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사람, 죽음, 하늘(요 14:1-6)
사람, 죽음, 하늘
(요 14:1-6)
오늘은 정월 초하루 아침입니다. 마침 올해는 설날이 주일이어서 많은 분들이 고향으로 내려가시느라 예배에 나오지 못하셨습니다. 그러나 설을 가장 잘 지내는 것은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이 복된 은혜의 자리에 앉아계신 여러분께 감사드리며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설날이라고 보통날과 다른 것은 아닙니다. 해가 서쪽에서 뜨는 것도 아니고, 하루가 48시간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다른 보통날과 다른 것이 없지만 우리는 모든 일을 쉬고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찾아가는 일상의 삶이 완전하게 멈추는 색다른 경험을 하는 날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특별한 날이라 할 것입니다. 설날에는 맛있는 음식도 먹고 일을 떠나서 식구들과 한가한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일 년에 한 번 식구들과 함께 앉아 음식도 먹고 한가한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설날이 주는 큰 행복이라 할 것입니다.
설날에는 보통 때 하지 못하는 여러 가지 일을 하게 됩니다. 첫째로 그동안 멀리 떨어져 있는 부모나 형제, 일가친척과 함께 모여 즐거운 시간을 갖는 날입니다. 우리가 사는 것이 예전 같은 농경시대가 아니라 같은 식구라도 여기저기 흩어져서 살고 있습니다. 요즈음은 국내뿐만이 아니라 해외까지 흩어져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같은 부모 형제라도 멀리 오랫동안 떨어져 있으니 남처럼 느껴집니다. 이웃사촌이란 말처럼 가깝게 지내야 정드는 것이지 멀리 떨어져있으면 거리감이 있고 서먹합니다. 사촌 지나 육촌정도 되면 누군지 그 얼굴조차도 알지 못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합니다. 가까이 사는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지만 아무리 남남처럼 사는 형제라도 핏줄이 당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제를 만나면 기쁘고 남들이 느끼지 못하는 기쁨을 느끼게 됩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설날과 같은 명절을 통해서 모처럼 흩어져 있던 부모와 형제와 친척들이 함께 모이고 만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설 명절이 우리에게 주는 큰 행복이요 기쁨이라 할 것입니다.
구약 창세기 25장은 우리가 잘 아는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입니다. 에서와 야곱은 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형제였지만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 둘은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싸웠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이 둘은 장자권이란 이권을 놓고 서로 속이고, 미워하는 원수가 되었습니다. 야곱은 형의 분노를 피해서 멀리 화란의 외삼촌 집에서 오랫동안 타향살이를 했습니다. 먼 훗날 야곱은 이 시절을 아주 험악한 세월이었다고 회고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타향살이를 하던 야곱은 자수성가를 하여 큰돈을 모은 부자가 되었습니다. 아내도 네 명이었고 11남 1녀 열둘이나 되는 자식을 두었습니다. 옛날이 시대에는 자식이 많은 것이 부자였습니다. 그야말로 야곱은 혈혈단신으로 어린 나이에 타향살이를 했지만 일가를 이루어 아쉬울 것이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늘 고향을 그리워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고향에 돌아가 형을 만날까하는 생각이 간절했습니다. 객관적으로 생각할 때 야곱은 고향에 돌아갈 필요가 없었습니다. 야곱이 자리 잡은 곳은 메소포타미아의 비옥한 땅으로 야곱의 고향 돌짝밭 사막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곳을 떠나 고향에 돌아가기를 늘 소원했습니다. 사실 형 에서에게 연연할 이유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늘 고향에 돌아가 형을 만나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위험한 모험의 길이었습니다. 그 많은 재산, 소와 양과 말과 온갖 가축 떼를 몰고 고향을 찾는 일은 간단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형을 만나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형이 아직 분이 풀리지 않았을 지도 모르고 아직도 자신을 죽이려고 할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형을 만나고 싶어 식솔들을 다 끌고 위험을 무릅쓰고 두려운 마음을 품고 고향으로 떠났습니다. 핏줄이 당겼을 것입니다. 이것이 형제입니다. 반면 형 에서도 동생이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사백 명의 장정을 데리고 마중을 나갔습니다. 그리고 에서와 야곱이 만났습니다. 이 둘의 감격스러운 만남의 장면이 창세기 33장 4절에 자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맞추어 그와 입맞추고 서로 우니라 에서는 동생에게 야속하고 화가 나는 일도 있었겠지만 다 눈 녹듯이 녹아 동생을 끌어안고 울었습니다. 야곱도 형 에서의 얼굴을 보고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라고 말합니다.
설날은 야곱과 에서가 함께 만나는 것과 같은 감격스러운 만남이 있는 날입니다. 요즈음 우리의 삶은 형제간에 정을 느끼기가 어렵습니다. 여러 가지 얽혀있는 이권이 있습니다. 섭섭함도 있습니다. 형제간에 다른 사람에게보다도 더 큰 앙금이 있고 갈등이 있고 미움이 있습니다. 부모자식 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옛날에는 부모자식 간에는 모든 것을 뛰어넘는 따뜻한 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자본주의 사회가 되어 부모자식 간에도 계산을 하고 서먹서먹합니다. 그래서 서로 보지 않고 지내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설날에는 적어도 이와 같은 인간관계를 가졌던 사람들이 서로 목을 끌어안고 우는 날이어야 합니다. 지난날들의 모든 분함과 섭섭함이 사라지는 놀라운 만남의 기적이 있는 날이어야 합니다.
둘째로 설날, 환갑, 생일 등 특별한 이름이 있는 날에는 자신이 지나온 시간을 계산하게 됩니다. 평상시에는 나이를 기억하지 않고 잊어버리고 살다가 이런 특별한 날이 되면 ‘내 나이가 벌써 이렇게 되었구나!’ 하는 생각으로 자신의 세월을 되돌아보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설날이나 생일, 환갑 등 특별한 이름을 갖는 날은 시간의 매듭입니다. 시간은 영원합니다. 똑같은 날입니다. 설날이라고 다를 것이 없습니다. 똑같은 시간이 변함없이 흘러가는 똑같은 날입니다. 그래서 시간의 매듭을 정해서 이 날은 설날이다, 이날은 생일이다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사람들이 시간을 정해서 매듭을 붙인 것이지 그렇다고 시간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음력에는 열두 간지를 붙였습니다. 똑같이 흘러가는 시간에 하루를 붙잡아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여기에 깊은 뜻이 있습니다. 시간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끝이 있다는 것을 표시하기 위한 것입니다. 삼백육십오일 똑같은 날이지만 오늘을 설날이라 이름을 붙인 것은 시간은 끝이 있다는 것입니다.
불교와 기독교의 시간의 개념이 다릅니다. 불교에서는 시간은 영원하다고 생각합니다. 윤회설을 믿습니다. 시간은 끝없이 돌고 도는 것이어서 전생, 현생, 내생이 계속해도 돈다고 생각하는 것이 불교의 시간개념입니다. 반면 기독교는 처음이 있고 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알파와 오메가가 있으며, 창조가 있고 심판이 있다는 것이 기독교의 시간개념입니다. 불교와 기독교의 다른 시간개념이 우리의 인생관과 가치관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시간은 돌고 도는 것이라는 불교의 시간개념을 가지고 세상을 사는 사람은 마음이 넉넉합니다. 오늘 못하면 내일하고 이생에서 못하는 것은 내생에서 합니다. 늘 도는 것이기 때문에 초조하지 않고 넉넉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시간개념은 직선적 시간개념입니다. 처음이 있고 끝이 있고, 창조가 있고 심판이 있습니다. 오늘 하지 못한 일은 내일 할 수 없습니다. 끝입니다. 오늘을 놓치면 다시 이시간이 돌아오지 않습니다.
얼마 전 부산에서 기독교인 수천 명이 모여 집회를 했습니다. 그때 어떤 목사가 “해인사가 망하게 해주십시오. 불국사가 망하게 해주십시오.”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거기 모인 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아멘을 외쳤다고 합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불자들이 모여서 “순복음교회가 망하게 해주십시오. 소망교회가, 영락교회가 망하게 해주십시오.” 라고 기도했다면 우리 기독교인들이 뭐라고 했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다종교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자칫하면 종교 간에 갈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식이하의 행동을 하는 철없는 기독교인이 있는데도 사회적 갈등이 없는 것은 불교인이 넉넉한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기독교 목사이지만 잘못한 것은 잘못한 것이라고 시인하고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의 시간관은 종말론적 시간관입니다. 돌아간 것은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오늘 내가 살아가는 지금이 내 인생에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번 사는 삶을 후회 없이 살아야 합니다. 섣달그믐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찾아 길을 떠나 귀향길이 얼마나 복잡한지 모릅니다. 고생할 것이 뻔하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고향을 찾아 떠납니다. 새해 첫날 설을 고향에서 지내기 위해서입니다. 고향을 찾는 마음은 우리 인간들이 모두 가지고 있는 영원한 본능입니다. 설날이 되어도 찾아갈 고향이 없는 사람은 참으로 불쌍한 사람입니다. 고향을 찾는 마음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고속도로를 꽉 매운 고향을 찾아가는 긴 자동차의 행렬을 보면서 우리들의 삶의 모습도 하늘나라 영원한 고향을 찾아가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의 날마다 삶이 고향을 찾아 나아가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사실 고향을 찾는 마음이 다 같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설레고 기쁜 마음으로 고향을 찾습니다. 부모형제와 일가친척을 만나서 자랑할 것이 있는 사람은 의기양양하게 고향을 찾습니다. 이것을 금의환향(錦衣還鄕)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이런 마음으로 고향을 찾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 가지 이유와 사정으로 어깨가 처진 사람,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 오랜만에 만나는 부모형제 일가친척의 마음을 어쩌면 더 아프게 할지도 모르는 사람들은 쓸쓸하게 기가 죽어 고향을 찾게 됩니다.
우리가 찾아가는 하늘나라 영원한 고향을 향하여 가는 마음도 같다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내놓을 것이 있는 사람은 의기양양하게 하나님 나라에 갈 것이고 하나님 앞에 내놓을 것이 없고,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은 그 마음이 무겁고 안타까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 후서 4장 7-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사도 바울은 늘 하나님 나라에 돌아갈 것을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가서 받을 상 면류관을 바라보니까 가슴이 벅찼습니다.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내가 할 일을 다 했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상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하늘나라를 찾는 사도바울의 마음은 늘 기쁘고 벅찬 것이었습니다. 설날은 우리에게 고향을 생각하게 하는 날입니다. 고향을 향하여 가는 우리의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영원한 나라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가는 우리들의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이것이 설날을 맞이하여 우리가 생각해야 할 마음입니다. 설날은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 사람을 생각하는 날입니다. 시간의 매듭을 통해서 내 인생의 끝을 생각하는 날입니다. 고향을 찾는 우리의 발걸음을 통해서 결국은 우리가 돌아갈 영원한 고향 하늘나라를 생각하는 날이 설날입니다. 이 같은 귀한 은혜가 여러분 가운데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