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가곡

[스크랩] 스트라우스 - 남국의 장미

김믿소사 2007. 7. 10. 00:25

 

 

 

슈트라우스(Strauss, Johann; 1825.10.25~1899.6.30, 오스트리아)


왈츠의 황제로 유명한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원무곡 ‘남국의 장미’에서 화려한 멜로디로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꽃에 비유하고 있다.

아버지 요한 슈트라우스와 아들 요한 슈트라우스는 이름이 같은 데다 두사람 다 왈츠의 대가여서 혼동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은 아버지를 ‘왈츠의 아버지’, 걸작 왈츠를 더 많이 작곡한 아들을 ‘왈츠의 황제’라고 구별하기도 한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1825년 10월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태어났다.

아들 요한 슈트라우스가 태어날 당시 아버지는 21세의 젊은 음악가로 막 빈 왈츠의 화려한 무대를 개척해 가고 있었다.

아버지와 아들이 이름도 같을 뿐더러 같은 음악 장르에 몰두했으니 부자 사이가 유난히 돈독했으리라고 짐작하겠지만 천만의 말씀. 음악가의 길이 너무도 고되고 험난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 아버지는 세 아들 중 어느 누구도 음악가로 만들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재능을 물려받았는지 세 아들 모두 왈츠의 대가가 되고 말았다.

아버지는 화가 난 나머지 가출하고 말았다.

장남 요한은 19세 때 연주회를 열어 큰 성공을 거둔 이후 집안 살림을 떠맡았다.

요한 슈트라우스가 39세 때 프랑스 파리에서 수많은 오페레타를 작곡해 선풍적 인기를 끌던 오펜바흐가 빈으로 와서 밤마다 극장이 초만원을 이루는 대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빈 사람들은 파리의 대가 오펜바흐와 빈의 자존심 슈트라우스를 한번 대결시켜 볼 양으로 오펜바흐에게는 ‘석간신문’, 슈트라우스에게는 ‘조간신문’이라는 제목을 각각 주고 왈츠를 작곡하도록 했다.

발표 당일의 반응은 당시의 유행을 따랐던 ‘석간신문’이 갈채를 받았다.

슈트라우스의 ‘조간신문’은 춤곡이라기보다 악곡으로 감상할 수 있는 내용인데다 서주와 후주까지 길어 인기가 별로 없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오늘날에는 오펜바흐의 ‘석간신문’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 데 비해 ‘조간신문’은 아직까지 남아 ‘신문’ 이상의 구실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슈트라우스의 10대 왈츠라고 하면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예술가의 생애’ ‘빈의 수풀 이야기’ ‘술, 여자, 노래’ ‘천야일야 이야기’ ‘빈 기질’ ‘남국의 장미’ ‘여왕님의 레이스 손수건’ ‘봄의 소리’ ‘황제왈츠’ 등 거의 다 우리 귀에 익은 곡들이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당시까지만 해도 춤곡 정도로밖에 인식되지 않던 왈츠를 예술적 차원으로 끌어올린 작곡가다.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어깨춤이 절로 나올 듯한 곡들만 썼던 그가 시무룩하고 묵직한 곡만 쓴 브람스와 친구였다는 점. 브람스는 슈트라우스가 펼쳐보이는 무궁무진한 선율의 아름다움과 색채적인 화성 그리고 고상한 관현악법을 절찬했다.

슈트라우스와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 그는 ‘왈츠의 황제’라고 불렸지만 정작 춤에는 깡통이었고, 누가 옆에서 아무리 권해도 한사코 춤을 추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슈트라우스는 넥타이 멋쟁이로 통했다.

최신 유행의 넥타이만 맸고 집에서도 잘 때 외에는 풀지 않았으며 아무리 마음에 드는 넥타이라도 결코 다섯번 이상은 매지 않았다고 한다.


4분의 3박자의 시인 요한 슈트라우스. 그는 우리에게 새처럼 가볍게 날 수 있는 왈츠라는 날개를 주었다.

1899년 6월3일 그가 7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장례식에는 10만명의 문상객이 다녀갔다고 한다.

 


출처 : 아름다운사람들의살아가는이야기
글쓴이 : 하늘천사형오氏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