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목사님!
만인 제사장이라 함은 무슨 뜻인가요?
요한계시록에서 말하고 있는있는 1:1종들은 각 개교인인지 아니면 목사님이라고 일컽는 주의 종들인지,주의 종을 통하지 않고는 계시가 열려지지 않는다는 말씀을 본적이 있는 것 같은데, 목사님과 성도로서의 올바른관계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요?
질문이 너무 많은가요? 너무 막연하게 신앙생활을 한 것 같아 아직도 혼동의 삶을 살면서도 용기있게 알아 볼 수 없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성도의 위치는 무었인가요? 글로 답해 주시면 자세히 읽고 또 듣을 수 있다면 더욱 효과적으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들을 땐 이해가 되다가도 뒤돌아서면 잊어버리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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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님 반갑습니다.
늘 관심을 갖고 본 카페에 들려 주심에 아울러 감사를 드립니다
소모임에 글을 올리셨으니
소모임 난에서 간단 명료하게 답해 드리겠습니다.
단 제가 알고 있는 범주 안에서라는 단서를 달고 싶습니다.
저도 쉼 없이 배워 나가야 하는 학생의 신분이니까요. ㅎㅎㅎㅎㅎ...
1.우선 만인 제사장에 관한 내용입니다.
본래 이 주제는 로마 카톨릭의 사제주의의 성경적 왜곡을 바로잡기 위한 개혁주의자들의 재해석에 기초한 교리입니다. 당시 저들은 성경을 사제들을 위시한 소위 소수의 성직자들의 독점물로 삼아서 평신도를 우매화 시킴으로 신앙을 개인적인 치부와 권세 남용의 수단으로 삼는 일에 급급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자신들의 신분을 하나님과 평신도들을 중보하는 구약의 제사장적 직분에 일치시켰던 것입니다.다시 말해 평신도들은 오직 사제들의 중보적 사역을 통해서만 여전히 속죄를 위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교황을 일컬어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여기고 있는 실정이 이런 역사적 배경에 기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개혁주의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 안에서 우리의 죄는 영원히 도말되었고 구약의 제사장 신분과 직임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실체화 되었기에 신약 시대에 이르러 속죄 사역을 위한 더 이상의 중보적 신분과 직임은 존재할 수 없다고 선언함으로 카토릭의 사제주의적 허구를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아가 이제는 죄로 인한 하나님과의 막힌 담이 우리의 대제사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구속 안에서 완전히 제거되었기에 담대히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새롭고 산 길이 열려진 것입니다.
이런 사실에 근거해 신약의 성도들은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의지해 누구나가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모든 일에 직접적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만인 제사장이란 (1)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 안에서 믿음으로 모든 죄가 이미 용서를 받았으며, (2)따라서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의지해 하나님께 직접적으로 나아가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히4:14-16), (3)십자가의 도의 복음을 맡은 자들로서 전도자적 사명을 감당하는 것을 통해 성도들 개개인이 불신자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복음의 제사장적 직임을 담당하는 자들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벧전2:9). (4)이런 이유로 성도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과 관련해서 예수 그리스도 외에 더 이상의 인간적 중보자는 있을 수 없습니다. 흔히 목회자들을 이 시대의 제사장으로 오해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구속사적 계시 진행의 점진성에 대한 무지의 소치일 뿐입니다.
2.요1:1의 종들에 대한 내용입니다.
요1:1은 계시의 전달 경로를 밝히고 있는 부분입니다. 다시 말해 계시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요한 계시록에 기록된 묵시적 계시의 내용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먼저 주셨으며, 예수님께서는 이를 천사들을 통해서 자신의 종인 요한에게 전하게 하셨고, 예수 그리스도의 종인 사도 요한은 이를 그 분(예수님)의 종들 곧 요한 계시록의 수신자들에게 전하게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따라서 감동님이 질문하신 1절에서의 '종들'이란 곧 요한 계시록을 읽게 될 1세기 교회 성도들과 나아가 모든 시대에 걸친 전 교회원들을 포함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자칫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듯이 이 시대의 목회자들에게만 제한 적으로 말씀을 주셨다고 하면 이 또한 중세 로마 카톨릭 교회의 사제주의적 발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계시의 보편성과 은사적 직임을 혼돈해서는 안 될 줄 압니다.
3.목회자들과 성도들과의 관계성의 문제입니다.
우선 목회자나 성도들을 이원화 시켜 생각하려고 하는 발상 자체부터가 왜곡된 선입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을 일컬어 성경은 이를 '성도'라고 부릅니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된 신분의 소유자들로 구별해서 세상 가운데서 불러 내셨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물론 이들이 또 다른 의미에서 교회원들입니다. 따라서 성도라는 이름 속에는 소위 성직자로서 목회자와 평신도의 구분이 따로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개신교회 속에서 목회자를 성직자로 일반 성도를 평신도라는 개념으로 여전히 이원화 시켜 인식하고 있다면 이는 카톨릭적 발상으로서 종교개혁 정신과 성경적 원리에 역행하는 왜곡된 관점입니다.
다만 성경은 교회정치와 관련해서 교회 속에 몇몇 직임을 주셨습니다. 아울러 다양한 은사를 주셨습니다. 이는 순전히 교회를 교회 되게 하기 위한 방편으로 주신 것입니다. 주님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한 데까지 온전히 자라가게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엡4:11-13). 우리는 이런 사실을 교회를 '주님의 몸'으로 비유하는 데서 그 본의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말씀의 은사자로 세움을 입은 목회자(목사)를 보다 '존경'할 것에 대해 성경은 각별한 주의를 촉구하고 있습니다(딤전 5:17). 그것은 목사인 사람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의 수종자로서 목사의 직임의 중요성을 상대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참된 교회의 진위성의 여부는 계시에 대한 진리성과 진정성에서 그 실질이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어느 한 교회가 제아무리 기독교적인 외양으로 화려하게 치장되었다 할지라도 실질에서 성경의 계시성에 깊이 접촉돼 있지 못함으로 사실상 자의적 숭배신앙을 지향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면, 이는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교회 곧 사망선고를 받은 교회로 판정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계3:1).
교회는 다양한 표상으로 설명됩니다. 이중 교회를 '진리의 기둥과 터'로서의 교회로 설명하고 있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딤전3:15). 이는 교회가 진리를 자양분으로 삼아서 교회답게 성장하고 성숙해 진다는 사실을 가리킴에 다름 아닙니다. 교회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움을 입었다라는 표현이 이를 뒷받침 해 줍니다(엡2:20). 이는 교회의 생명력은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는 진리성의 추구에 의해 좌우된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성령사역의 정체성은 진리의 영이신 사실로 인해 예수님의 가르침을 구체화시키고 실제화시키는 데서 가장 극명하게 확인되기 때문입니다(요14:26,16:13).
따라서 목회자와 교인과의 관계는 계급이나 서열의 관계가 아닙니다. 주종의 관계는 더더욱 아닙니다. 상호 보완적이고 의존적인 유기체적 관계입니다. 이는 다양한 은사를 통해 보다 온전하고 성숙한 교회로 자라가야 할 책임과 의무가 교회원 모두에게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몸의 비유와 원리를 통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런 본질적인 원리와 원칙이 실제화 되기 위해서는 한 교회의 목회자와 교인 모두가 먼저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한 바른 교회관에 깊이 접촉되는 것이 우선돼야 할 줄 압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르고 성숙한 교회의 모습을 에베소서에서는 이렇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엡4:13입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본절에서 중요한 전제는 한 교회 구성원 대다수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 되는 일에와, 이들이 철저히 계시 의존적인 신본주의 신앙관에 깊이 접촉돼 가는 일을 생명의 도리로 붙들고 살아가는 실질이 풍성히 나타나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일이야 말로 바른 성도, 바른 신앙, 바른 교회, 바른 성장과 성숙을 이루는 첩경이 된다는 지적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이 실제화 되기 위해서는 먼저 목회자의 의식이 바꿔져야 할 것입니다. 한 교회의 영적이고 지적인 수준의 정도는 결코(?) 그 교회를 담임 하고 있는 목회자의 수준을 넘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이상 주신 질문에 간략히 답해봤습니다. 온전한 것이 될 수 없기에 더 연구해 보시기를 당부드립니다.
감동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만인 제사장이라 함은 무슨 뜻인가요?
요한계시록에서 말하고 있는있는 1:1종들은 각 개교인인지 아니면 목사님이라고 일컽는 주의 종들인지,주의 종을 통하지 않고는 계시가 열려지지 않는다는 말씀을 본적이 있는 것 같은데, 목사님과 성도로서의 올바른관계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요?
질문이 너무 많은가요? 너무 막연하게 신앙생활을 한 것 같아 아직도 혼동의 삶을 살면서도 용기있게 알아 볼 수 없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성도의 위치는 무었인가요? 글로 답해 주시면 자세히 읽고 또 듣을 수 있다면 더욱 효과적으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들을 땐 이해가 되다가도 뒤돌아서면 잊어버리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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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님 반갑습니다.
늘 관심을 갖고 본 카페에 들려 주심에 아울러 감사를 드립니다
소모임에 글을 올리셨으니
소모임 난에서 간단 명료하게 답해 드리겠습니다.
단 제가 알고 있는 범주 안에서라는 단서를 달고 싶습니다.
저도 쉼 없이 배워 나가야 하는 학생의 신분이니까요. ㅎㅎㅎㅎㅎ...
1.우선 만인 제사장에 관한 내용입니다.
본래 이 주제는 로마 카톨릭의 사제주의의 성경적 왜곡을 바로잡기 위한 개혁주의자들의 재해석에 기초한 교리입니다. 당시 저들은 성경을 사제들을 위시한 소위 소수의 성직자들의 독점물로 삼아서 평신도를 우매화 시킴으로 신앙을 개인적인 치부와 권세 남용의 수단으로 삼는 일에 급급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자신들의 신분을 하나님과 평신도들을 중보하는 구약의 제사장적 직분에 일치시켰던 것입니다.다시 말해 평신도들은 오직 사제들의 중보적 사역을 통해서만 여전히 속죄를 위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교황을 일컬어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여기고 있는 실정이 이런 역사적 배경에 기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개혁주의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 안에서 우리의 죄는 영원히 도말되었고 구약의 제사장 신분과 직임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실체화 되었기에 신약 시대에 이르러 속죄 사역을 위한 더 이상의 중보적 신분과 직임은 존재할 수 없다고 선언함으로 카토릭의 사제주의적 허구를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아가 이제는 죄로 인한 하나님과의 막힌 담이 우리의 대제사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구속 안에서 완전히 제거되었기에 담대히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새롭고 산 길이 열려진 것입니다.
이런 사실에 근거해 신약의 성도들은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의지해 누구나가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모든 일에 직접적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만인 제사장이란 (1)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 안에서 믿음으로 모든 죄가 이미 용서를 받았으며, (2)따라서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의지해 하나님께 직접적으로 나아가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히4:14-16), (3)십자가의 도의 복음을 맡은 자들로서 전도자적 사명을 감당하는 것을 통해 성도들 개개인이 불신자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복음의 제사장적 직임을 담당하는 자들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벧전2:9). (4)이런 이유로 성도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과 관련해서 예수 그리스도 외에 더 이상의 인간적 중보자는 있을 수 없습니다. 흔히 목회자들을 이 시대의 제사장으로 오해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구속사적 계시 진행의 점진성에 대한 무지의 소치일 뿐입니다.
2.요1:1의 종들에 대한 내용입니다.
요1:1은 계시의 전달 경로를 밝히고 있는 부분입니다. 다시 말해 계시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요한 계시록에 기록된 묵시적 계시의 내용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먼저 주셨으며, 예수님께서는 이를 천사들을 통해서 자신의 종인 요한에게 전하게 하셨고, 예수 그리스도의 종인 사도 요한은 이를 그 분(예수님)의 종들 곧 요한 계시록의 수신자들에게 전하게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따라서 감동님이 질문하신 1절에서의 '종들'이란 곧 요한 계시록을 읽게 될 1세기 교회 성도들과 나아가 모든 시대에 걸친 전 교회원들을 포함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자칫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듯이 이 시대의 목회자들에게만 제한 적으로 말씀을 주셨다고 하면 이 또한 중세 로마 카톨릭 교회의 사제주의적 발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계시의 보편성과 은사적 직임을 혼돈해서는 안 될 줄 압니다.
3.목회자들과 성도들과의 관계성의 문제입니다.
우선 목회자나 성도들을 이원화 시켜 생각하려고 하는 발상 자체부터가 왜곡된 선입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을 일컬어 성경은 이를 '성도'라고 부릅니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된 신분의 소유자들로 구별해서 세상 가운데서 불러 내셨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물론 이들이 또 다른 의미에서 교회원들입니다. 따라서 성도라는 이름 속에는 소위 성직자로서 목회자와 평신도의 구분이 따로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개신교회 속에서 목회자를 성직자로 일반 성도를 평신도라는 개념으로 여전히 이원화 시켜 인식하고 있다면 이는 카톨릭적 발상으로서 종교개혁 정신과 성경적 원리에 역행하는 왜곡된 관점입니다.
다만 성경은 교회정치와 관련해서 교회 속에 몇몇 직임을 주셨습니다. 아울러 다양한 은사를 주셨습니다. 이는 순전히 교회를 교회 되게 하기 위한 방편으로 주신 것입니다. 주님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한 데까지 온전히 자라가게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엡4:11-13). 우리는 이런 사실을 교회를 '주님의 몸'으로 비유하는 데서 그 본의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말씀의 은사자로 세움을 입은 목회자(목사)를 보다 '존경'할 것에 대해 성경은 각별한 주의를 촉구하고 있습니다(딤전 5:17). 그것은 목사인 사람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의 수종자로서 목사의 직임의 중요성을 상대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참된 교회의 진위성의 여부는 계시에 대한 진리성과 진정성에서 그 실질이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어느 한 교회가 제아무리 기독교적인 외양으로 화려하게 치장되었다 할지라도 실질에서 성경의 계시성에 깊이 접촉돼 있지 못함으로 사실상 자의적 숭배신앙을 지향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면, 이는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교회 곧 사망선고를 받은 교회로 판정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계3:1).
교회는 다양한 표상으로 설명됩니다. 이중 교회를 '진리의 기둥과 터'로서의 교회로 설명하고 있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딤전3:15). 이는 교회가 진리를 자양분으로 삼아서 교회답게 성장하고 성숙해 진다는 사실을 가리킴에 다름 아닙니다. 교회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움을 입었다라는 표현이 이를 뒷받침 해 줍니다(엡2:20). 이는 교회의 생명력은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는 진리성의 추구에 의해 좌우된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성령사역의 정체성은 진리의 영이신 사실로 인해 예수님의 가르침을 구체화시키고 실제화시키는 데서 가장 극명하게 확인되기 때문입니다(요14:26,16:13).
따라서 목회자와 교인과의 관계는 계급이나 서열의 관계가 아닙니다. 주종의 관계는 더더욱 아닙니다. 상호 보완적이고 의존적인 유기체적 관계입니다. 이는 다양한 은사를 통해 보다 온전하고 성숙한 교회로 자라가야 할 책임과 의무가 교회원 모두에게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몸의 비유와 원리를 통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런 본질적인 원리와 원칙이 실제화 되기 위해서는 한 교회의 목회자와 교인 모두가 먼저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한 바른 교회관에 깊이 접촉되는 것이 우선돼야 할 줄 압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르고 성숙한 교회의 모습을 에베소서에서는 이렇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엡4:13입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본절에서 중요한 전제는 한 교회 구성원 대다수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 되는 일에와, 이들이 철저히 계시 의존적인 신본주의 신앙관에 깊이 접촉돼 가는 일을 생명의 도리로 붙들고 살아가는 실질이 풍성히 나타나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일이야 말로 바른 성도, 바른 신앙, 바른 교회, 바른 성장과 성숙을 이루는 첩경이 된다는 지적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이 실제화 되기 위해서는 먼저 목회자의 의식이 바꿔져야 할 것입니다. 한 교회의 영적이고 지적인 수준의 정도는 결코(?) 그 교회를 담임 하고 있는 목회자의 수준을 넘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이상 주신 질문에 간략히 답해봤습니다. 온전한 것이 될 수 없기에 더 연구해 보시기를 당부드립니다.
감동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출처 :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
글쓴이 : 포커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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