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할렐루야 !
성적인 타락으로 하나님의 질서에서 벗어났던 소돔과 고모라 성에 천사들이 가서 멸망을 예고 했지만 농담으로 여기고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니느웨 성에는 물속에서, 고기 뱃속에서 겨우 살아나 지치고 초라한 모습으로 요나가 회개를 촉구했지만 온 백성이 회개하면서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멸망을 유보시켜 주셨습니다.
저는 말씀을 천사같이 못하고, 바울같이 못 전하지만 두려운 마음으로,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오늘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역사하시는 체험의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즘은 여자들이 큰소리를 치고 멋있게 사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어림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남자들의 목소리는 작아졌고, 어깨는 쳐졌고, 반면에 여자들의 목에는 힘이 들어갔고 어깨는 좀 올라갔습니다. 아마 세월이 더 흐르면 그림 전시회에 "옛날에는 아빠가 더 힘이 있었을 적에"라는 제목으로 전시회가 열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전에는 여자들이 별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1700년대에 살았던 쇼펜하우어라는 사람은 여자에 대해서 "두통스런 물건 가운데 하나가 여자이며 간혹 여자가 음악, 시, 미술 등에 대해 아는체 하는 수가 있는데 이것은 그렇게 함으로 남자의 마음을 끌어 보려는 흉내에 불과하다"고 아주 혹독한 평을 내렸습니다. 예수님보다 350년 정도 더 앞서 살았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여자는 신이 남자를 만들다가 실패한 졸작"이라고 얘기하기 까지 했습니다. 이렇게 우리나라에 100년 전 아니 50년 전만해도 여자들이 남자들과 함께 앉아서 밥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식탁을 따로 차렸습니다.
2000여년 전 쯤 예수님 시대에는 어떠했겠습니까? 여자들을 숫자에 넣지도 않았습니다. 사람을 세는데 여자들은 수에도 끼지 못했습니다. 그런 세대에 12년동안이나 더러운 병을 앓고 있는 여인에 대해서 사람들이 무슨 관심이 있었겠습니까? 일반인들과는 어울릴 수 없는 고질적인 혈루증, 몸에서 피가 흐르는 병을 앓던 여인 그 여인은 절망상태였습니다. 건강을 잃어 버린 여인입니다. 모든 것을 다 잃은 여인이라는 뜻입니다. 많이 배웠어도 건강을 잃으면 무엇에 씁니까? 돈이 많아도 건강을 잃으면 그 돈을 어디에 쓰겠습니까? 권세를 가졌어도 건강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것도 12년 동안이나 앓았습니다. 여인은 병의 절박성과 계속성에 지쳤습니다. 침대는 편안하고 좋은 것이지만 계속해서 누워있어야만 한다면 그것은 저주일 것입니다. 여인은 12년동안이나 계속되는 병 때문에 지쳤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도움에도 지쳤을 것입니다. 당시 의원(의사)들의 수준이 어느 정도일지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26절에 보면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의원들의 수준이 어느정도 이겠습니까? 청진기가 있었겠습니까? 특별한 약품이 있었겠습니까?
오 헨리라는 사람의 소설 가운데 '강도와 신경통'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도둑질을 하러 남의 집에 들어갔습니다. 물건만 훔쳐서 나오려고 했는데 주인한테 들키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총을 겨누고 주인에게 손을 들라고 했습니다. 쏠 생각은 없었습니다. 자신이 위험할까봐 손을 들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이 한 손만 들었습니다. 잘못하다 총을 꺼낼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 손 다들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 사람은 한 손만 드는 것입니다. 왜 한 손만 드는 것이냐고 물었더니 한 손은 신경통이라 들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순간 도둑질하러 왔던 그 도둑은 자리에 앉으라고 그 신경통에는 이런 것이 좋다고 신경통 해결하는 방법을 설명하다가 날이 밝았다고 합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특별히 남이 아프다고 하면 관심이 많아서 나름대로 독특한 치료 방법을 다 알고 있습니다. 제가 무릎이 좀 아프다고 했더니 어떤 분이 주일날 오후에 소주병 같은 것을 들고 오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게 뭐냐고 했더니 뭔지 묻지 마시고 오늘 저녁에 설교하냐고 묻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를 한다고 왜 그러시냐고 했더니 닭발을 소주에 삶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무릎에 굉장히 좋다고 합니다. 얼마나 그분의 마음이 고맙던지, 목사가 무릎이 아프다고 해도 눈하나 깜짝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는데 닭발을 소주에 삶아 가지고 오셨으니 얼마나 고맙습니까? 그분의 생각에는 그것이 직효입니다. 여러분들도 나름대로 처방전을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다리가 저리면 침을 코에 세 번 묻히면 된다는 것 정도는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이 여인이 12년 동안 별의 별 것 안해봤겠습니까? 그 많은 일에 지쳤습니다. 돈의 효과에도 지쳤습니다. 있는 것을 다 허비했다고 했습니다. 돈이면 다 해결되는 지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돈만 있었으면 그 병을 고쳤을 텐데…"라고 탄식합니다. 아니요, 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병을 못고치고 죽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여인은 부끄러운 병에 걸린 자기 자신에게 지쳤습니다. 레위기 15장 25-27절에 보면 본문의 여인 같은 사람은 더러운 여인, 부정한 여인이라고 결론 지어져서 신앙적, 종교적인 예식에도 참석할 수가 없었습니다. 완전히 절망상태입니다. 자기 스스로도 자신에 대해 희망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때 12년의 긴 병에 지친 이 여인의 귀에 기가막힌 소리가 들렸습니다. 유대인 청년 예수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병고침을 받을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예수에 대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 1. 27절에 보면 "예수의 소문을 듣고"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 예수님은 ·회당에서 귀신을 쫓아내시고(막 1:21-28)·문둥병자를 고치시고(막 1:40-45)·중풍병자를 고치시고(막 2:1-12)·손 마른 자를 고치시고(막 3:1-6)·바다를 잔잔케 하신 분(막 4:35-41)이라는 예수님의 행적에 대한 소식을 들었습니다.여인은 그 소식을 들으면서 믿음이 생겼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롬 10:17)라고 했습니다. 오늘도 기둥교회에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여러분들, 믿음으로 가득차시기를 바랍니다. 큰 믿음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여인은 소문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로부터 전해들었던 얘기 그것을 들으면서 믿음이 생겼습니다. 로마서 10장 4절에 보면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라고 했습니다. 전해주는 사람이 있어서 들었습니다.예수의 소식, 복음은 전해 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영육간에 병든자들에게, 영생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여러분들은 나가 예수님의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왜 추수감사절 때에 한영혼이라도 더 전도해서 전도한 영혼을 추수감사제로 드리자고 말합니까? 예수의 소식을 전해야, 누군가에게 말해야 예수의 소식을 모르는 사람이 예수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소문을 들은 여인은
2. 27절에 "예수님 주변에 모인 무리에 섞였습니다."
- 부정한 여인입니다. 사람들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사람들을 만날 수 없는 여인입니다. 몸에 더러운 냄새가 나서 사람들에게 "나는 부정합니다. 부정합니다. 물러서시오"라고 그렇게 말하면서 다니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런 여인이 사람들 틈에 끼어 들어갔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용감해졌습니다. 무리 가운데 섞일려고 끼어 들어갔습니다. 멀리서서 예수님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주변에 모여든 사람들에게 끼어 들어갔습니다.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예배 드리기 위해 찾아 나온 여러분들, 여러 가지 이유로 예배의 자리에 앉아 있지만 예수님과 거리를 두는 사람이 있습니다. 멀리 바라만 봅니다. 예배는 드리지만 예수님께 가까이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믿는 사람의 무리에 끼려 하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봉사하는 일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찬송하는 일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기도하는 일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일에 어울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런저런 그럴 듯한 이유로 무리 가운데 섞이기를 거절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제 신앙생활하는 여러분들, 몸에 병이 있었고 냄새가 나고 더러운 모습으로 있었지만 예수님 주변에 모여든 사람들 틈에 끼려 했던 여인처럼 여러분들도 예수 믿는 사람들 틈에 어울리는 용기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예수님과 가까이 지낼 수가 있고 그래야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자신의 12년된 문제를 해결받을 수 있다고 믿어서 무리 가운데 낀 여인은 단순한 군중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3. 27절에 "그녀는 예수님 곁으로 다가갔습니다."
- 그녀는 무리 속에 들어가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곁에 가까이 가려고 다가갔습니다. 무리 속에 있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앞에 가까이 갔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 주변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주변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 틈에 끼어서 예수님께 가까이 가려고 "비켜 주세요. 길 좀 내주세요. 나 좀 가게."라고 다가갑니다. 여인은 움직입니다. 군중 속에 끼어 있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오늘 여러분들이 예배 드리는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주님께 가까이 가려고, 주님을 만나려고 힘쓰고 애써야 합니다. 힘들수록, 아플수록, 어려울수록, 냄새나고 더러울수록, 주변 사람들이 만류할수록 오히려 더 주님 곁에 가려고 애써야 합니다. 여인은 예수님을 만날 수 없는 자신을 인정했습니다. 자신이 비참한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 대한 예수님을 가깝게 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곁에 다가갔습니다. 정면으로 다가가지도 못했습니다. 뒷면으로 갔습니다. 예수님 뒤로 갔습니다. 감히 예수님 앞으로 갈 생각은 하지도 못했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정말 주님 곁에 가까이 오겠다고 하는, 주님 곁에 다가서겠다는 마음을 가지면 주님을 만나는 시간이 될 줄로 믿습니다.
- 여인은 예수님의 뒤로 와서 가만히 서있지 않았습니다.4. 28절에 "예수님 옷에 손을 대었습니다."
- 그냥 한번 예수님이 어떤 옷을 입으셨는지, 어떤 천으로 만든 옷인지 그것을 알기 위해 그냥 만져 본 것이 아닙니다. 28절에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고 했습니다. "내가 그의 옷에 손만 대도 내 병이 나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병든 사람이다. 냄새나는 사람이라 예수 앞에 있을 수는 없지만 예수 뒤에서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만 대어도 내 몸이 깨끗해 질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우리 성경에는 "손을 대니"라고 했습니다. 영문 성경(NIV)에는 "touched"라고 했습니다. 헬라어 성경에는 "합토"라고 하는 단어를 씁니다. '합토'라는 말은 '그냥 손을 대었다'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seize: 잡다, 쥐다'라는 영어 단어로 번역 하는 것이 옳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 말은 일부러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잡았다는 뜻입니다. 어떤 생각이 있어서, 의식이 있어서, 목적하는 것이 있어서 잡았다는 것입니다. 지나치는 사람이 남의 옷에 슬쩍 스치는 그런 반응이 아닙니다. 그냥 한번 지나가는 손짓으로 만져본 것이 아닙니다. 의도적으로 '내가 이 옷자락에 손만 대어도 나을 수 있을 것이다'라는 그런 믿음으로 만졌습니다. 여인은 소경 바디매오처럼 "다윗의 자손 예수여…"(막 10:46-52)하면서 소리 지를 용기도 없었습니다. 예수님 앞에가서 매달리며 애걸하고 예수님께 날 고쳐달라고 졸라댈 수 있는 용기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옷자락에 믿음을 가지고 손을 대었습니다.오늘 예배의 자리에 나온 여러분들, 주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는 그런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손 대는 믿음이 필요합니다.기적이라고 하는 것은 때로 베풀어 지는 것이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기적을 끌어 내리는 하나님의 은혜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에 믿음으로 손을 댄 여인은 순간 자신의 몸이 깨끗해짐을 깨달았습니다. 혈루의 근원이 다 말랐고, 자기도 '오 나았구나'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그런데 그 순간에 오늘 본문에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이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병든 자를 치료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옷을 잡으므로 자기의 능력이 빠져 나가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을 잡은 여인은 예수님의 몸에 담겨 있는 능력을 끌어냈습니다. 오늘 예배의 자리에 참석한 여러분들은 여러분의 믿음의 손짓으로, 여러분의 믿음의 기도로, 찬양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끌어내어 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가만히 앉아서 하는 대로 순서대로 진행하다가 예배 마치고 돌아가는 그런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의 몸에서 무엇인가 빠져나가게 되니 여인의 몸이 깨끗해졌습니다.남을 도우려면 자기를 소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충성하려면 자기에게서 어떤 것이 빠져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손해 보지 않고 남에게 이익을 줄 수 없습니다. 내게서 무엇인가 빠져나가는 느낌을 받지 않고는 남에게 기쁨을 줄 수 없는 것입니다. 여인이 깨끗함을 받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허전해야 했습니다. 찬양대를 하고 교회학교 교사로 주방에서 봉사하고 복지관에서 가서 봉사하고, 속회 인도를 하고 여러 부서에서 구석구석에서 이름없이 봉사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은 여러분이 봉사하는 것 때문에 손해 보는 것이 있습니까? 봉사하는 것 때문에 무엇인가 빠져 나가는 것 같은 허전함이 있습니까? 그것이 없다면 봉사가 아닙니다. 받을 것 다 받고, 누릴 것 다 누리고, 즐길 것 다 즐기며 손해 보는 것 하나 없이 그냥 그렇게 지나가는 사람이라면 그는 봉사자가 아닙니다. 허전함이 있어야 합니다.한 여인이 치료받기 위해서도 예수님의 몸에서 무엇인가 빠져나갔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봉사하고 희생하며 일하는데 내 삶속에 허전함을 느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전도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영혼을 건지기 위해서 복음을 전한다면 내가 그를 구원하기 위해서 희생하고 애쓰고 허전함을 느껴야 가능한 것입니다.여인은 깨끗해졌습니다. 예수님은 허전함을 느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무리를 향해 물었습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30절), "누가 내 옷을 만졌소. 누구요?" 야단치려고 찾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누군지 알려고 물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연히 지나가다가 만진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스친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요.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소. 믿음으로 내 옷을 만져서 내 능력을 빼앗아간 사람이 누구요. 내 능력을 가져간 사람이 누구요?"라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숨어 살 수밖에 없고, 사람들 틈에 감히 낄 수 없고, 사람들 앞에 나서서 말할 수 없는 여인, 부끄러워 예수님 뒷편에 가서 살그머니 예수님 옷을 잡았던 여인을 예수님은 찾으시는 것입니다. 그냥 내 버려 두면 어때서 찾으십니까?
- 로마서 10장 9-10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했습니다. 스쳐 지나갈 수도 있습니다. 어떤 여자가 내 옷에 손을 대서 병이 깨끗함을 받았구나라고 지나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불러 주셨습니다. "누구요. 내 옷에 손을 댄 사람이 누구입니까?" 군중들을 향해 묻습니다. 인격적인 만남을 원하시는 것입니다.오늘 여러분들이 예배의 자리에 오셨습니까? 신령과 진정으로 기도하며 찬양하는 오늘 여러분들을 부르십니다. "누구요? 내 옷에 손을 댄 사람이 누구요?" 예수님 주변에는 언제나 많은 군중들이 있었습니다. 흥미거리로, 구경꾼으로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사람들도 있었고, 책잡으려고 따라다니는 사람들도 있었고, 남이 가니까 얼떨결에 따라 다니는 사람도 있었고, 배고프니까 빵이라도 얻어 먹으려고 따라다니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미없이, 목적도 없이 그냥 예수님 주변을 맴도는 군중에 불과했습니다. 오늘도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성경, 찬송을 들고 교회에 다녀올 것입니다. 그러나 군중으로 끝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혈루증을 앓는 여인은 옛날 이야기가 아닙니다. 어쩌면 저에 대한 얘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여러분의 얘기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다 지쳤습니다. 삶의 현실에 지쳤습니다. 현실적인 절박감과 계속성에 지쳤습니다. 인간의 도움에도 지쳤습니다. 믿었던 친구, 믿었던 직장, 믿었던 사람, 그런 것에 실망 했고 지쳤습니다. 이제 주님의 옷자락에 손만 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믿음이요, 그것이 해결의 방법입니다. 순간순간 삶의 현장에서 주님 곁에, 주님의 옷자락을 잡아 당기는 삶이 될 때 주님은 우리에게 선언해 주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구나. 평안히 가라. 내가 너를 건져 준 것이 아니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구나. 네가 내 옷에 손을 대는 순간 내 능력이 빠져나갔구나. 평안히 가라." 오늘 평안을 선언받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다른 사람이 깨끗해진 것을 보고 놀라고 감격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는 심정으로 손을 들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들 오늘 예배의 자리에 습관적으로 나오셨습니까? 지난 주에도 나왔고 20년, 30년동안 믿어서 나오셨습니까? 아니, 새로운 마음으로 "주님! 내가 주님의 옷자락에다 손을 대고 싶습니다." 연결되어야 주님의 능력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손을 대면 주님이 우리를 향해 물으십니다. "누구냐? 내 몸에 손을댄 사람이 누구냐?" 우리를 찾으십니다. 여러분들 오늘 예배가 하나님이 찾아주시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예배의 자리에 나오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 주셔야 합니다.
컴퓨터 앞에 앉아서 2시간동안 중요한 문서를 작성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써놓은 것을 친 것이 아니라 아이디어가 생각하는 대로 2시간 동안 작업을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컴퓨터가 꺼졌습니다. 얼마나 당황스러운지 2시간 동안 작업한 것이 자동으로 저장되어 있을지 날라갔을지 별별 걱정을 다 하면서 컴퓨터를 아무리 만져봐도 까딱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식은땀이 나고 2시간 동안 생각났던 것이 다시 생각날지도 걱정이 되고 도저히 제 능력으로는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컴퓨터 전문가를 불렀습니다. 그분이 이것 저것을 막 쳐보더니 '이상하네. 어 이상하네.'라고 중얼거립니다. 그래서 저는 속으로 '나도 못했는데 자기가 잘 할까'싶었습니다. 조금 있더니 그분이 소리를 지릅니다. "목사님 제발 이런 것 때문에 부르지 말아요. 아 바쁜데 이런 것으로 부르지 마세요. 전기가 빠졌잖아요."라는 것입니다. 발 밑에 전기 코드가 있는데 제가 아마 컴퓨터를 하다가 발로 툭 찼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전기가 나간 것입니다. 어떻게 미안하던지요.
전기의 힘을 끌으려 해도 콘센트에 코드가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여인이 군중속에 끼어들어 예수님께 다가가서 예수님의 뒷편에 서있었지만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었던 것처럼 주님과 연결된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를 향해 물으실 것입니다. "누구요?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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