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과복음

[스크랩] 율법과 복음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와 그 안에서의 자유함

김믿소사 2008. 4. 6. 00:39

 

- 율법자체엔 은혜가 없습니다. 반면에 복음은 은혜입니다.

 

 

구약을 바라보는 관점이 어떠한가에 따라서 그 사람의 성경적 중심이 율법주의적인

행위중심으로 살아가게 되느냐, 복음으로 인한 성화(성령의 열매를 맺어가는 삶)

중심으로 살아가게 되느냐로 치우치게 되거나 구분됩니다.

 

구약이 나뉘어진 조각들이라면 신약은 예수님으로 인해 완성된 조각품입니다.

이는 동시적으로 이해해야 하면서도, 다르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먼저는 구약에서 나오는 모든 제사와 예식과 윤리적인 규례도

하나님이 주신 진리(요17:17)의 말씀이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요한복음17장의 기도를 통해서 말씀하신 구절은 하나님아버지께로부터 

온 모든 것은 진리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율법도 진리입니다.

그러나 구약(고대/율법)에서의 진리로서 예수께서 직접 육신(말씀)으로 오시기

전까지의 진리입니다. 그것은 그림자와 실체(빛)의 개념으로 놓여지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실체가 없는 그림자의 시대에 필요한 예배와 윤리에 관한 하나님과 사람들을

향한 기본적으로 행해야 할 기초지침이었습니다.

 

신약(현대/복음)에서의 삶의 관점은 복음적 양심(진리 안에서의 자유)입니다.

구약(고대/율법)시대의 율법주의가 아닌 율법의 본질을 담고 있는 큰 그릇의 개념입니다.

복음적 양심은 율법적 양심을 자연스럽게 녹여내는 율법의 모태가 되는 신앙적 양심입니다.

예수님 스스로가 율법 자체이며, 그 분 스스로가 완성한 말씀(율법)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적 양심이라 함은 언어와 문자적으로 지시되어진대로 따르고 행하는 외적인

행위와 함께 정의와 자비와 신의를 동반한 참 순종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지적하신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은 외적으로는 흠 없는

율법주의자들이었으나 내적으로는 율법적 양심을 가지고 살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입술은 율법을 가르치는 자들이었으나 그들의 행위와 마음 속에는 율

법의 본질(양심)이 없었습니다.

 

복음적 양심이라 함은 율법이라는 기초적인 조항을 포괄하며, 오히려 그것을

뛰어 넘는 율법이 아닌 은혜 안에서의 양심입니다.

 

한 예로 예수께서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신 내용 한 가지를 예로 들자면

간음하지 말아라라는 지시적인 내용을 뛰어 넘어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사람은 이미 그 여자를 범하였다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이 구절은 은혜 안에서의 양심(마음)을 지킬 것을 의미합니다.

어떠한 행위적인 결과물로만 판단할 수 있는 보여지는 율법이 아닌, 그 안에 내재된

그 사람의 복음적 양심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도 판단할 수 없으며

예수께서 말씀해주신 산상수훈을 통해서만

내 양심을 비추어 판단할 수 있고,볼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복음적 양심을 따른 다는 것은 문자조항인 율법의 조항을 지킨다는 의미보다는

그 조항에 따른 율법의 정신(양심)을 주님께서 주신 값없는 은혜로서 비추어 따른 다는 것입니다.

 

이로서 율법적 양심과 복음적 양심의 그 본질은 같으며 뗄 수 없는 관계임을

알 수 있듯이 율법의 완성이란 의미는 율법과 복음이 다르다라는 차원에서의

다가감이 아니라 율법의 정신과 복음의 정신은 같으나 율법의 보여지는 행위적인

가치는 결코 믿음의 척도나 그리스도인의 전반적인 삶의 지침이 될 수는 없다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사법이나 십일조와 같은 율법과 규례에 해당하는 것은 모두 후패한 율법에

속하지만, 그 안에 담긴 율법의 본질(정신또는양심)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마음이므로

유대 당시의 십일조뿐만 아니라 모든 제사법이 국가적인 국법에 해당되기는 했지만,

그 본질적인 정신을 토대로 교회적으로 제도화된 십일조를 따른다 해서

그것을 비성경적인 제도나 행위라고 못박을 수 없으며,

 

또한 복음적 신앙양심에 따라 어떠한 율법의 조항이나 제도에서 자유코자 하는 공동체나

개인이 십일조제도를 따르지 않는다 해서 비성경적이라고 못 박을 수도 없습니다.

 

십일조가 율법의 행위중심으로 인한 믿음의 척도가 되어버린 까닭과

그 쓰임이 본 율법의 규례와 정신대로 쓰여지지 않은 데서 오는, 그 본 취지대로

이행되지 않는 제도로서 보는 복음적인 신앙의 양심에 따라 폐지하거나 다른 제도로

대체 하는 것이 공동체의 유익이 될 수도 있다라고 주장한다해도 그 주장이

정죄받을 수 없음은 그리스도안에서는 결코 정죄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율법을 지키지 않는데서 오는 불이행에 대한 정죄할 권이 

복음의 은혜(조건없이 주어진 구원의 선물)로 인해 소멸되었기 때문입니다.

 

 

 

- 율법과 복음의 본질은 하나님과 사람을 향한 사랑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유대인들은 여전히 율법에 존속되어 생활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이삭을 따먹은 일과,

손오그라든 여인의 안식일 사건으로 볼 때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말하는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기 위한 여러 가지 행위적인 규례를 거부했습니다.

여기서 바리새인의 눈으로는 예수는 율법을 어기는 자 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관점은 그 '행위적인 규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배고픔에 대한 해결'과 '선한 행실'을 우선으로 보는, 사람을 향한 관점에 두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성경적 관점에서는 예수님의 판단은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하나님을 무시)

하는 유대(신정정치)로서는 아주 이단적인 판단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관점이나 판단은 무오합니다.

그 분이 곧 안식일의 주인(마12:8)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모든 율법의 주인이 예수님이라는 대전제가 뒤따르게 됩니다.

 

바리새인들은 오직 규례를 행하느냐 위반 하느냐에만 관심을 둠으로서 행위로서

모든 선한 일과 람의 기본적인 배고픔으로 인한 행위와 병고침마저도 율법의 잣대로서

정죄했습니다. 이는 하루살이(율법의 행위적기능)만을 강조하고, 낙타(정의와 자비와 신의

-의와 인과 신)는 삼켜버리는 위선과 무지를 드러냄입니다.(마23:24)

 

율법에만 치우치다 보면, 신앙이 아닌 행위중심주의적인 

종교적 열심으로 빠질 우려가 높습니다.

반면에, 율법은 폐기되었다라는 사고로 율법 안에  녹아 있는 본질을 놓친다면,

모두를 판단하는 자리에 서게 될 수도 있습니다.

 

사도행전 15장을 통해 깨달을 수 있는 것은 바울을 포함한 사도들과 장로들이 기초적인

율법의 조항을 뛰어 넘는 완전한 은혜의 복음을 맛보았기에 율법아래 있는 자들과

율법 없는 자들과도 그 양자간에서 화평하려 노력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리새파에 속하였다가 그리스도인 된 사람들이 이방인들도 율법을 지켜야 한다라는

주장에 대해, 사도들은 예루살렘 회의에서  야고보사도를 통해 우상제물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는 권고로 율법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유대인들에게 주는

일종의 양보적인 선언을 했습니다. 만일, 예루살렘회의에서 유대인의 개종자들에 의한

율법에 관한 이의가 없었다면, 야고보가 권고한 최소한의 율법조항에서 조차도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자유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만일이란 추상적인 단어 이후의 내용은 저의 추리접근입니다만,

성령을 통한 복음의 감격과 은혜로 멍에(율법)에서 자유함을 입었음에도 평생을

가져온 율법적인 행위를 버리지 못하겠다는 율법주의자들을 통해서, 주님이 완성한

율법의 조각품이 아닌 조각들을 일부 떼어 보인 것은 앞으로도 있을 유대인개종자들과

이방개종자들의 간에 있을 율법에 관한 변론이나 논쟁이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서

아무런 유익이 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미리 깨닫게 해주는 부분입니다.(딛3:9)

 

그 이유는 주님을 영접한 사람은 율법적 양심이 그 안에 성령을 통해 내재하게 되며,

그 기초된 윤리적인 정신을 토대로 복음이란 자유함 속에서, 초보적인 행위로는

접근할 수 없는 구원의 성화된 삶으로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기울여야 할 중요한 초점이 예루살렘회의에서 결의된 최소한의 율법조항이

가지는 효력의 넓이 입니다. 그 효력 또한 연약한 다른 지체들을 위한 배려와 함께

개인의 복음적 양심에 맡겨졌습니다.(고전10:23~33)

 

따라서 율법과 복음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예수님 이후로는 모든 삶을 

율법의 본질이 녹아 있는 복음적인 양심에 비추어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구원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예수님과 나만의 문제이며, 외적인 행위로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예수님과 나만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받아 들인 그리스도인의 기본적인 관계와 시각의 출발점은

구약에서 보여지는

‘제사와 제물과 같은 온전하지 못한 율법과 나 의 관계가 아니라 

완전한 관계인 예수와 나 의 관계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출처 :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
글쓴이 : 요나단JP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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