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여는 말
형제들이여, 가상공간의 주이신 예수의 첫 번째 교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여러분은 매주 일요일마다 여러분 각자의 안락하고 은밀한 가정에서 오늘날 할 수 있는 가장 과학적이고 새로운 종교적 경험을 통해 주님을 예배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여러분은 도마처럼 여러분의 손을 그리스도의 상처에 대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골고다 언덕까지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감으로써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산상수훈을,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배신을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마치 거기에 있는 듯이 까마귀의 울음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성한 아이폰(eyephone)을 쓰고 나와 함께 갑시다. 십자가의 길을 따라 예배를 보면서 구주와 함께 고통받고, 여러분의 가슴속에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의 육신 속으로 들어갑시다. 그런 후 나와 함께 가상 성찬식을 가지십시오. 천사들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상처에서 흐르는 바로 그 피를 황금 잔에 받아다가 여러분에게 돌릴 것입니다! 단 599달러와 낮은 월별 요금으로 여러분은 주의 왕국을 매주 일요일마다 방문하실 수 있습니다.
얼마 전 국내에 인터넷 교회라고 하는 것이 출현하였다. 순전히 가상공간(cyber space)에만 존재하는 이곳에 들어가 보면 인터넷 예배라고 하는 것이 있다. 인터넷 예배란 마치 교회에서 예배하듯이 컴퓨터 앞에 앉아서 예배에의 부름부터 시작해서 축도까지 그대로 따라하게 만든 가상 공간상의 예배이다. 지금은 시작에 불과하다. 앞으로는 수백 수천의 인터넷 교회와 사이버 예배 사이트가 생겨날 것이다.
위의 인용문은 이러한 사이버 교회(Cyber Church)가 사람들을 자기의 사이트에 접속하도록 선전하는 문구이다. 이 광고를 보면 장차 사이버 교회와 사이버 예배가 어떠한 모습을 하게 될지 가늠할 수 있게 된다. 지금은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아서 화면을 보며 소리를 듣는 것이 고작이지만, 앞으로는 아이폰(eyephone)을 쓰고 컴퓨터 앞에 앉으면 실제로 교회에 들어가 앉아있는 것보다 훨씬 더 생생한 느낌으로 가상공간에서 예배에 참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보아야 하며, 이것이 장차 한국 교회에 가져올 파급효과는 무엇인가? 예배학적으로 볼 때에 가상 공간의 예배는 과연 진정한 예배라고 할 수 있는가? 신자들은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 대신 사이버 예배에 참석해도 되는 것인가? 한국교회는 지금 이러한 질문들에 직면해 있으며, 신자들에게 뭐라고 대답을 주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이버 예배를 예배학적으로 분명하게 규명하는 작업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II. 예배학적 관점에서 본 사이버 예배
예배학적으로 분석해 볼 때에 사이버 예배는 여러 가지의 가능성과 한계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것들은 모두 예배의 기본적인 개념과 관련된 사항들이기 때문에 예배의 정체성을 규정 할만큼 대단히 중요하다. 예배신학의 토대 위에서 사이버 예배를 정확하게 분석하는 일이야말로 사이버 예배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거기에 대한 대책과 활용 용도를 파악함에 있어서 필수적인 과제라 할 것이다.
A. 사이버 예배의 한계성
사이버 예배는 정상적인 예배라고 하기에는 부적당한 몇 가지 본질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다. 전술한 바 있듯이 이러한 사항들은 예배의 본질과 관련된 것들이기 때문에 매우 치명적이다. 그 결함들이란 다음과 같다.
첫째, 사이버 예배는 예배의 공동체적 성격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예배는 근본적으로 공동체적이어야 한다. 이는 예배를 뜻하는 단어의 어원만 보아도 분명하다. 예배라는 말은 희랍어 레이뚜르기아(leitourgia)에서 왔는데, 이 말은 일(work)이라는 뜻의 에르곤(ergon)과 사람들(people)이라는 뜻의 라오스(laos)가 합쳐진 말이다. 고대 희랍에서 리터지라는 말은 공공의 부역(public work)을 뜻했다. 환원하면, 예배는 처음부터 기독교 공동체가 함께 모여서 하는 행위를 뜻하였으며, 이 공동체성은 초대교회의 예배가 지니고 있었던 핵심적 요소였다는 뜻이다. 비록 역사를 따라 내려오면서 중세기와 근대에 예배의 공동체성이 약화되고 개인적 차원이 중시된 적이 있었으나, 현대 예배갱신운동은 이를 바로잡고 예배의 공동체적 개념을 다시 회복시킨 바 있다.
역사적 관점에서 예배를 보면 어떠한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스승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그것을 함께 기뻐하고 경축하기 위해 제자들이 안식 후 첫날 함께 모였던 것이 바로 기독교 예배의 시초이다. 그 이후에도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서슬 퍼런 로마의 박해 속에서도 매주 안식 후 첫날이 되면 카타콤에서, 강가에서, 냇가에서, 그리고 도시나 시골의 믿는 성도의 집에서 목숨을 담보로 하여 모였으며, 그러다가 혹여 발각이 되면 기꺼이 사자의 밥이 되는 것을 감수하였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이처럼 모임을 귀하게 여긴 이유는 바로 그렇게 모이는 것이 교회를 이루는 것이요, 이 모임으로부터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나오기 때문이었다. 확실히 예배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함께 모여서 드리는 것이다. 모임이 없이는 결코 예배가 있을 수 없다.
사람들이 혼동하는 또 한가지 사실이 있다. 그것은 공동의 예배(corporate worship)와 개인적 경건(personal devotion)의 차이이다. 예배학에서는 이를 엄격히 구분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이 두 가지가 엄연히 다른 차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공동의 예배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서 회중을 이루어 함께 하나님께 나아가고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이다. 반면에, 개인적 경건은 하나님의 백성된 자 개개인이 신심을 가지고 기도와 찬양과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다. 물론 온전한 신앙생활을 위해서는 이 두 가지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개인적 경건이 없이 그저 예배에 참석만 하는 것은 좋은 예배가 될 수 없으며, 또한 그 반대로 공동의 예배에는 참여하지 않고 홀로 집에서 말씀보고 기도하고 찬송하는 것을 아무리 열심히 한다 하여도 이는 온전한 신앙생활이라 할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이중 하나가 다른 하나를 대치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이 함께 모여서 드리는 예배는 개인적 경건과는 다르며, 이렇게 예배를 위해 모인 무리가 바로 교회이다. 진실로 교회를 이룸이 없이는 예배를 드림이 있을 수 없다.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해 볼 때에 사이버 예배는 진정한 의미의 예배라고 볼 수 없다. 그것은 오히려 개인적 경건의 행위라고 보는 것이 마땅하다. 왜냐하면 사이버 예배는 교회에 모이지 않고 각자 자기 집 컴퓨터 앞에 앉아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혹 사이버 예배를 주장하는 자들은 강변할지 모른다. 인간의 몸이 멀리 떨어져 있어도 마음(mind)이 가상공간에 모이면 교회도 되고 예배도 되지 않느냐고.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인간이 몸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모르되 몸을 가지고 있는 한 교회를 이루고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인간은 함께 모여야 한다. 물론 모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것은 아니다. 그들도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이며, 불 가시적인 교회의 구성원이다. 그러나 우리는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박해 속에서도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함께 모였던 것을 다시 한번 기억해야 한다. 그들이 오늘날과 같은 생각으로 모이지 않아도 아니 마음으로만 모여도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이며, 마음으로만 모여서도 주님을 기억하고 예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그들은 생명의 위협을 받지 않고도 편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반드시 몸을 가지고 모였으며 또한 영혼만의 부활이 아닌 몸의 부활을 믿었다.
그러므로 적어도 오늘 우리들의 예배가 온전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함께 모여야 한다. 마음만 모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몸이 모여야 한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가 두 세 사람이 함께 모인 곳에 나도 그들과 함께 있느니라"(마 18:20). 물론 이 말씀을 몸의 모임이 아니라 마음만의 모임을 뜻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4)는 성서의 말씀은 벌써 2천년 전에 오늘이 올 것을 미리 내다보고 하신 말씀이 아닐까.
둘째, 사이버 예배의 문제점은 그것이 예배의 경축적 성격을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점이다. 예배는 근본적으로 주님부활의 경축이며 천국을 미리 맛보는 종말론적 잔치이다. 신약의 공동체가 매주 안식 후 첫날에 함께 모여서 떡을 떼었던 것은 이를 잘 보여주는 증거이다. 중요한 점은 그것이 부활의 경축이든 종말론적 잔치이든 잔치라는 것은 원래 사람이 모이지 않고는 도무지 성립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함께 모여서 떡을 떼고 잔을 나누며 대화와 교제를 나누는 것이 잔치이다. 기독교의 예배는 가장 초기부터 이것을 핵심으로 하고 있었으며 이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하나님과 당신의 백성들이 함께 모여 교제하고 즐거워하는 기쁨의 잔치야말로 예배의 본질적 특성이다.
그런데 사이버 예배는 근본적으로 이러한 점을 충족시킬 수 없다. 사람이 모이지 않는데 어떻게 잔치를 한단 말인가! 혹자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사이버 예배에서도 잔치 즉 성만찬을 할 수 있다고. 한 조각의 빵과 한 모금의 포도주를 미리 우편으로 각 가정에 보낸 다음에 정해진 예배시간이 되면 사람들은 각자의 가정에서 그것을 들고 컴퓨터 앞에 앉아서 사회자의 지시에 따라 일제히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면 성만찬이 된다고 말이다. 예배학적 관점에서 볼 때 이것이 얼마나 우스운 발상인지 알아보는 것은 간단하다. 예를 들어 우리가 추석 잔치를 그런 식으로 한다고 가정해 보자. 추석이 다가오자 부산에 사는 어머니가 서울에 사는 큰아들과 경기도 파주에 사는 둘째 아들, 그리고 전라도 광주에서 아직 총각으로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막내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보냈다:
내 아들들아, 그 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 올해에도 어김없이 우리의 즐거운 명절 추석이 다가오는구나. 작년에 너희들이 고향에 오느라고 길에서 여러 시간씩 고생한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내 마음이 안쓰럽구나. 귀경 길은 또 얼마나 대단했니. 참으로 고생이 말이 아니었지. 그래서 이번 추석에는 에미가 한가지 좋은 생각을 해 냈으니 너희는 내 말을 잘 듣고 그대로 실천하려무나. 그러면 이번 추석은 그렇게 귀향과 귀경을 하느라고 고생을 하지 않고도 즐거운 명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번거로우니까 이제부터는 추석에 에미가 사는 집에 올 필요가 없다. 그 대신 이 에미가 송편과 여러 가지 음식을 미리 만들어서 택배로 보내줄 터이니 너희들은 그것을 가지고 추석을 지내면 된다. 우리가 추석을 지내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먼저 추석날 당일 아침 정각 아홉 시가 되면 각자의 집에서 컴퓨터를 켜고 너희들 각자의 식구들은 컴퓨터 앞에 둘러앉거라. 막내는 아직 미혼이므로 혼자 컴퓨터 앞에 앉아야 하겠구나. 우리는 화상을 통해 함께 추석 감사예배를 드릴 것이다. 컴퓨터 앞에서 함께 찬송과 기도를 드린 후에는 너희 아버지가 설교를 하실 터이니 너희들은 컴퓨터를 통해서 잘 보고 들으면 된다. 예배가 다 끝난 후에는 너희들 각자가 사이버 상에 있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무덤을 찾아 클릭을 하렴. 그리고 모니터 앞에서 정중하게 묵념을 하려므나.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매우 기뻐하실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다 끝난 후에는 역시 너희들의 가정에 있는 컴퓨터 앞에 상을 차려놓으렴. 그리고 그 앞에 모든 식구가 둘러앉아라. 물론 막내는 혼자 앉아야 하겠구나. 식사기도는 서울에 있는 큰애가 대표로 하고 기도가 끝나면 일제히 식사를 시작한다. 물론 모니터를 보면서 이 에미가 먹는 것도 쳐다보고 또 너희 형제들끼리도 서로 모니터를 보면서 식사를 하렴. 이렇게만 한다면 이번 추석은 정말로 편하고도 즐거운 잔치가 될 것이다. 꼭 이대로 하렴. 너희들을 사랑하는 에미가.
만일 이렇게 추석잔치를 한다면 어떨까? 이것이 과연 즐거운 잔치가 될 수 있을까? 물론 아니다. 잔치는 구성원들이 함께 모여야 이루어진다. 만나서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며 손과 손을 잡고 먹고 마시며 대화와 친교를 나누는 것이 진짜 잔치이다.
예배도 마찬가지다. 주님의 백성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함께 모여서 즐겁게 하나님과 친교하고 사람들과 친교하는 것이 진정한 예배이다. 이러한 예배만이 참여자들에게 천국의 풍성함을 맛보게 해 준다. 사이버 예배는 결코 이러한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사이버 예배는 모이지 않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잔치가 될 수 없으며 경축도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사이버 예배는 진정한 예배라고 볼 수 없다.
셋째, 사이버 예배는 몸으로 드리는 예배의 성격을 충족하지 못한다. 기본적으로 예배는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봉사와 하나님을 위한 인간의 봉사를 함께 포함하고 있다. 인간은 찬송과 감사와 간구와 고백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며, 하나님은 용서와 은혜와 새롭게 하심으로 인간에게 다가오신다. 이러한 행위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영화롭게 되시고 인간은 거룩하게 된다. 문제는 인간이 예배에서 맡는 부분과 역할이다. 예배에서 인간이 행하는 것은 찬양과 감사와 간구와 고백 등인데, 이러한 것들은 모두 인간의 몸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입과 혀와 귀와 눈, 그리고 손과 발과 제스쳐와 움직임을 통하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예배는 이렇게 몸으로 드리는 것이며, 인간은 몸을 떠나서는 결코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다.
인간은 원래 영적 존재이지만 동시에 육신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온전히 영적인 존재가 아니라 육신도 함께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인간이 육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이 육신 때문에 인간의 본질이 규정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인간의 몸으로 보내시고 또 십자가의 처절한 고통을 통해 죽음에 이르게 하신 것도, 그리고 또 몸으로 부활을 하게 하신 것도 모두 이처럼 인간의 본질적 한계를 인정하셨기 때문이며, 육신을 가진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다. 예배의 몸적 특성은 바로 이 점에 근거하고 있다. 영이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인간의 몸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기독교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인간의 육체를 부인하는 이단들이 있었다. 그 중의 대표적인 것은 영지주의였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의 육체는 악한 것이고 오직 영혼만이 선한 것이다. 그러므로 영혼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영혼을 가두고 있는 거추장스러운 육체를 빨리 벗어버려야 했다. 여기에서 육체에 대한 심한 부정을 보게 된다. 육체를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이해하고 또 육체 없이 오직 영(spirit)으로만 살고자 하는 욕망을 보게 된다. 이들은 결국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육체를 부정하는 또 하나의 이단은 바로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정하는 가현설(Docetism)이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순수한 선(善)이시기 때문에 온전히 영이시다. 그러므로 부정한 육신을 입으실 수가 없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은 단지 그렇게 나타나신 것뿐이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도 결국은 사탄을 속이기 위한 방편이었으며, 결국은 부활하신 후 영만이 승천시어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셨다. 이 주장 역시 육체를 부정하였기에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그러면 사이버 예배는 어떤가? 사이버 공간과 사이버 예배에서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마음 혹은 정신뿐이다. 사이버 공간의 탈 육체성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것은 자칫 가현설과 영지주의의 현대적 부활로 인식될 위험이 있다. 따라서 이러한 예배는 진정한 예배라 할 수 없다. 육신을 가진 인간으로서 회중의 온전하고 의식적이며 적극적인 참여(full, conscious, and active participation)가 있는 예배야말로 좋은 예배라는 것이 현대 예배학에서 널리 받아들여지는 개념이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서 볼 때에 사이버 예배는 진정한 의미의 예배라고 볼 수 없다. 그것은 예배 즉 공동의 예배(Corporate Worship)라기 보다는 개인적 경건의 차원에 속하는 것이며, 일종의 유사예배(quasi-worship)라고 보여진다.
B. 사이버 예배의 가능성
그렇다면 한국교회는 사이버 예배를 전면적으로 거부할 것인가? 그럴 수 없다. 사이버 공간은 이미 현대 사회의 문화이며 인간의 주거환경 그 자체가 되어버렸다. 은행업무, 주식투자, 쇼핑, 각종 예매업무는 물론 이제는 대학도 사이버 상으로 가능한 세상이다. 이제는 누구도 사이버 공간을 거부하고는 살아갈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교회는 현실을 직시하고 사이버 공간이 지니는 가능성을 찾아서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사이버 공간은 소위 오프라인(off-line)이 줄 수 없는 많은 장점들을 가지고 있으며, 그 중 교회가 활용할 수 있는 방안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사이버 예배는 환자나 수감자 등 예배당에 나갈 수 없는 사람들에게도 자유롭게 접근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또 해외 등지로 멀리 떠난 사람들이 자기 있는 곳에서 본 교회의 예배실황에 접근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들이 비록 교회 공동체에 참여하지는 못하지만 사이버 공간에서나마 공동체의 예배에 참여함으로써 개인적 영성을 유지하고 은혜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사이버 예배가 지닌 장점이라 할 수 있다. 아울러 대형 교회일 경우 멀리 있는 신자들이 본당으로 나오지 않고도 해당 지역에 있는 기도처(또는 지성전)에서 대형 멀티 미디어를 통해 본당과 동시에 기도회 등에 참여하는 것도 가능하다.
둘째, 사이버 예배는 사이버 공간에 예배의 실황을 띄워 놓음으로써 그 예배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이 뒤늦게라도 사이버 상으로 접속함으로써 같은 찬송과 같은 기도와 같은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것으로 예배를 드린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공동체와 같은 영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장점이 된다.
셋째, 예배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지만 사이버 공간은 기독교 교육, 즉 새 신자 교육이나 구역장 교육, 제직 교육 등을 위해서는 매우 유용한 수단이 될 수 있다. 현대와 같이 바쁜 시대에 직원들이나 새 신자들이 일일이 교회에 나오지 않고도 교회의 교리나 복음의 기본적인 내용 등에 대해 집에서 가상공간을 통해 배울 수 있다면 이는 매우 훌륭한 방편이 될 것이다.
넷째, 사이버 공간은 특정 연령과 특정 계층을 목표로 하여 선교할 수 있는 훌륭한 도구가 된다. 특히 사이버 공간은 국경을 초월하여 어디에나 갈 수 있고 세계 어디서나 접속이 가능하므로 공산권 선교에도 훌륭한 수단이 될 수 있다.
다섯째, 또한 사이버 공간은 일대일 또는 다 대 다 접속이 가능하므로 개인적 신앙상담이나 집단적인 신앙토론 등에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다.
III. 사이버 예배와 한국교회의 전망
전술한 바대로 현대는 이미 사이버 세상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세상이 되어 버렸으며, 사이버 세계는 이제 삶의 모든 국면에서 현실이 되어 버렸다. 문제는 사이버 예배가 한국교회에 가져올 파급효과이다. 사이버 예배는 예배가 아니기 때문에 예배를 대치할 수 없음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의 예배신학이 취약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이 첨단 과학으로 무장하고 있으며 교회의 예배보다 훨씬 더 생동감 있고 또 편리하기까지 하기 때문에 신자들이 여기에 빠져들 것이 분명하다. 한국교회의 예배는 다음의 몇 가지 이유에서 사이버 예배에 대한 취약성을 지니고 있다.
첫째, 현대인들은 익명성을 추구한다. 신자들은 이제는 작은 교회보다는 대형교회에 출석하는 것을 선호하는데 그 이유는 많은 회중 속에 파묻혀 조용히 예배드리고 조용히 교회생활 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교회 일에 깊숙이 개입하기를 싫어한다. 이러한 경향은 신세대일수록 더하다. 이들에게 있어서 사이버교회는 아주 매력적인 존재이다. 사이버 교회에서는 목사나 교회의 직분자들이 귀찮게 출석을 독려하지도 않는다. 이름도 주소도 필요 없고 오직 ID로만 통용된다. 그야말로 익명성이 확실히 보장되는 것이다. 현대인들이 이러한 교회를 선호하는 것은 당연하다.
둘째, 한국교회는 개인주의적 신앙형태를 가지고 있다. 교회에서는 항상 성도 개개인의 영적 온도만을 관심 할 뿐 함께 예배하고 함께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이루어 나가는 공동체적인 신앙이 약하다. 목회자들은 언제나 강조하기를, 다른 사람은 어찌하든지 내가 결단하고 내가 구원받고 내가 은혜 받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예배에서도 오로지 나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가 중요할 뿐 다른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나 나와 다른 사람과의 관계는 관심 밖이다. 이러한 신앙유형에 잘 어울리는 예배가 바로 사이버 예배이다. 사이버 예배는 교회에 나갈 필요가 없으며 홀로 컴퓨터 화면 앞에 앉아서 예배드리면 된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예배하는지 알 필요도 없고 알 수도 없다. 오로지 화면 속의 주님과 나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교회의 예배에 참석하지 않고 사이버 예배에 참석하는 것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게 될 것이다.
셋째, 현대인들은 일상생활에서 편리함을 추구한다. 집에 앉아서 일상생활의 모든 것을 온라인으로 처리하는 편리함에 익숙한 현대인들은 예배마저도 그렇게 편리하게 온라인으로 처리할 수 있다는 사실에 반가워할 것이다. 번거롭게 교회에 나감으로 인해 시간과 비용을 허비하기보다는 집에서 푹신한 소파에 앉아서 화면을 보며 편하게 예배하는 소위 재택(在宅) 예배를 선호하게 될 것이다. 문제는 한국교회의 예배 형태가 설교중심의 예배형태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회중이 예배 시간의 대부분을 앉아서 설교를 듣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어차피 설교를 듣는 것이 곧 예배라면 굳이 예배당까지 나가서 설교를 들을 필요가 있겠는가? 집에서 컴퓨터 앞에 앉아서 듣는 설교는 설교가 아닌가? 더욱이 사이버 예배에서 나오는 설교가 본 교회 목사님의 설교보다 훨씬 더 훌륭하다면 어찌할 것인가? 신자들의 이러한 질문에 대해 줄 대답을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렇게 볼 때에 한국교회는 사이버 예배에 취약하다는 것이 분명하다. 수년 내에 많은 사이버 교회와 사이버 예배가 등장할 터인데 그렇게 되면 한국교회의 회중은 급격히 감소하게 될 것이다. 1998년 {한국교회 미래를 준비하는 모임}(회장 이동원 목사)에서 한국 갤럽조사연구소에 의뢰해 6개월에 걸쳐 한국 개신교인의 교회 활동 및 신앙의식에 대한 조사를 실시한 적이 있다. 1998년 10월 13일 발표된 조사에 따르면, 매체를 통해 예배드린 경험이 있는 사람이 전체 교인의 11.0%였으며, 화상을 통하여 집에서 예배드리는 것에 대해 찬성한 기독교인은 33.4%나 되었다. 이 통계는, 한국교회의 신자들 중에서 앞으로 여건만 허락되면 화상을 통해 집에서 예배드리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그만큼 많다는 것을 보여준다. 더욱이 이렇게 대답을 한 사람들이 남자일수록 그리고 20대 이하 연령층일수록 더 높다는 사실은 음미해 볼만한 대목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수년 내에 사이버교회의 출현과 함께 한국교회의 회중은 30%이상 격감할 것이며, 한국교회의 공동화 현상은 단기간 내에 급격하게 진행될 것이다. 이에 대하여 시카고 근교에 있는 휘튼 대학 커뮤니케이션 센터의 과장이며 빌리그래함 선교센터의 원장인 제임스 엥겔이 준 경고를 한국교회는 유의해 볼 필요가 있다:
조사에 의하면, 텔레비전으로 방영되는 교회 예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날 교회에 가지 않고 집에 틀어박혀 있겠다는 사람들임이 판명되었다. 교회 건물 안에서 행해지는 예배에 참여하지 않고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면서 약식 예배를 드리겠다는 사람이 없을 경우 텔레비전 화면의 예배와 설교를 지켜볼 사람이 누구이겠는가? 결과적으로 악의적이요 기만적인 생각이 바로 텔레비전 예배이다.
비록 텔레비젼 예배를 두고 한 경고이지만 기실 따지고 보면 사이버 예배는 텔레비전 예배의 개량된 형태 외에 다름 아니다. 양자 모두 교회에 나가지 않고 집에서 예배를 드린다는 점에 있어서 동일한 동기와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는 바, 한국교회의 예배는 사이버 시대에 대한 구조적 취약성을 포함하고 있다. 앉아서 듣기만 하는 예배, 그래서 회중을 청중으로 전락시키는 예배, 개인적인 기도와 개인적인 결단과 개인적인 은혜만을 강조하는 개인주의적 신앙 형태, 소비자의 구미에 맞춰 상품을 내놓듯 자꾸만 회중의 입맛을 따라가는 예배, 그래서 점점 더 편한 쪽으로만 추구해 가는 작금의 한국교회 예배 풍토는 사이버 예배라는 신상품 앞에서는 경쟁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이제 회중은 교회의 예배보다는 사이버예배로 눈길을 돌리게 될 것이고, 거기에 대해 교회는 아무런 할 말도 없고 대책도 없게 된다. 왜냐하면 지금까지의 교회와 지금까지의 예배가 그런 모습을 보여왔기 때문이다.
IV. 닫는 말
지금까지 사이버 예배의 예배학적 분석과 한국교회에 미치게 될 영향을 간단히 고찰해 보았다. 사이버 예배는 유사예배일 뿐 결코 정상적인 예배라고 볼 수 없으며, 따라서 예배를 대치할 수도 없다. 그러나, 첨단 과학을 활용하는 문명의 이기(利器)인 사이버 공간은 현실세계가 줄 수 없는 많은 장점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교육과 선교와 기도회 등을 위해 유용한 보조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다.
문제는 한국교회의 예배구조와 예배신학이 취약하다는 사실이다. 예배신학이 취약한 상태에서 목회자와 신자들은 사이버 예배를 교회의 예배와 똑같은 예배, 아니 오히려 그보다 더 개량된 형태의 예배로 오인할 가능성이 크다. 사이버예배는 왜 안되냐고 묻는 질문에 대해 대답할 신학적 근거가 취약하다. 예견컨대 한국교회에서 사이버 예배는 수년 내에 급속하게 교회의 예배를 대치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될 때에 한국교회 예배인원의 수가 급감하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이에 대한 대책을 시급히 세워야 한다. 분명한 예배신학 위에 기초한 예배만이 다양하게 밀려오는 유사예배들로부터 교회를 지켜줄 수 있기 때문이다. 예배의 공동체성, 부활의 경축으로서의 예배, 그리고 몸으로 드리는 예배로서의 개념을 분명히 인식하고 이러한 예배신학을 정립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개념들이 단지 이론적 차원에만 머물지 말고 실제 교회의 예배에서 구체화되어야 한다. 그렇게 할 때에 한국교회는 사이버 시대라는 높은 파도에도 흔들리지 않고 굳건하게 서며 오히려 그러한 파도를 타고 더욱 더 앞으로 전진하는 교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