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자료
[스크랩] 율법과 은혜
김믿소사
2007. 7. 12. 23:55
율법과 은혜
구약 시대에 하나님이 설정하신 율법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
서는 율법보다는 은혜를 더욱 강조합니다. 신약 성도들에게 율법은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까요? 여기에는 3가지의 의견이 있습니다.
첫째는 '율법주의'입니다. 이 주장은 신약 성도들도 율법은 꼭 지켜야 한다는 주장입니
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이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이 많음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습니
다. 어떤 사람은 '중매'는 인위적인 것이라고 생각해서 하나님의 뜻을 기다린다고 하며 계
속 노처녀, 노총각으로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주일날 이사가면 안된다고 하며
물건을 조금 옮기는 것도 잘못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며 어떤 사람은 주일날 물건
을 사는 것을 죄악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주일 성수를 장려한다는 측면에서 주일날 물건
을 사는 것은 되도록 피해야 하겠지만 그것이 주된 신앙적 태도가 되면 신앙의 본질은 흐
려져 버리고 맙니다. 그렇다면 주일날 교회를 가기 위해서 버스 타는 것도 금해야 합니까?
대개 율법주의는 신앙적 교만으로 비롯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면서 조심
해야 할 일은 이러한 율법주의로 흐르려는 경향입니다.
둘째는 '반율법주의'입니다. 이 주장은 신약 성도에게 율법은 폐기되었기 때문에 율법은
지킬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성도들을 오히려 방종으로 이끌 뿐입니다.
야고보서는 초대교회에 있었던 이러한 반율법주의적인 경향에 철퇴를 가한 것이었습니다.
셋째는 '은혜주의'가 있습니다. 이 주장은 은혜를 강조하긴 하지만 율법을 반대하지는 않
는 입장입니다. 즉 신자들에게도 율법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칼빈은 신자를 위해서 율법
을 전폐하려고 하는 것은 율법을 오해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모세의 율법은 죄인들 사이에
서는 죽음만을 만들어 내지만 성도들 사이에서는 더 좋고 훌륭한 이용법이 된다고 역설했
습니다. 그러나 칼빈은 "율법은 이제는 우리를 정죄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폐기되었다"고
덧붙였습니다.
우리는 율법주의로도 반율법주의로도 치우치지 말고 은혜 중심적인 삶의 온전한 의미를
잘 살리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진정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들은 자
기가 잘 지킬 수 있는 한 가지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신앙을 비교하는 어리석음도 버릴 줄
압니다.
예를 들어, 어떤 분은 새벽기도를 잘 하는 것으로 자기 신앙이 남보다 나은 줄 생각합니
다. 그것은 오해입니다. 어떤 분은 주일날 물건 사지 않는 것으로 자기 신앙이 남보다 나은
줄 생각합니다. 그것도 오해입니다. 그런 오해가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 중에 많이 발견됩
니다. 우리가 소중히 여겨야 할 신앙의 덕목은 수천 가지가 넘습니다. 그리고 단순히 비교
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언뜻 생각해도 <주일에 물건을 사지 않는 것>보다 훨씬 소중한 신
앙 덕목들도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원수를 사랑하는 것, 내 성격에 많지 않는 형제
자매들을 이해하는 것, 교회생활에서 겸손한 것> 등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 것들은
다 제쳐놓고 자기가 잘 자키고 있는 <주일에 물건 사지 않는 것> 한 가지 신앙적 형태로
자신의 신앙을 남의 신앙보다 좋다고 생각하는 일이야말로 어리석은 일이고, 그것이 심해지
면 결국은 가치 없는 율법주의자가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겸손한 신앙과 겸손한 사랑의 중
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그런 사랑이 있기를 기원합
니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이 설정하신 율법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
서는 율법보다는 은혜를 더욱 강조합니다. 신약 성도들에게 율법은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까요? 여기에는 3가지의 의견이 있습니다.
첫째는 '율법주의'입니다. 이 주장은 신약 성도들도 율법은 꼭 지켜야 한다는 주장입니
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이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이 많음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습니
다. 어떤 사람은 '중매'는 인위적인 것이라고 생각해서 하나님의 뜻을 기다린다고 하며 계
속 노처녀, 노총각으로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주일날 이사가면 안된다고 하며
물건을 조금 옮기는 것도 잘못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며 어떤 사람은 주일날 물건
을 사는 것을 죄악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주일 성수를 장려한다는 측면에서 주일날 물건
을 사는 것은 되도록 피해야 하겠지만 그것이 주된 신앙적 태도가 되면 신앙의 본질은 흐
려져 버리고 맙니다. 그렇다면 주일날 교회를 가기 위해서 버스 타는 것도 금해야 합니까?
대개 율법주의는 신앙적 교만으로 비롯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면서 조심
해야 할 일은 이러한 율법주의로 흐르려는 경향입니다.
둘째는 '반율법주의'입니다. 이 주장은 신약 성도에게 율법은 폐기되었기 때문에 율법은
지킬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성도들을 오히려 방종으로 이끌 뿐입니다.
야고보서는 초대교회에 있었던 이러한 반율법주의적인 경향에 철퇴를 가한 것이었습니다.
셋째는 '은혜주의'가 있습니다. 이 주장은 은혜를 강조하긴 하지만 율법을 반대하지는 않
는 입장입니다. 즉 신자들에게도 율법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칼빈은 신자를 위해서 율법
을 전폐하려고 하는 것은 율법을 오해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모세의 율법은 죄인들 사이에
서는 죽음만을 만들어 내지만 성도들 사이에서는 더 좋고 훌륭한 이용법이 된다고 역설했
습니다. 그러나 칼빈은 "율법은 이제는 우리를 정죄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폐기되었다"고
덧붙였습니다.
우리는 율법주의로도 반율법주의로도 치우치지 말고 은혜 중심적인 삶의 온전한 의미를
잘 살리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진정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들은 자
기가 잘 지킬 수 있는 한 가지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신앙을 비교하는 어리석음도 버릴 줄
압니다.
예를 들어, 어떤 분은 새벽기도를 잘 하는 것으로 자기 신앙이 남보다 나은 줄 생각합니
다. 그것은 오해입니다. 어떤 분은 주일날 물건 사지 않는 것으로 자기 신앙이 남보다 나은
줄 생각합니다. 그것도 오해입니다. 그런 오해가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 중에 많이 발견됩
니다. 우리가 소중히 여겨야 할 신앙의 덕목은 수천 가지가 넘습니다. 그리고 단순히 비교
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언뜻 생각해도 <주일에 물건을 사지 않는 것>보다 훨씬 소중한 신
앙 덕목들도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원수를 사랑하는 것, 내 성격에 많지 않는 형제
자매들을 이해하는 것, 교회생활에서 겸손한 것> 등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 것들은
다 제쳐놓고 자기가 잘 자키고 있는 <주일에 물건 사지 않는 것> 한 가지 신앙적 형태로
자신의 신앙을 남의 신앙보다 좋다고 생각하는 일이야말로 어리석은 일이고, 그것이 심해지
면 결국은 가치 없는 율법주의자가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겸손한 신앙과 겸손한 사랑의 중
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그런 사랑이 있기를 기원합
니다.
출처 : 모 세(Moses)
글쓴이 : 모 세(Moses)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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