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스크랩]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 요17:9-19

김믿소사 2007. 6. 7. 19:14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 요17: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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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 못지않게 세상과의 관계도 참 중요합니다. 세상과의 관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담는 그릇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릇이 더럽거나 깨지거나 문제가 있으면 그릇에 담긴 음식이 새거나 변질됩니다. 그러나 그릇이 깨끗하고 튼튼하면 음식을 잘 보전하고 때로는 음식 맛을 더욱 풍성하게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세상과의 관계가 잘못되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약화되고 심지어 깨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세상과의 관계가 올바로 맺어지면 하나님과의 관계도 더 깊어집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과 맺는 관계의 모습을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동화입니다.(adaptation to the World)



어떤 사람들은 세상에 너무 가까이 다가갑니다. 그래서 세상에 동화되어버립니다. 세상 사람들이 사는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이 바라는 것 그대로 바라고 그들이 가는 길을 그대로 걷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름만 그리스도인이지 사실상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없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일 뿐입니다.



둘째, 대적입니다.(contention against the World)



어떤 사람들은 세상을 피하여 멀리 떨어지려고 합니다. 심한 경우 등을 지고 담을 쌓습니다. 세상을 적대시 합니다. 철저하게 세상 것을 배척합니다. 그러다 보니 세상에서 해야 할 일도 도외시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사명을 잃어버린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셋째, 변화입니다.(transformation of the World)



어떤 사람들은 세상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렇다고 세상에 동화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을 변화시켜갑니다. 그 사람이 만나는 사람들이 변화됩니다. 그 사람의 발 길이 닿는 곳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런 사람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세상과의 관계는 한 마디로 “불가근(不可近)하고 불가원(不可遠)하라”고 정리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과 너무 가까워지면 세상에 동화되어 그리스도인다움을 잃어버리게 되기 쉽고, 또 너무 멀어지면 세상과 적대적이 되어서 사명을 잃어버리게 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너무 가깝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멀지도 않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동화되지도 않고 그렇다고 적대적이지 않은 가운데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명을 담당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중보기도하신 내용의 말씀입니다. 아버지 품으로 귀환하시면서 세상에 남겨지는 제자들을 위해 중보기도하신 내용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기도 내용 가운데서 세상 속에 살아가야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을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해야 할 일을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1. 현주소를 알아야 합니다.



본문 11절을 보면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주님께서 부활승천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 세상에 두고 가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현주소는 이 세상입니다. 물론 장차 저 천국으로 갈 것입니다만 지금 우리는 이 세상에 있습니다. 이 사실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마 17장을 보면 소위 변화산 사건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 제자를 데리시고 변화산에 오르셨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저들 앞에서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지셨습니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주님과 말씀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이 때 베드로가 너무도 황홀해서 이렇게 주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베드로가 정말 놀라운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지금 듣도 보도 못한 놀라운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은혜의 현장에 계속 머무르고 싶었습니다. 그곳을 떠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곳이 좋사오니...”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청에 대해 주님께서는 아무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놀라운 은혜의 시간이 지난 뒤에 주님은 말없이 저들을 세상으로 데리고 내려오셨습니다. 저들이 살아야 할 땅 갈릴리로 데리고 내려오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아야 할 삶의 현장은 이 세상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도 중에 예배 중에 찬양 중에 저 변화산의 은혜를 베풀어주시지만 그래도 우리가 머무르고 살아가야 할 곳은 갈릴리입니다.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래 전 이야기입니다. 여 집사님 한 분이 은밀하게 상담을 청해왔습니다. 어느 집회에 참석했다가 정말 뜨거운 은혜를 체험했답니다. 방언의 은사도 받았고, 심지어 입신해서 천국도 보고 왔다는 것입니다. 너무 황홀하고 신앙생활이 너무 즐겁고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남편은 아직 예수를 믿지 않았습니다. 저녁 마다 술이 만취한 상태로 들어옵니다. 하는 말마다 사탄이 좋아하는 말만 골라서 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말은 한 마디도 없더랍니다. 같이 밥 먹고 싶지도 않고 한 이불 덮고 잘 생각을 하니 끔찍하더랍니다.



교회에 오면 목사님들이 너무 멋있더랍니다. 은혜를 알고 대화가 통하고 그 말씀이 너무 좋고... 어떤 목사님 한 분이 마음에 자리를 잡게 되었답니다. 이 분과 함께 살면 얼마나 좋을까 간절한 마음이 들더랍니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는 것입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요? 저도 주님께서 하신 그대로 했습니다. 베드로가 이곳에 초막 셋을 짓고 여기에 머무르고자 했을 때 주님께서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습니다. 저도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를 저 갈릴리로 데리고 내려오셨습니다. 저도 빨리 가서 남편을 위해 따뜻한 저녁 밥상을 준비하라고 보냈습니다.



본문 18절을 보면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단순히 세상에 살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세상으로 파송하셨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머물러 살 곳이 없어서 세상에 살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 할 일이 있어서 그곳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사명을 주시고 그 사명을 감당하라고 세상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얼마 전 한 권사님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남편 때문에 정말 긴 세월 마음고생을 많이 하셨답니다. 믿음의 길을 벗어나서 세상에서 죄짓고 살아가는 남편을 지켜보는 것이 정말 큰 고통이었답니다. 그러나 낙심치 않고 기도하고 기다렸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최근에 얼마나 사람이 변했는지 자기도 믿어지지가 않더랍니다. 이제는 더 바랄 것이 없더랍니다. 사업도 건강도 대수롭지 않더랍니다. 그 중심에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마음을 보니 이제 너무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이유는 이 세상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함께 살만한 사람이어서가 아닙니다. 우리로 하여금 그들을 변화시키라고 보내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 안에서 더 큰 보람과 기쁨을 누리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변화산 은혜를 체험하는 일도 행복한 일이겠으나 갈릴리 저 세상에서 세상을 변화시키며 누리는 은혜는 더할 수 없이 행복한 일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2. 보전해야 합니다.



본문 11절을 보면 주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중보기도하신 내용 가운데 첫 번째가 나옵니다. 여기서 핵심은 바로 “보전하사”라는 동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남겨진 제자들을 보전해 달라는 간구입니다.



왜 보전케 해 달라고 기도하셨을까요? 14절을 보면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하여 가만 두지 않고 공격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세상이 왜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할까요? 도대체 그리스도인들 무엇이 미운 것일까요? 그리스도인들에게 빼앗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본문에서 이점을 살펴보면서 우리가 보전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첫째, 하나 됨입니다.



11절을 보면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제자들이 하나 됨을 위해서 기도하신 것입니다.



사탄은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사랑하고 서로 하나를 이루고 사는 것을 미워합니다. 서로 사랑하며 하나를 이루고 살지 못하게 하려고 가진 방법을 다 동원해서 방해하려고 합니다. 우리에게서 이 하나 됨을 빼앗아 가려고 합니다.



우리 주변에 교회가 분열되는 이야기를 흔히 듣습니다. 성도들이 서로 미워하고 갈라서는 이야기를 흔히 듣습니다. 사탄의 전술전략에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하나 됨을 보전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서로 하나 됨을 잃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둘째, 기쁨입니다.



13절을 보면 “저희로 내 기쁨을 저희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주님이 주신 기쁨을 제자들이 그 삶 속에서 충만히 보전하기를 위해서 기도하신 것입니다.



사탄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 때문에 기뻐하는 꼴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 아닌 다른 것으로 기뻐하게 미혹합니다. 돈 때문에 기뻐하게 하고, 향락 때문에 기뻐하게 하고, 세상 성공 때문에 기뻐하게 하고...



어떤 분은 기도 많이 하는 분인데 늘 얼굴이 어둡습니다. 무엇엔가 눌려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어떤 분은 교회 봉사를 그렇게 열심히 하는 분인데 얼굴에 기쁨이 없습니다. 염려와 근심이 가득합니다. 역시 사탄의 전술전략에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주님 주신 기쁨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주님 주신 기쁨을 잘 보전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셋째, 선입니다.



15절을 보면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제자들이 이 세상에 살면서 세상의 악에 빠지지 않기를 기도하신 것입니다.



사탄은 성도들이 주님의 뒤를 따라 의의 길 선한 길을 걷는 꼴을 보지 못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죄를 범하게 하고 악한 길로 나아가게 하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실제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세상 악에 가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깊은 죄의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탄의 전술전략에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와 선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선을 잘 보전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악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 자신과 우리의 삶을 잘 지켜가야 하겠습니다.







3. 거룩해야 합니다.



본문 17절을 보면 주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두 번째 간구를 드리셨습니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제자들이 이 세상에 남겨진 채로 살아가는 동안 거룩하게 해 달라고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여기서 거룩하다는 이 말은 구별된다는 뜻입니다. 구별된다는 말은 세상에 거하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분리되지는 않지만 구별은 된다는 말입니다.



왜 거룩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을까요? 제자들이 세상에 있는 목적 때문입니다. 저들은 살 곳이 없어서 세상에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좋아서도 아닙니다.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세상에 보냄을 받아서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려면 세상 사람들과 같아서는 안됩니다.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가지지 못한 그 무엇인가를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거룩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거룩해 질 수 있을까요? 19절을 보면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다.”라고 말씀했습니다. 한 마디로 진리 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14절을 보면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라고 말씀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심령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거룩하다는 말씀입니다.







요즘은 달라졌습니다만 제가 신학교 다닐 때만해도 선배 목사님들 흉내 내려고 하는 사람들이 참 많았습니다. 특히 영적인 능력이 있다고 알려진 몇 몇 목사님 흉내를 냈습니다. 목소리며 말투며 심지어 스타일까지 닮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멀쩡한 목소리를 쉰 목소리처럼 만든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능력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오는 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거룩하게 합니다. 우리 거룩한 이유가 우리의 외모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행한 일들 때문도 아닙니다. 우리가 이루어 놓은 열매들 때문도 아닙니다. 우리 속에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말씀 때문입니다.



시 1:2-3을 보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우리 안의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열매를 맺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무엇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까요? 우리가 가진 것을 다 나누어 준다고 변화시킬 수 있을까요?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을 다 쏟아 붓는다고 변화시킬 수 있을까요? 심지어 우리가 우리 목숨을 내어 놓는다고 변화시킬 수 있을까요? 절대로 변화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씨앗과 같습니다. 봄에 밭을 갈고 거기 씨앗을 심어야 싹이 나고 열매를 맺는 것처럼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심령 속에 심고 이 세상에 뿌릴 때 싹이 나고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거룩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하고 그 말씀을 전함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세상으로 보냄을 받았습니다. 이 현주소를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우리를 보전해야 합니다. 거룩하여 세상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출처 : 낙송의 집
글쓴이 : 낙송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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