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는 마음
일출봉에 해뜨거든
날 불러주오
월출봉에 달뜨거든
날 불러주오
기다려도 기다려도
님 오지 않고
빨래소리 물레소리에
눈물 흘렸네
_장일남 曲 김민부 詩_
“일출봉에 해뜨거든 날 불러주오”
「아내는 꽃행상을 나가고/나는 찬 술을 마신다」
김민부 시인(1941∼72)의 시 「추일」은 이처럼 아름답게 시작된다.그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장일남 작곡의 가곡 「기다리는 마음」이 그의 작시다.「일출봉에 해뜨거든 날 불러주오/월출봉에 달 뜨거든 날 불러주오/기다려도 기다려도 님 오지 않고/빨래소리 물레 소리에 눈물 흘렸네」
작곡가 장일남 선생(1930년)은 황해도 해주 출생입니다. 그는 1950년말 단신 월남하여 처음 1년간을 연평도에서 지나게 됩니다. 맑은 날이면 연평도에서 빤히 보이는 고향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언젠가는 북에 두고온 어머니와 가족들을 찾아 귀향하리라 고대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그 섬에 사는 한 문학청년을 만나게 됩니다. 통하는 게 있어서 두 사람은 급격히 친해지게 되지요.
어느날 그 청년이 옛 우리말로 된 시가 적혀있는 헌 책을 들고 와서 장일남선생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은 제주도 사람들의 애환을 담은 것인데요... 섬사람들에게는 공통적인 것이리라 여기지만, 제주사람들에게도 옛부터 뭍으로 가보고 싶은 욕망은 누구나 갖는 것이었습니다. 제주도 방언에다 옛 글이라 정확한 해석을 할 수는 없었지만 그 원전의 시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제주도의 한 청년이 꿈에 그리던 뭍을 찾아 육지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 곳은 지금의 목포입니다. 청년은 언젠가는 섬으로 돌아가리라 마음먹고 유달산 뒤 월출봉에 올라 제주도를 바라보면서 두고 온 여인을 그리게 됩니다. 한편 고향에 있는 청년의 여인도 간곳 모르는 사람을 기다리며 매일같이 일출봉에 올라 육지를 바라보다 망부석이 되었습니다.
장일남은 바로 그 자리에서 이 시의 내용에 빠져들게 됩니다.
"기다리는 마음"
당시 장일남의 심정과 너무 잘 맞아 떨어진 것이겠죠. 그는 10분만에 그 자리에서 그 시에다 곡을 붙였습니다. 이때가 1951년입니다. 당시, 임시 음악교사로 근무하던 연평도 종합중학교를 그만두고 서울로 향했습니다.
그는 평소에 문화방송과 줄을 대고 있었는데 당시 문화방송 스크립터였던 김민부가 장일남에게 좋은 곡이 있으면 하나 달라고 요청했고 장일남은 그때에 바로 그 "기다리는 마음"을 내놓게 됩니다. 김민부는 동국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한 시인이었습니다. 원전의 시를 그 자리에서 표준말로 번역하게 되고 그 것은 지금의 "기다리는 마음"의 가사가 됩니다. 분단의 아픔을 갖고 있던 우리 국민들의 정서가 "기다림"으로 대변될 수 있었던 당시 상황에서 곡은 첫 전파를 타자마자 전국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 일으키게 됩니다. "비목"과 더불어 장일남을 세상에 가장 크게 알린 곡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김민부(1941년)는 부산출신으로 16세때에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했습니다. 어떤 글을 쓰든지 습작 없이 바로 쓸 만큼 문학에 뛰어나 장일남은 그를 천재시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김민부와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고 장일남이 평생에 잊지 못할 사람중의 하나로 떠올리고 있습니다. 장일남의 오페라 "원효대사"도 김민부가 가사를 썼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31세라는 젊은 나이에 화상으로 세상을 뜹니다. 장일남의 회고에서 그는 세상을 비관하다 자살을 했다고 합니다. 지금도 장일남이 부산엘 가면 김민부의 친구들이 김민부를 본 것 같다며 반겨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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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부는 우리 시단에서 천재의 한사람으로 꼽는 시인이다.고등학교 시절에 동아일보 신춘문예 입선과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을 차지했으며 첫 시집 「항아리」를 출간해 당대 문단을 놀라게 했다.그가 첫시집 후기에 밝히고 있는 자신의 시 이론은 16세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이 쓴 것으로는 잘 믿기지 않는다.월반을 하고도 공동출제 중학입시에서 부산 최고의 점수를 기록했다고 한다.
한때 문화방송에서 근무하다가 시적 자아와 사회적 자아의 극심한 갈등으로 31세의 이른 나이에 자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황혼을 바라보며 분신한 그의 마지막은 그가 보여준 절정의 표현이라고 전해진다.그가 생전에 남긴 거의 모든 시가 발굴돼 「일출봉에 해뜨거든 날 불러주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다(민예당간).그가 쓴 오페라 「원효」의 대본도 수록했다.국민학교 동창생으로 그의 요절을 늘 안타까워하던 조용우 전 국민일보회장,문학평론가 김천혜 교수(부산대),부산고 동문회 등 많은 사람이 오랜 시일에 걸쳐 수소문해 찾아낸 시편들이다.그의 두번째 시집 「나부와 새」는 세상에 단 두 권밖에 남아있지 않은 상태였다고 한다.
그의 시는 짧고 이미지가 강렬하다.생활 속에서 우러나오는 피곤한 정신의 오뇌를 때로는 퇴폐적인 자학의 언어로,때로는 탐미적인 세계관으로 드러낸다.바다를 「여자대학교의 기숙사 같은 거」라거나 「찻잔 속에 남은 죽음을 핥고 있다」와 같이 독특한 비유들이 눈길을 끈다.
서울아카데미심포니 오케스트라 음악감독인 장일남씨는 그를 이렇게 회상한다.『돌아가신 이은상 선생은 김민부의 뛰어난 시재에 감탄해 자신에게 작사를 부탁하는 사람이 있으면 김민부에게 가라고 말씀하시곤 했다.이틀만에 15개의 작시를 부탁한 적도 있었는데 그의 작시는 적재적소에 맞는 천재적인 것이었다』
대학시절 그의 친구였던 이근배 시인은 『민부는 너무 일찍 신의 근처에서 어슬렁거렸다는 느낌을 뿌리칠 수 없다.그의 시는 세월이 흐를수록 명문이라는 인상을 준다』고 말했다.그를 아끼는 문단과 출판계 인사들은 내년에 제주도 성산 일출봉에 김민부문학비를 세운다는 계획으로 시비 건립 추진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죽은시인들의 사회’…요절 시인 9인 불꽃 삶 발자취-
김민부 임홍재 송유하 김용직 김만옥 이경록 박석수 원희석 그리고 기형도…. 천상의 시인공화국에서 모닥불 가에 옹기종기 모여 지상을 내려다보고 있을 것만 같은 아홉 명 요절시인들이 시인 우대식(41)씨가 펴낸 ‘죽은 시인들의 사회’(새움)를 통해 깨어났다. 지난해 봄부터 요절시인들의 고향이나 그들이 거쳐간 장소들을 직접 찾아가 사진을 찍고 유족을 만난 우씨는 시인들이 살았던 삶의 현장으로 독자들을 안내한다.
“일출봉에 해 뜨거든 날 불러주오/월출봉에 달 뜨거든 날 불러주오/기다려도 기다려도 님 오지 않고/빨래 소리 물레 소리에 눈물 흘렸네” 우리 정서의 명치끝을 후벼파는 ‘기다리는 마음’을 작시한 김민부(1941∼1972)와 초등학교 동창인 조용우 전 국민일보 사장은 그의 생가를 “장다리꽃이 피어있고 말들이 여러 필 있었다”고 기억하고 있거니와 “부산중학교 2학년때 우리 집에 놀러와 서가에 꽂혀 있던 이백의 시집 원전을 줄줄 읽더라”고 증언하고 있다.
부산고 1학년 때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조 ‘석류’가 당선되면서 김민부의 천재성은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이후 2학년때 ‘항아리’라는 제목의 시집을 펴내기도 했던 그는 고교 졸업을 앞둔 1958년 1월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 ‘균열(龜裂)’이 당선되었고 서라벌예대와 동국대를 졸업하고 부산 MBC에 PD로 입사,지금도 인기리에 방송되고 있는 ‘자갈치 아지매’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기획연출하기에 이른다. 1970년 김자경 오페라단에 의해 공연된 ‘원효대사’ 대본을 쓰기도 했던 김민부는 1972년 10월 말,서울 갈현동 자택에서 화마로 목숨을 잃는다. 그러나 불길에 휩싸인 그를 끌어내던 부인도 큰 화상을 입어 3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고통받고 있으며 2004년엔 시인의 부모님도 또다시 화재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은 우리로 하여금 존재의 비감에 젖어들게 한다.
대전 보문고 재학중에 동국대 주최 전국고교백일장에서 장원을 한 송유하(1944∼1982) 시인. 시제는 ‘주발’이었다. “나의 주발에는 하늘을 담자.…나의 주발에는 기린같은 목을 늘이고 서서 산을 바라보는,산을 바라보며 언제나 착한 아들이 되나 착한 아들이 되나 하고 염려하는 눈빛을 담자” 어머니의 눈빛을 주발에 담고자 했던 그는 저녁마다 등잔 아래에서 손가락이 굽도록 떡을 굽고 날만 새면 시장으로 나가 어린것들을 길러주시는 어머니의 아들이었다. 심사위원장인 미당 서정주는 “촌에서 올라온 천재시인으로 이렇게 훌륭한 학생을 뽑기는 처음”이라는 요지의 심사평을 했다.
문예 특기생으로 선발되었지만 국문과 대신 종교학과를 수학한 그는 1970년 ‘월간문학’ 1회 신인상에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으나 첫 시집도 묶지 못하고 1982년 김포의 외딴 논두렁에서 의문의 주검으로 발견된다. “방학이 되어 오빠가 내려오면 어머니는 새벽 일찍 정종을 데워 한 잔 마시게 하고 친척들에게 함께 다니셨어요.” 오빠의 뒤를 이어 시를 쓰고 있는 동생 송영숙 시인의 증언은 애절하기 그지없다. 그나마 동생이 서둘러서 오빠의 첫 시집이자 유고시집 ‘꽃의 민주주의’를 발간한 것은 사후 10년이 흐른 1993년이었다.
미군과 양색시로 상징되는 경기도 송탄 쑥고개의 수난사를 시로 옮긴 박석수(1949∼1996) 시인 역시 고교 시절,수원 화홍문화제 백일장을 통해 일찌감치 문재(文才)를 세상에 알렸다. 그러나 1000부를 찍었던 첫 시집 ‘술래의 노래’가 팔리지 않자 방에 쌓아둔 960권을 모두 불태우며 다시는 시를 쓰지 않겠다고 다짐하던 그는 소설가로 변신,‘우렁이와 거머리’를 위시한 소설을 발표하고 평단의 주목을 받던 중 47세에 뇌졸중으로 타계한다.
저자의 발걸음은 경기도 금촌 월롱산 자락의 폐가를 뜯어고친 뒤 “월롱산 아래 달이 뜨면 달이 여덟 개가 된다”며 ‘월월붕붕(月月朋朋)’으로 명명한 원희석(1956∼1998),서울 변두리 기찻길 옆 판자집에서 가난에 허덕이며 시를 썼던 김용직(1945∼1975),심야극장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 기형도(1960∼1989)에게로 이어진다. 우씨는 “죽은 시인과 죽지 않은 시를 동시에 만나는 순간의 벅찬 ‘어처구니’가 더더욱 이 작업 안으로 몰아붙였다”며 “아홉 명의 시인들을 모두 만난 후의 감정이란,잊고 지낸 온기와 이름 없는 악기 하나를 선물로 받는 기분”이라며 긴 여정뒤의 소감을 털어놨다.
-정철훈 전문기자/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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