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베드로전서4:1-8절
성경은 마지막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고 종말론적인 말씀이 많습니다.
마지막이라는 것은 끝났다는 것이고 심판의 개념이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이라는 것은 성경 안에서는 오히려 소망적으로 사용을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마지막이 끝나는 것이고 희망이 없는 것이고 심판을 받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마지막을 말씀하시면서 소망을 갖게 하십니다
즉 하나님이 마지막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다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광의 기회를 주신다고 받아들이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기 때문에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이 많고 남은 기회를 잘 활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2절에 보면 "육체의 남은 때"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은 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이라는 2002년 9월8일 하루를 마지막으로 보냅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2002년 9월8일입니다.
오늘은 우리 인생에 다시는 찾아오지 않는 마지막 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오늘 하루 남은 때를 보람있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 하루를 종말론적인 생각으로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종말론을 인식하지 않으면 새로운 시작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늘이 내 생애의 마지막 기회라고 인식하고 뜻있게 살아야 합니다.
어떤 짓궂은 사람은, 인생은 오무(五無)라고 정의했습니다.
“인생은 없는 것이 다섯개 있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어릴 때는 철이 없고, 젊어서는 정신이 없고, 중년이 되면 틈이 없고, 늙어지면 형편없고 결국 죽어 없어지더 라는 것입니다.
인생을 서글프게 말하지만 그렇다고 헛되게 살아서는 안됩니다
남을 미워하다가 귀한 시간들을 다 허비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디즈데일리’의 말에 유의하여 봅시다.
“인생은, 너무나 짧기 때문에 비굴하게 살 수 없다”
우리의 여생이 그렇게 많이 남지는 않았습니다.
곧 석양이 지듯이 나를 부르는 주님의 손짓이 머지 않았음으로 더욱 값지게 살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써 “말세”는 시작되었습니다(막1:15).
예수님은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보여 주면서 제자들로 하여금 마지막 때가 왔음을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코오스에서 달리다가 끝내라는 명령이 있으면 그 순간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이유가 없습니다.
서울 출발하여 부산으로 가는 기차가 마지막 종착역에 향하여 가지만 어떤 사람들은 중간 찬안에서 대전에서 내립니다.
끝까지 가지 못하고 중도에 내리는 인생도 많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갔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진다”고 하였습니다.(벧전1:24).
새벽에 내린 이슬이 해가 나면 사라지듯이 우리의 인생살이가 잠깐 보이다가 없지는 이슬과 같고 안개와도 같은 존재입니다.
이와같이 우리의 여생이 그렇게 많이 남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오늘 이 시간 혹시 나이가 젊었다고 생각하시는 분들 가운데“우리의 여생은 아직도 많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사람은 태어날 때는 순서가 있지만 죽을 때는 순서가 없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로마 제국의 박해로 여러 가지 시험과 고난을 당하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를 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고난을 극복하고, 어려운 역경과 싸워서 승리하는지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교훈했습니다.
역사의 시작이 있으면 역사의 끝도 있습니다.
세상의 종말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 끝없이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대로 끝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종말을 준비하는 자세, 겸손한 삶의 자세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고, 정신을 차리고 항상 기도하며 신앙으로 무장하고, 서로 사랑하고 대접하는 선한 청지기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지혜롭게 살려면 인생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한 번 살다가 갑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생애를 가리켜 일생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일에는 실수하면 다시 시도해 볼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우리의 일생에는 연습이 없습니다.
인생 삶에는 실수는 허락하지 않습니다.
지혜롭게 사는 사람은
인생에 자신의 여생의 남을 때를 알고 사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모세는 시편 90편에서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 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자신의 남은 여생이 얼마가 남았는가를 아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천년만년 사는 것처럼 착각하고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사는 날은 결코 길지 않습니다. 어찌 보면 사는 날들이 짧습니다.
우리의 생애를 돌아보면 허무하고 짧은 인생이구나 하는 사실들을 실감하게 됩니다.
불신자들은 인생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몰라 두려워하고 방황합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우리는 다같은 나그네 인생이지만 인생에 분명한 갈 길을 알고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모든 인생은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끝에 가서 모든 인생은 천국과 지옥 오직 두 길 밖에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인생은 누구나 예외 없이 두 길 중 어느 한곳을 향하여 지금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나그네’인생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이 남은 여생을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은가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나그네 인생들입니다.
“나그네’라고 하는 말은 고향을 떠나온 사람을 말합니다.
집을 떠나 잠깐 타향에 거주하는 사람을 가리켜‘ 나그네’라고 부릅니다.
그 언제인가는 모두가 다 고향으로 찾아가는 나그네 인생들입니다.
이제 우리의 남은 여생이 얼마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남은 여생이 얼마인지 모른다고 아무렇게나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남은 여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생각하기 전에
지나온 과거는 어떻게 살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과거는 현재의 거울이 되기 때문입니다.
1. 지난 과거는 어떻게 살아왔습니까?
3절에 “지난날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쫓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우리는 과거에 모두 우상 숭배한 자들입니다.
우리가 변화되기 전에는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했고,
명예와 권세와 돈과 자신을 더 사랑했었습니다.
형체가 있는 우상은 숭배하지 않았을 뿐 모두 세상적인 우상을 숭배하고 사랑한 전력이 있는 자들입니다.
육신의 소욕에 사로잡혔습니다.
하나님을 알기 전 우리는 진리의 판단에 의해서 생활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인간 본능의 지배를 받으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삶의 목적이 없었고, 잡혀 죽기 위하여 태어난 이성 없는 짐승과도 같았습니다그리스도인들은 철저하게 자기 육신의 소욕을 억제함으로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방탕했습니다.
우리는 술취함과 방탕함으로 자신의 육신과 영혼을 마비시켜 버리기가 일쑤였습니다.
술취함은 패가 망신, 가정 파탄은 같은 형제들입니다.
술집 주인은 술꾼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주정뱅이를 사위로 삼으려고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1) 7절에 이제 남은 인생 정신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근신한다는 말은 조심한다는 뜻입니다.
정신차린 사람은 근신하고 섰다 할 때 넘어질까 조심해야 합니다.
‘정신을 차린다’라는 말은 ‘깨끗한 마음을 가진다’라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기심이나 욕심으로 가득찬 마음은 깨끗한 마음이 아닙니다.
이기주의자가 될 때 사람들의 마음이 더러워집니다
자기만을 알고 자기 욕심만을 차리는 사람은 더러운 마음의 소유자입니다.
우리는 늘 종말을 준비하는 자세로 겸손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기도해야 합니다.
마음과 생각이 세상과 죄악에 빠진 몽롱한 상태에서 기도하는 것은 안 됩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나태하지 않고, 지혜롭게 분별력을 가지고 기도에 힘을 써야 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를 얻게 되고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벧전5:8절에
[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자를 찾나니 ]
라고 합니다.
마치 동물의 왕국 사자가 먹이를 구하기 위하여 살필 때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먹는데 정신을 팔고 있는 녀석이 타깃인 것처럼 신앙에 잠자는 교인이 마귀의 타깃이 되기 때문에 우리는 늘 깨어서 기도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26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간절히 기도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서 기도하라”(마 26:41)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시험에 빠집니다. 미혹을 당합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은 그것을 이깁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기도를 쉬는 죄를 범치 말고 열심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마음의 평강을 얻게 되고 하나님과 함께하는 임마누엘의 축복을 받게 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너무 바빠서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교만해지고 마귀의 시험과 유혹에 빠집니다.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더 큰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기도로 가정을 지켜야 합니다.
한 가정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산다는 것은 너무 중요합니다.
시편127:1-2은 말세를 사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말세가 될수록 성도들이 해야 할 일은 바로 기도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7절에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는 말씀은
말세를 사는 성도들의 가정에 변질된 사랑으로 가정이 깨어지지 않도록 늘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또 악한 마귀와 죄가 우리들의 가정을 흔들지 못하도록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마지막 때를 맞이하여 악한 세대로부터 가정을 지키려면 기도해야 합니다.
아내들은 왜 남편이 나에게 이렇게 섭섭하게 하느냐? 라고 말하기 전에 남편을 가슴에 품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기적인 마음을 버리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남편들도 아내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다툼, 부부싸움을 버리고 기도해야 합니다.
상대방을 무시하거나 부부싸움을 자주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기도응답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부부싸움은 우리를 영적으로 곤고하게 만듭니다. 빨리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놓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움의 마음을 버리고 기도의 제단에 가족들의 이름을 올려놓고 늘 깨어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어떤 것보다 가장 강력한 능력입니다.
가정을 향해 오는 마귀의 시험을 이기는 길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어떤 자매의 남편은 직장도 변변찮습니다. 거기에다 성격까지 이상합니다.
자매는 결혼한 것이 후회됩니다 깊은 고민에 빠져서 이혼할까 생각하다가
목사님과 상담후 남편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충고를 받았습니다.
이 자매가 그때부터 남편을 위해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자매의 기도를 들은 것 같습니다.
남편의 직장이 생기고 남편이 달라지기 시작하고 가정에 화목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기도는 악한 마귀의 유혹에서 가정을 지키는 가장 강력한 힘입니다.
성도 여러분, 기도를 통해서 늘 하나님과 대화를 통해서 지혜와 능력을 받아 인생을 새롭게 출발하고 발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더욱 사랑해야 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니라”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수직적으로 완전케 하는 것이 기도라면,
수평적으로 완전케 하는 것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방의 허물을 덮어 주고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죄를 용서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허물을 덮어주지 않는 것은 위선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 용서가 있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18장을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하고 묻습니다.
일곱 번만 용서해도 대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어떠한 죄를 지었더라도 무조건 끝까지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만약 기독교에 용서가 없다면 진정한 기독교의 정신은 발휘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용서가 없다면 그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독일의 소설가 헤르만 헤세는
“사랑하는 것은 사랑 받는 것보다 더 아름답고 행복하다”라고 말했습니다.
누군가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보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 더 행복하고 아름답습니다.
만약 ‘나는 사랑할 대상이 없습니다’라고 하는 분이 계시다면 그 분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때, 그 사랑을 통해서 우리는 온전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군가를 사랑할 때는 건강하지만 사랑을 잃어버리면 그 사람은 병이 듭니다.
산다는 것은 사랑하는 순간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입니다.
그러므로 뜨겁게 사랑한다는 것은 그만큼 풍성한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기적인 사랑으로 가정이 깨어지고 있습니다.
마지막 때에 가정을 온전히 세우려면 진정한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가족간의 인간관계를 아름답게 세우는 길은 허다한 죄를 덮는 사랑입니다.
오늘 본문 8절을 보면 “무엇보다도 열심히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남편과 아내는 서로 완전한 사람으로 결혼한 것이 아닙니다.
다 모자라는 사람입니다. 서로 개방하고 살다보니 어쩌면 상대방의 약점과 허물이 그렇게 많은지 이중인격자 같습니다
신혼 때에는 몰랐는데 남편의 허물이 보이고 아내의 부족함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랑이 식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약점과 허물이 있어도 사랑이 있으면 그 허물과 약점이 안 보이는 것입니다.
사랑은 허물을 가려주는 것입니다.
가정이 아름다운 것은 허물을 가려주는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정은 사랑이 없이는 세우질 수 없는 곳입니다.
사랑이 없는 가정이 얼마나 삭막하겠습니까?
베드로 사도는 말세가 될수록, 가정에 위기가 닥쳐올수록 더 열심히 사랑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기적인 사랑, 자기 중심적인 사랑으로는 가정을 지킬 수 없습니다.
남편의 허물을, 자녀의 잘못을 의지적으로 덮어주는 사랑만이 가정을 이 악한 세대에서 살릴 수 있습니다.
어제는 국민적인 영웅이요 영원히 반가운 손님인 히딩크가 와서 남북 축구를 관전했습니다.
히딩크가 남겨준 것 가운데 멀티 플레이어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멑티플레이란 나만 공을 잘 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옆 사람이 공 차는 것을 도와주어야 되고
수비만 해서는 안 되고 공격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들의 신앙생활도 멀티 크리스천이 되어야 합니다.
서로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혼자서만 예수 잘 믿어서는 안 됩니다.
온가족이 모두 함께 예수잘 믿고 서로 돕고 살아가야 합니다.
몇년 전부터 우리 교육현장에
'한 가지만 잘 해라. 한 가지만 잘하면 팔자를 고치고 먹고 살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로 하여금 영어, 컴퓨터, 운동 그 중에 한 가지만 잘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한가지만 잘한다고 미래가 보장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이 시대에는 이기적으로 나 혼자만 알고 한 가지만 잘해서는 절대로 성공 못합니다.
자녀들이 누구하고도 잘 어울리고 어느 것을 시켜도 잘 할줄 아는 멀티 플레이어로 만들어 합니다.
친구들과 어울려서 바로 놀 줄도 알아야 되고 선후배를 알아보고 또한 부모를 섬길 줄도 알아야 됩니다.
우리 주위에 고난당하고 장애인들도 돌볼 줄 알아야 합니다.
한 쪽만 보며 살면 안 됩니다. 서로 사랑하고 봉사해야 됩니다.
우리가 받은 은사를 따라 하나님의 선한 청지기로 봉사하여 살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무엇이든지 주어진 축복을 탕진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남은 시간들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제 잃어버리면 회복할 수 있는 시간들이 그리 많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시간도 하나님이 허락하여 주신 전세기한이 있는 것입니다.
재산도, 자녀도, 직장도, 사업도 모두 다 내 것이 아니요 주님이 부르시면 결산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불의한 청지기로 주어진 인생을 낭비했다는 책망을 듣지 않도록 하루하루 충성스러운 청지기로 살아가야 합니다.
과자 집을 운영하면서 직접 과자를 굽는 주인이 있었습니다.
그 과자 집에는 과자를 사려고 하는 손님들이 늘 줄을 서서 기다렸습니다.
손의 움직임이 얼마나 매끄러운지 과자 굽는 손길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무슨 마술을 보는 듯했습니다.
얼굴에는 항상 평온함이 가득하고, 온 몸짓은 자신감에 넘쳐 있었습니다.
마음이 우울하던 사람도 그 과자 집에 들르면 금방 마음이 밝아졌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그가 일하고 있다기보다는 아름다운 율동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고 했으며,
‘기름칠한 듯한 탱탱한 삶의 모습이 어디서부터 오는지 궁금하다.’고도 했습니다. 그는 과자를 구우면서 늘
“결코 어제와 같은 과자를 굽지 않으려고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루하루 새 모습으로 살아서, 어제보다 달라진 자신의 모습을 과자에 새겨 넣고 싶다’는 말입니다.
그는 가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오늘은 하나님께 드리고 싶은 과자가 구워졌어요.
손님에게 팔기에는 너무 귀한 과자라서 하나님께 바치고 싶은 과자입니다”
남들이 보기에 별 것도 아닌 것 같은 과자만드는‘작은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하는 삶’의 모습이 아름답고,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최선을 다하지 못하는 변명으로 ‘환경’과 ‘재능’과 ‘부족한 물질’, ‘건강’ 등을 내세웁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우리 삶속에서 하나님에게 드릴 만한 작품이 없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마지막 때가 가까웠음을 아는 성도라면
결코 이러한 이런 저런 핑계로 허송세월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소망을 가지고 성령의 바람에 따라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인도의 시성 타골이
“나는 나이가 점점 많아지므로 내가 젖는 노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이제는 돛을 높이 달고 바람을 의지하노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나의 젊음을 의지하면서 마구 달려왔습니다.
조금 알고 있던 인생의 경험을 자랑하면서 숨가쁘게 달려왔습니다.
그런데 지식도. 젊음에도 경험도 인간의 한계가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돈을 의지하고 살았으나 공허할 뿐입니다. 사람을 의지했으나 실망했을 뿐입니다.
이제 믿음의 돛을 높이 달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성령의 바람따라 살아가는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 마지막 남은 시간들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이제 성령님께서 주시는 능력대로 선한 청지기로 살다가
주님께서 부르시는 날 기쁜 마음으로 주님 앞으로 나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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