이에 살고 있던 유대인 불신자로부터 받았던 박해였다(행 13:45-50, 14:21-23). 바울은 제1차 여행에서 갈라디아를 떠난 후 곧 유대인들이 와서 새 개종자들에게 그들은 아직 완전한 복음을 듣지 못한 자들이라고 말했다(갈 1:6-7). 유대인들의 오랜 전통인 율법의 신봉은 그리 쉽게 고쳐지지 아니하였다. 그리하여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바울의 가르침을 그들은 받아들이기에 난관을 겪은 것이다.
5. 목적(目的)
바울이 이 서신을 쓴 중요한 목적은 다음과 같다. 1) 새 개종자들이 신앙을 해치고 있던 유대인들의 가르침이 잘못되었다는 점을 밝히고자. 2) 이 유대인들 때문에 의심받았던 바울 자신의 사도직을 변호 함. 3) 구원은 믿음에 율법을 더함으로 오는 것이 아니고, 오직 믿음을 통해서 온다(以信稱義)는 것을 강조함 4) 갈라디아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가 가져다 준 자유(갈 5:1) 안에서 살고, 성령의 열매 를 맺도록(갈 5:22-23) 권하기 위한 것임.
6. 구조와 내용
1) 서론(1:1-5): 수신자에 대한 감사의 말없이 곧바로 자기 사도권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 주장.
2) 다른 복음에 대한 정죄(1:6-10): 다른 복음을 따르는 독자들을 비난하면서 다른 복음을 전하는 교회의 교란자를 정죄.
3) 사도직의 변호(1:11-2:21):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에 대한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변호한다. ①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온 것이다(1:11-24). ②바울의 복음은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로부터 인정받은 것이다(2:1-10). ③ 바울이 안디옥에서 베드로의 위선적인 행동을 공격했다(2:11-21).
4)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전하는 바울의 복음(3:1-4:31): 의롭다함을 받는 구원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지 율법의 행함으로 인한 것이 아니다. ① 독자들의 경험으로 확인된다(3:1-6). ② 아브라함의 예가 증거 해 준다(3:7-9). ③ 구약성서도 이를 말해 준다(3:10:14). ④ 아브라함에게 준 약속이 율법보다 우선한다(3:15-18). ⑤ 율법의 역할은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의 개인 교사 역할이다(3:19-29). ⑥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자유인이다(4:1-20).
5) 윤리적 권면(5:1-6:10):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게 된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잘 보전하고 올바로 사용하라. ① 기독교인의 자유의 의미(5:1-15). ② 성령의 열매와 육체의 일(5:16-26). ③ 일반적인 권면(6:1-10).
6) 마지막 결론(6:11-18) 적대자들에 대한 마지막 경고와 마지막 축도.
Ⅱ. 갈라디아 敎會의 問題點
바울은 처음에 몸의 질병 때문에 갈라디아 지방을 방문하게 되었고 그곳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이 하나님의 새로운 공동체에 들어가는 필수 조건이라고 선포하였다. 갈라디아인들은 바울과 그의 메시지를 열광적으로 받아들였고(4:14-15), 그 결과 그들은 다신교적 이방종교를 버리고 한 분이신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다. 그러나 곧 자신들을 예루살렘 교회의 대변인들로 소개한 선동자 cf. 갈 1:6,9; 1:9; 2:4; 3:1; 4:9-11; 5:7; 5:10 들이 도착하여 다른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들은 바울의 복음을 원천적으로 부인하는 것이 아니고 축소된 것이라고 소개하였다. 본래 바울은 그의 다메섹 사건을 통하여 받은 복음, 곧 자신의 전통적인 유대종교의 구호인 “율법의 행위를 통한 의” cf. 빌 3:6; 롬 9:30-31, 10:3 로써가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로워지는 “이신칭의”의 복음 脫猶太敎的 救援觀(탈유대교적 복음관) 을 전혀 알지 못하는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전파 한 것이다. 최갑종, op. cit., p. 317. 갈라디아에서 그토록 강조했던 칭의교리는 이미 바울의 회심사건에 함축되어 이었지만, 이제 그 교리는 바울의 손에서 전투적인 교리, 즉 단순히 변증하고 전파하는 주의(主義)가 아니라 적과 싸우는 병기(兵器)가 된 것이다. Bruce, op. cit., p. 206.
적대자들 곧 거짓 형제들의 문제점은 교회를 교란시키고 복음을 곡해하는데 있었다. 이들은 교인들에게 할례를 받도록 선동하고 있었으며, 율법에 대한 순종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들을 율법주의자, 혹은 유대주의자로 말할 수 있다. 또 한편으로 도덕적 방종주의(放縱主義)로 빠지는 열광주의자들 혹은 율법 폐기론자들을 향해 싸우는 바울의 메시지를 찾아볼 수 있다(cf 갈5:13).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율법은 끝장난 것이기 때문에 율법의 행함이나 도덕적 행동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하여 도덕적 방종주의에 빠지도록 이끄는 유대 기독교적 “영지주의자” 영지주의 사상에 대한 설명은 한마디로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따르지만, 우리 기독교 신앙의 빛에서 관조하는 영지주의 사상 또는 영지주의 운동이란 다음과 같다. 서양 철학사에 있어서 기원 후 2-3세기경 지중해권 헬라 세계에서는 이른바 靈智思想이 時代의 思潮로 자리잡고 있었다.. 이집트의 나그-함마디(Nag-Hammadi)에서 발견된(1945-46년) 고대 신화에 의하면, 원래부터 신과 세상에는 질적인 차이가 있어서 신의 세계(플레로마, πλήρμα)와 물질의 세계(힐레, ὓλη, ‘질료’)로 구분되었다. 신의 세계로부터 빛(φώς)이 나와 그 빛은 물질의 세계에 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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