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베토벤 교향곡 제5번 다단조 작품 67 운명<전악장>
베토벤 교향곡 제5번 다단조 작품 67
운명
루드비히 반 베토벤, 1770~1827년 57세까지의 생.
그는 키가 작고 뚱뚱하며 굵다란 뒷덜미에 장사같은 골격을 가졌따. 얼굴은 커다랗고 불그데데하였다.
1770년 12월 16일, 독일 쾰른 근방, 본시의 가난한 다락방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술주정뱅이 테너 가수였따. 어머니는 종비 계급 여자였다.
아버지는 그의 음악적 재질을 이용하여 신동이란 간판을 붙여 그를 구경거리로 만들려 하였다. 그의 소년 시절은 물질적 근심, 빵을 벌어야 할 걱정 등, 일찍부터 걸머진 직책으로 슬프기만 하였따. 1787년(그가 외국나이로 15살)에는 극진히 사랑하던 어머니마저 여의게 된다.
어머니는 폐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베토벤도 같은 병에 걸렸따고 생각하고 있었따. 벌써부터 그는 앓는 일이 많았다. 그리고 그는 자기의 병상에다가 우울증을 스스로 덧붙여 정작 병고보다도 그 우울증이 더 대단한 것이었따.
16세모습
1792년 2월, 베토벤은 당시 독일의 음악 수도였던 비인에 정주하였따(1787년 봄에 그는 이미 비인에 짧은 여행을 한 일이 있었다. 그 때에 그는 모짜르트를 만나 보았었는데, 모짜르트는 그에게 거의 아무런 주의도 하지 않았던 듯하다.
1790년 12월에 본에서 알게 되었던 하이든이 몇 번 그에게 레슨을 하여 주었다. 베토벤은 또 알브레히츠베르거와 살리에리를 스승으로 택하였따. 전자에서 대위법과 주법의 가르침을 받고 후자에게는 성악 작곡법을 배웠다.
1796년(외국나이 25살쯤)에서 1800년 사이에 귓병이 무서운 발악을 시작했다. 베토벤의 작품표를 보면 1796년 이전의 것으로는 작품 제 1번인 삼중주곡 셋밖에 없다. 베토벤의 전 작품은 베토벤의 귀가 어두워진 뒤에 쓴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완전히 귀머거리는 되지 않았으나 귀는 더욱 더 어두워 갔다. 베토벤은 높은 소리보다 낮은 소리를 비교적 잘 들을 수 있었다. 만년에 그는 나무 토막을 사용했는데, 그 한 끝을 피아노 속에 넣고 또 한 끝은 이빨 사이에 물고 잇었다고 한다. 작곡을 할 때는 이런 방법을 써서 소리를 듣곤 하였따.
밤낮으로 귀는 윙윙거렸다 게다가 장 질환에 몹시 시달리고 있었다. 그는 자기가 병신ㅇㅣ라는 것을 남에게 알리지 않으려고 사람들을 피하였다. 1801년에 이르러서는 그 이상 더 숨겨둘 수가 없었따. 그는 절망적인 심정으로 두 사람의 벗, 의사 베겔러와 목사 아멘다에게 고백을 하였다. '나는 귀머거리가 된 것이네 (중간 생략) 나는 얼마나 여러번 나의 존재를 저주하였는지 모르네~! (중간 생략) 될 수만 있는 것이라면 나는 운명과 싸워 보고 싶네. 그러나 나는 신이 창조한 가장 비참한 인간이라고 느껴지는 때가 한두번이 아니네...... 체념~! 얼마나 슬픈 피난처인가! 그러나 이것만이 나에게 남은 유일한 피난처이네.'
이 비극적 슬픔은 그 시기 여러 작품 속에 <비창 주명곡>
(작품 제 13번, 1799)중에, 특히 <피아노를 위한 제 3소나타>(작품 제 10번, 1789)의 '라르고'중에 그것이 나타나 있다.
나의 의견--여기서 그 곡을 깔아서 들으면서 다음것들을 읽는 것도 좋을 듯.
비인에서 외롭고 불행스러웠던 베토벤은 고향의 추억 속에 피난처를 구하였다. <칠중주곡>중의 '변조하는 안단테'의 테마는 라인 지방의 민요이다. <제 2교향곡>역시 라인이 낳은 작품으로서 자기의 꿈을 향하여 미소하고 잇는 젊은이의 시이다. 이 교향곡은 즐겁고 간지럽다. 그러나 어떤 대목에서는 가령 '도입절'이라든가 은은한 바스의 '명암조'라든가 환상적언 '스케르쪼'에서 우리는 참으로 커다란 감동을 가지고 - 이 쩖은 모습 안에 장차 올 천재의 시선을 볼 수가 있다.
여기서 그 곡을 깔아서 들으면서 다음것들을 읽는 것도 좋을 듯
사랑의 성결성에 관하여서 그는 아주 강경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따. 모짜르트는 <돈판>을 씀으로써 그의 천재를 모독한 것이라 하여 베토벤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각별한 친구였떤 신들러는 확언하였따. -'그는 일종의 처녀 같은 수줍음을 가지고 일생을 끝마쳤고, 자신의 타락을 자책하여야 했던 일이 도무지 없었다.'
1801년에 <월광곡>이라는 '소나타' (작품 제 27번, 1802)를 한 여인에게(그의 정열의 대상인듯한) 바침으로써 그를 불멸화하였따.
이 사랑은 그로 하여금 자기가 병신이라는 것의 비참함과 사랑하ㅡㄴ 사람과의 결혼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던 자기의 불안정한 생활 상태를 더욱 더 뼈저리게 느끼게 하였다.
이 애정, 이 고뇌, 이 지력, 이 낙망과 호기의 교착, 이 내심의 비극은 1802년에 쓰여진 대작품들 속에 나타나 있따. 즉 <장송 주명곡>(작품 제 26번), <환상풍의 소나타>와 <월광 주명곡>(작품 제 27번), 웅대하고 비통한 독백과도 같은 극적 레시타티프가 달린 <제 3소나타> (작품 제 31번), 알렉산더 대왕에게 바친 바이올린을 위한 <C단조 소나타>(작품 제 30번), <크로이쩌 소나타>(작품 제 47번) 등.
이러한 여러 작품들에서는 그 행진적인 동시에 전투적인 리듬의 활기와 박력이 두드러지게 인상깊다. 그것은 특히 <제2교향곡>의 알레그로와 피날레에 있어서, 더욱이 <알렉산더 대왕에게 바친 소나타>의ㅏ 그 우렁차고 장쾌한 제 1악장에 있어서 뚜렸하다. 그의 온 동정은 혁명적 사상으로 쏠리고 있었다. '그는 공화주의적 원리를 사랑하였다'고 절친한 신들러가 말했다. '그는 무한한 자유와 국민적 독립을 주장하는 사람이었따. (중간생략) 누구나 나라의 정치에 참여할 수 있기를 그는 바랐었따. 그는 '승리의 신' 최초의 집정관에 의하여 건설될 영웅적 공화국을 꿈꾸고 잇었던 것이다. 1904년 <영웅 교향곡>이 보나파르트를 위해 쓰여졌다. 그 뒤 베토벤은 나폴레옹이 제위에 올랐다는 것을 알고 분개하였따. 그래서 그는 '어느 영웅의 추억을 찬양하기 위한 영웅적 교향곡'이라고 제목을 썼다.
베토벤은 돌연 <제 5교향곡>의 작곡을 중도에서 중단하였다. 그것은 <제4교향곡>을 , 몇번이고 초안을 고쳐 만들던 그의 버릇과느 ㄴ달리, 단숨에 쓰기 위하여서였다. 행복이 그의 눈앞에 나타났던 것이다. 1806년에 헝가리의 마르톤바자아르에서 베토벤은 그들의 집에 묵게 되었던 바, 거기에서 베토벤과 테레제는 서로 사랑하게 되었었다.
이 해에 쓰여진 <제4교향곡>은 그의 전 생애의 가장 평온하였던 시절의 향기를 뿜고 있는 깨끗한 한 떨기의 꽃이다.
이 깊은 평화도 영속될 운명을 갖지 못했다. 그래도 사랑의 행복된 영향은 1801년까지 계속된다. 그 자신의 그의 소나타 중 가장 완벽한 것이라 보는(신들러와의 담화 중에서) <열정 주명곡>(1807)을 테레제의 오빠인 프란쯔에게 바쳐져 있다.
어떠한 알 수 없는 이유가 서로 사랑하던 이 두 사람의 행복을 방해했을까? -약혼은 파기되었다 그러나 둘이 다 결코 그들의 사랑을 잊어버릴 수는 없었다. 테레제는 죽는 날까지 베토벤을 사랑하였따. 만년에 베토벤은 아무도 없는데 혼자서 그녀의 초상에 키스를 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고 한다.
1810년 다시금 그는 외로워졌따. 그러나 드디어 그에게 명성이 왔다. 또 자기의 힘에 대한 자각도 생겼다. 이제는 아무것도 거리낄 것 없이, 사회, 인습, 세인의 공론도 돌아볼 것 없이, 세차고 거센 자기의 기질대로 행동하였따 그는 또다시 옷차림도 되는 대로 하였따. 그의 자유스러운 거동은 전보다도 더욱 대담해졌다. '나는 선 이외에는 아무것도 탁월의 표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그는 1812년에 쓰고 있다.
베토벤은 괴퇴와 1812년에 만났으나 서로 뜻이 잘 맞지 않았다. 그의 성격은 너무나 자유롭고 과격했던 까닭에, 괴테의 성격과는 어울리지 않았따.
베토벤은 별로 착실한 교육도 받지 못했으나, 그의 문학 취미는 확실한 것이었다. 괴테 외에도, 호머, 플루타르크, 셰익스피어, 이 세사람을 특히 좋아하였따.
<제 7>과 <제 8> 교향곡은 1812년 테플리쯔에서 불과 수개월 동안에 쓰여졌따. 즐거움과 분격의 열광이 있꼬, 급작스러운 콘트라스트가 잇고, 엄청나고 거창한 용솟음, 그 거인적 폭발이 있다. 그 당시 독일 북부 지방에선 <제 7교향곡>이 술주정뱅이 작품이라는 평을 받았었다.
Portrait in Oil, J.W. Mahler 1815
1814년은 베토벤의 명성이 최고조에 달한 해였따. 빈회의에서 그는 전 구라파의 한 영광으로서 대우 받았다. 왕후들은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 그는 독립전쟁에 마음이 팔렸었다. 1814년 초 전투적 합창가 <게르마니아의 부활>을 썼다. 1814년 2월에는 왕후를 청중으로 애국적 가곡 <영광스러운 순간>을 지휘하였고, 1815년에는 파리 함락에 즈음하여 합창곡 <모두 이루어지다!>를 작곡하였다. 이처럼 시시로 사정에 응하여 쓴 작품들은 다른 모든 그의 작품보다 그의 명성을 높이었다.
이 영광스러운 시기에 뒤따라 가장 슬프고 처참한 시기가 온다. 빈이란 곳은 베토벤에게 호의를 가져준 적은 없었다. 19세기 말엽에 빈에서 생활한 대작곡가들은 형식주의적인 브람스의 숭배에 빠져 버린 이 도시의 정신때문에 무참히도 고통을 겪었따. 그는 기회만 있으면 그 곳을 버리려고 하였따. 그러나 빈은 음악가들이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잇는 곳이었다. 거기에는 어느 때고 베토벤의 위대함을 알아보고, 자기 나라로 하여금 그를 잃게 되는 수치를 면하게 한 음악 애호가 귀족들이 있었따. 빈에서 가장 부유한 귀족이 그에게 해마다 연금을 줄 것을 제안하였다.
1814년 빈회의 이래로 빈의 성격도 달라졌다. 사람들은 정치에 마음이 팔려 예술에 대한 관심이 줄고, 음악 취미는 이탈리아 파로 인하여 저하되고, 온통 로시니에게로 쏠리고 있던 유행은 베토벤을 거드름쟁이라고 몰고 있었다. 베토벤의 벗들과 옹호자들은 뿔뿔이 흩어지기도 하고, 또 죽기도 하였따. 베토벤은 그만 고독 단신이 되어버렸다.
귀는 완전히 어두워졌었다. (귓병 이외에도 그의 건강은 나날이 나빠졌다. 1816년 10월 이래, 그는 염증성 카타르로 몹시 앓았따. 1817년 여름에 의사는 그것을 폐병이라고 했다. 1817~18년엔 이 가짜 폐결핵으로 매우 근심하였따. 1820~1821년에는 심한 신경통, 1821년에는 황달, 1823년에는 결막염을 앓았따. 1815년 가을부터 사람들과의 접촉은 다만 필담으로 밖엔 할 수 없게 된다. 외따로 떨어져 자연 속에서 더욱 위안을 얻었다. 1815년에 그를 사귄 챠알즈가 말한다. "베토벤처럼 꽃이며 구름이며 자연의 만상을 완전히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을 그는 본 일이 없다"고.
1818년에 베토벤은 이렇게 쓰고 있따. '거의 비럭질을 해야 하게끔 되었으니, 일부러 궁색하지 않은 척해야만 한다.' '작품 제 106번의 소나타는 궁박한 사정에서 쓰여진 것이다. 빵을 벌기 위해 작품을 써야 한다는 것은 기막힌 노릇이다' 슈포르가 말한바에 의하면, 베토벤은 구두가 떨어져 외출할 수 없던 일이 번번했따.
예약 출판을 한 <장엄 미사곡>은 일곱 사람밖에 주문이 들어오지 않았다.(음악가는 한 사람도 없었다.) 갈리찐 공은 그에게 사중주곡, 작품 제 127, 130, 132의 작곡을 시켰따. 그의 작품중 가장 웅숭깊고 피로써 쓰여진 것 같은 작품들인데, 동전 한푼 받지 못했다.
가사의 곤궁과 치러주지 않는 연금을 받기 위한, 또 조카뻘 되는 아이의 후견을 맡기 위한 지리한 소송에서 그는 몹시 시달리고 있었다.
그는 마음에 넘치는 헌신적 애정의 욕망을 이 조카에게로 기울였던 것이다. 그에게서 칼을 뺏아가려는 못된 어머니에게 소년을 주지 않으려고 우선 그는 싸워야만 했따.
지능도 부족하지 않던 터로 베토벤이 대학 교육 시키고자 했던 조카는 결국 상인으로 만드는 데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칼은 부랑자들과 사귀고 빚을 지고 있었다. (그 때 그를 본 신들러가 말한 바에 의하면, 그는 갑자기 70노인처럼 풀이 죽고 기운이 꺾이고 아무 기력도 없어졌다. 칼이 죽었더라면 그도 죽고 말았을 것이다 -그 후 며칠 만에 기어이 그는 세상을 떠났따)
집안의 시끄러운 일, 빈곤, 그 밖에 여러가지 걱정에 몰려서 1818년부터 1821년까지의 다섯 해 동안에 그는 피아노를 위한 세 작품(제 101번, 102번, 106번)밖에 쓰지 못했다.
이렇게 복잡한 그의 생활들과 귀의 문제들. 쉰들러가 그 슬픈 일화를 들려준다
"베토벤은 총연습을 지휘하기를 청하였다 (중간생략) 그는 템포를 상당히 느리게 하엿따. 오케스트라는 그 지휘봉을 따르고 잇었으나 가수들은 제멋대로 서둘러 나갔다. 그리하여 전반적으로 혼란이 일어났다. 평상시의 지휘자 움라우프가 이유는 말하지 않고 잠시 휴게할 것을 제안하였따. 그리고, 가수들과 몇 마디 주고받는 의논이 잇은 다음, 연주를 다시 시작하였다. 또 다시 같은 혼란이 일어났따. (중간생략) 나는 이렇게 썼다. '연주를 계속하지 마세요. 이유는 집에 돌아가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후다닥 그는 관중석으로 뛰어내리고 나에게 외쳤다. '어서 밖으로 나가세.' 그는 단숨에 집까지 달음질쳐 방 안으로 들어가 소파 위에 털석 주저앉으며 두 손으로 얼굴을 파묻은 채 식사 시간이 되기까지 그대로 있었다. (중간생략) 그는 그 날 마음속 깊이 타격을 받아, 죽는 날까지 그 무서운 장면의 인상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따"
2년 후, 1824년 5월 7일에 <합창을 겸한 교향곡>, 바그너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는<제 9 교향곡>을 지휘하였을 때, 박수로 떠나갈 듯한 장내 전체의 요란한 소리가 그에게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한 여가수가 그의 손을 붙잡아 관중석을 향하여 돌려세워 주어 청중들이 일어서서 모자를 휘두르며 박수 갈채를 하고 잇는 광경을 눈앞에 보기까지는 그는 도무지 알지 못하였따.
전 생애 통해 그는 환희를 노래하여 그것을 대 작품의 하나를 장식하는 면류관으로 삼고자 하였따. 일생 동안 그는 노래의 정확한 형식과 그것을 넣기에 합당한 작품을 찾으려고 고심하며 망설였다. <제9교향악>에서도 좀처럼 결정을 짓지 못하여 '환희에 바치는 송가'는 제 10 혹은 제 11교향곡으로 미루어 버릴까하는 생각을 마지막 순간까지 가졌떤 것이다. <제 9>의 제목이 사람들이 보통 부르듯이 <합창 교향곡>이라고 되어 잇지 않고 <환희의 송가에 의하여 합창을 종곡으로 한 교향곡>이라고 되어 잇다는 것은 주목할 필요가 있따.
'어떤 악상이 마음 속에 떠오를 때 나에겐 그것이 기악으로 들리지 성악으로 들린 적은 없다'고 그는 말한다. 그래서 그는 성악을 사용할 것을 최후의 순간까지 미뤘었따.
범용한 비인의 청중도 이 거인적 작품에는 압도되었다. 비인의 경박함도 한때는 이 작품으로 인하여 뒤흔들렸다. 그러나 결국 유행은 거의 로시니와 이태리 가극으로 쏠리고 있었다. 베토벤은 굴욕과 슬픔을 머금고 런던으로 이주하여 거기서 <제9교향악>을 연주시킬 생각을 한다. 이번에도 그의 애호가 몇몇 귀족이 그가 조국을 떠나지 않도록 간원을 한다.
이 간원을 받고 그는 빈에 눌러 있기로 결심한다.
1834년 5월 7일에 빈에서 <장엄 미사곡>과 <제 9교향악>의 초연이 열렸따. 성공은 굉장하여 거의 소요를 일으키다시피 하였따. 베토벤이 스테이지에 나타낫을 때 갈채의 일제 사격을 다섯 번이나 받았따. 예의지국인 이 나라에서는 황실의 내빈이 잇을 때라도 갈채를 세번 밖에는 하지 않는 풍습이 있었다. 경찰이 데모를 진압하지 않으면 안 되엇따. <제 9교향악>은 열광적 감격을 일으켰다.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고 잇엇따. 베토벤은 연주회가 끝난 뒤에 감격한 나머지 기절을 하였다 . 일시적이었따. 물질적 곤궁은 변함이 없었따. 여전히 그는 가난하고 병에 시달렸다.
그는 또 위병으로 몹시 신고하고 있었따. 1824년에서 1825년에 걸친 겨울에는 병세가 몹시 악화되었다. 각혈을 하고 코피를 쏟는 일이 가끔 있었다.
뮐러 박사는 말한다 '정부며, 경찰이며, 귀족 계급에 관하여 베토벤은 늘 자기 위견을 공공연히 말하는 것이었따. 경찰에서는 그것을 알고 있었으나, 그의 비평과 풍자를 별로 폐혜 될 것 없는 몽상으로 여겨 눈을 감아 주었다. 그ㅏ리하여 특출한 천재를 가진 사람을 경찰은 방임하였던 것이다. 일화를 보자.
--1819년에 그는 하마터면 경찰의 말썽거리가 될 뻔하였다. 그가 '그리스도는 결국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유태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고 너무 큰 소리로 말한 때문이었다. 그 때, 그는 장엄한 미사곡을 쓰고 있었다.
아무도 이 굽힘 없는 힘을 억압할 수는 없었다. 이 힘은 이제는 고뇌를 희롱으로 대하고 잇는 것 같았다. 최종 만년에 쓰여진 작품들은 괴로운 환경 속에서 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조카의 자살 미수--머리에 피스톨을 쏨. 그러나 죽지는 않음. 고얀것. ㅋ) 흔히 변죽과 장쾌한 모멸이 전혀 새로운 성격을 자아내고 잇따. 죽음을 4개월 앞두고 1826년 12월에 끝마친 최후의 악장, 즉 현악 사중주곡(작품 제 130변)의 새로이 쓰여진 종곡은 지극히 즐겁다. 사실로 이 즐거움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즐거움이 아니다. 때로는 모셸레스가 말한 것처럼 거칠고 돌발적인 웃음인가하면, 때로느나 또 그것은 갖은 고난을 극복하여 얻은 감격적 미소인 것이다.
그러나 죽음은 닥쳐오고 있었다. 1826년 11월에 그는 늑막염성 감기에 걸렸다. 조카 장래를 안정시켜주기 위해 겨울에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와 병속에 눕게 되었따.
1827년 1월 3일에 그는 극진히 사랑하던 조카를 전 유산의 상속자로 지정하였따.
영국의 몇몇 친구들의 호의가 없었던들 그의 최후의 순간은 불행으로 암담하게 되엇을지도 모른다. 그는 매우 유순하고 참을성 있게 되었었따. 성악가 크라몰리니는 그가 병속에 누워있을 때 찾아간 이야기에서 그 때 배토벤은 눈물겨우리만큼 명랑하고 친절한 태도를 보였었따고 한다. 임종의 자리에 누워서 1827년 2월 17일에 세번이나 수술을 받고(12`20, 1`8, 2`2일) 네 번째의 수술 (2월27)을 기다리면서 그는 명랑한 기분으로 쓰고 있따. '인내하면서 나는 생각한다, 모든 불행 뒤에는 반드시 좋은 일이 따르는 법이라고.'
그 좋은 일이란 죽음의 해방이었다. 운명하던 때에 그가 말한바에 의하면, '희극의 종결'이었다.
그의 눈을 감겨준 것은 아무 인연도 없는 알지 못하는 사람의 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