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

[스크랩] 예배에서 전통과 변화의 조화는 가능한가?

김믿소사 2008. 4. 11. 10:56

 

 

Liturgical Vision for the Korean-American Churches    by  Paul J. Huh
21세기 이민교회의 비전 세미나 (나성 영락교회)
 
"예배에서 전통과 변화의 조화는 가능한가?"   허정갑목사

"이민교회의 예배는 어떻게 달라져야 할 것인가? 전통과 변화의 조화는 가능한가? '예배와음악'의 관점에서 21세기 이민교회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한다." 
 
예배는 긴장의 연속이다
"교회는 언제나 예배에 있어서 형식과 자유 사이에서 어떤 긴장을 경험한다."
         (미국장로교 예배모범 W-3.1002) 

그 긴장은 성경에서부터 시작된다.  성경은 아시아계 유대문화와 유럽계 희랍문화의 복합적 유산이다.  언어도 두 가지 언어로 쓰여지며 신약시대에 와서도 100%희랍어가 아닌 아람어들이 간간이 섞임을 볼 수 있다.  주여 오시옵소서의 "마라나타"(고전16:22)는 우리가 가진 그리스도인들의 기도에 관한 기록 중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신약학자 Ralph Martin은 주장한다. (초대교회예배, 49쪽) 아마도 '마라나타'는 희랍문화권 고린도교회에게는 생소한 단어이었을 것이다.  그외 '아멘' 그리고 '아바' 같은 아람언어들은 더이상 단순한 언어가 아니라 경건의 상징적인 언어로 바뀌어 사용됨을 볼 수 있다. 
상징적인 언어들은 예배를 다음과 같이 긴장 있는 행동으로 표현함을 구약에서 찾을 수 있다.
 "금식하고 잔치하고
 기뻐하고 통곡하고
 행진하고 쉬고
 춤추고 손뼉치고
 정화하고 헌신하고
 할례하고 기름 붓고
 번제와 속죄제를 드리고 
 공의를 행하고 자비를 베풀고
 노래와 음악으로 주를 찬양한다."  (미국장로교 예배모범 W-1.2003)
히브리민족의 전통예배는 서로 화답함에 있다.  사제와 회중, 성가대와 회중, 독창자와 성가대/회중, 아니면 둘로 나뉜 회중이 서로 화답하는 기도와 찬양이 중심이 된다.  (출15:21, 민10:35, 1삼18:7, 느12:24,31)  이렇게 둘로 나뉜 회중들이 합하여 이루는 기도와 찬양의 소리는 예배의 절정을 이룬다.
신약에서도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마18:19)  여기에서 두 사람을 우리는 두 가지 문화, 두 가지 언어, 생각을 서로 달리하는 두 그룹으로 볼 수 있다.  전통과 변화는 두 가지 갈림길이 아닌 서로를 필요로 하고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만 하는 긴장과 갈등의 관계 속에 존재한다.  전통과 변화의 조화는 화해에 있다.
이민교회 예배의 새로운 모델은 화해(Reconciliation)에 있다.
 
우리는 현재 1세와 2세의 나누어진 두 언어와 두 문화 속에서 한 지붕밑에 두 교회를 만들어가고 있다.  전통과 변화의 두 갈림길에 앞서 먼저 해결하여야 할 숙제는 1세와 2세간의 수평적 화해이다.  또한 이루어야할 화해의 대상은 얼마든지 있다:  남과북의 민족갈등 ,성의 차별, 한흑관계, 다민족간의 편견과 갈등, 지역감정, 교단분리, 그리고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 .  .  .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구하여야 하는데 지금 현재 하나님께 각자 따로 부르짖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예배는 복합적이고 다양한 요소 속에서 진행된다.  Paul Ricoeur의 저서 Hermeneutics of Symbols은 Hegel이 주장한 Thesis대 Anti-Thesis의 서로 싸우는 관계성을 부인하고 상대적으로 서로를 필요로 하는 조화와 긴장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Hegel은 둘의 상대성에서 어느 쪽도 아닌 새롭고 더 좋은 Synthesis가 형성된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공산주의의 바탕이기도 하다.  Hegel의 주장에 반대되는 의견이 바로 Ricoeur의 주장이다.  그러나 이들의 보는 관점같이 예배의 다양성은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은 것 같다.
우리는 이민2세교회의 방향을 제일 걱정하고 있다.  그 중에서 그들의 예배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어느 언어가 사용되며 어떠한 찬송, 그리고 기도가 드려질것인가?  그 이유는 지금 2세의 모습에서 그들만의 주체성과 정체성이 없는 혼돈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 성공적으로 모인다는 필라델피아의 2세교회를 방문하였었다.  캠퍼스에 가까이 위치하여서인지 많은이들이 (대부분 대학생들임) 예배 시작과 끝부분에 쉽게 들어오고 나가는 모습을 보았다.  무엇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이미 다 알고 있으니 나에게 도움이 되는 시간만 골라서 듣겠다는 모습이었다.  어떠한 순서에서 무슨일이 있는지 이미 예측할 수 있는 시간만큼 지루하고 따분한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예배는 그렇게 간단히 예상할 수 있는 요소는 아니다.  바로 이같은 행위는 하나님을 상자안에 가두어 놓고 신의 전부를 소유하고 있다고 믿는 착각과도 같은 것이다.
 
미래는 창조적인 예배 즉 창의력과 풍부한 상상력을 동원하는 예배를 요구한다.
두 가지 반대되는 양극성을 하나로 볼 줄 알고 끊임없이 하나로 만들어 나가는 작업 - 화해, 평화, 용서와 구원의 메시지가 전통과 변화의 조화가운데서 힘있게 전하여 지기를 바라본다. 
                                                          
예배에 대한 개인적 판단을 피하자
기독교예배의 2000년 역사는 입에서 입으로 그리고 문화와 전통 속에서 우리에게 내려오고 있다.  예배의 역사적 배경을 말할 때에 안타깝게도 기독교 교회역사는 예배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관계로 나뉘고 또 나뉘었던 모습을 보게 된다.  개혁신앙의 선두주자 루터는 예배관습중 성찬과 언어를 평신도들의 언어와 예배참여로 바꾸고자 구교와 대립되었고 재세례파는 유아세례문제로 개혁신앙과 나뉘어졌으며 영국성공회는 국왕의 결혼문제로 구교와 갈라섰으며, 감리교는 웨슬리의 안수문제로 영국성공회와 나뉘었고, 청교도는 기도서문제로 영국성공회를 떠나 미국에 정착하였다.  또한 희랍정교회와 서방교회와의 나뉨은 Icon문제 이였으며 더 올라가서 안디옥의 바울과 예루살렘교회의 갈등은 할례와 제사음식문제가 중요한 이슈였음을 보게 된다.  개혁자중 가장 가까울 수 있었다고 생각되었던 루터와 쯔빙글리도 Marburg Colloquy (1529)의 15개 조항 합의서중 마지막 한 개 조항인 성찬 문제로 대립이 되어 지금까지 풀지 못하던 갈등이 1997년 6월 미국장로교총회에서 마틴 루터의 후예인 루터교와 존 칼빈의 후예인 장로교간의 성찬참여 합의서로 인하여 새로운 면모를 모색하고 있다.
예배를 놓고 올바른 예배이다, 잘못된 예배이다라고 판단하기는 어렵다.  어느 한 전통 속에서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역사가 예배의 모습으로 표현되어졌다면 아무리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그 예배전통은 귀하고 아름다운 것이 분명하다.  우리 개인에게는 맞지 않는다 해도 그 예배형식을 통하여 하나님의 살아 계심이 선포되고 있다는 사실 속에서 일단 비평을 삼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예를 들어 무조건 카톨릭의식이라고 거부하는 일은 피하여야 한다.  신학은 서로 자기가 정통이라고 주장하며 우리와 이웃을 여러 교단으로 나누게 하지만 예배는 신학의 이념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서 하나가 된 하나님의 자녀들, 예수그리스도를 주라 부르는 모든 하나님의 공동체는 준비된 예배의 자리에 같이 참여하여야 하는 것이 21세기 이민교회의 사명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내일의 예배는 더욱 다양성 있게 또한 일관성 있게 준비되어야 하며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말씀과 십자가구원 중심의 예배가 되어야 하겠다.  이것이 내일을 향하여 예배의 삶을 창조해 나가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기도 하다. 
성만찬의 회복
예배갱신운동은 성례전, 그 중에서도 성찬회복과 직결된다.  예배를 알기 위하여 먼저 성례전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우상(Idol)과 성례(Sacrament)는 먼 것 같으면서도 아주 가까운 것이다.  출애굽시 모세는 놋뱀을 통하여 많은 생명을 구하였다.(민21:8)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장대에 매달은 놋뱀을 두고두고 봄으로써 그들의 죄를 기억했다.  그러나  위기를 모면한 이스라엘인들은 구원의 감격 속에 하나님을 모시는 경건한 마음으로 놋뱀을 잘 보관하였으며 시간이 감에 따라 우상숭배의 성격으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아론과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이를 우리의 하나님이라고 한 것과 비슷한 상황이 되어갔다.  그것이 히스기야왕 시대에 가서 개혁이 일어나 놋뱀을 부수어 놋뱀제단앞에서 향을 피우던 모습은 사라지었다 (2왕18:4).  그런데 예수는 니고데모에게 그 놋뱀을 다시 들추시사 모세의 놋뱀이 들린 것과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함을 말씀하신다 (요3:14).  예수는 하나님의 구원의 모습을 놋뱀으로 재현해 보이신다.  이것이 성례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내 보이는 표출이요 재현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성례와 우상의 그 멀고도 가까운 관계성을 보게 된다.  똑같은 것을 놓고 문화와 세대에 따라 어떤 이에게는 성례인 것이 다른 이에게는 우상이 되는 것을 경험한다.   성례는 거룩하게 구별된 것으로 본질적으로 살아 계신 말씀, 예수님을 가리킨다.  그러나 sacrament가 잘못 사용되어져 그 자체가 본질이 될 때에 우리는 이것을 우상이라고 말한다.  마틴루터는 구교의 7가지 성례전을 3가지로 줄이었고 그 중에서 지금까지 개혁신앙에 남아있는 성례는 성찬과 세례뿐이다.  미국장로교 목사의 정식 호칭은 Minister of Word and Sacrament 이다.  이것은 말씀과 성례의 목사라는 이름인데 말씀은 이해하나 성례는 소홀히 생각하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다.  21세기의 이민교회는 개혁신앙의 본질인 말씀과 성례의 조화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전하는 사명 자들이 되어야 한다. 
초대교회예배형태는 공동체 식탁 중심이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는 그들은 집에서 서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였다고 한다. (행2:46)

전통과 변화의 조화
우리는 어떠한 물체나 의식 속에 필요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여 그 본질의 의미를 손상시키는 우상화의 작업을 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 본질의 의미를 상실한 체 습관적인 모습가운데에서 아무 생각 없이 의례히 했던 관습과 전통의 답습으로 왜 하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따라 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어느 한 유대인 랍비가 예배시 설교를 할 때마다 그가 키우는 고양이가 회당 안을 휘젓고 다니며 회중들의 집중을 방해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회당지도자들은 예배만 시작되면 고양이를 찾아다가 구석의자에다 묶어 놓는 해결책을 얻었는데 오랫동안 그 작업은 계속되어 마치 예배의 한 부분과도 같이 여겨지게 되었다.  그들은 예배가 시작되면 고양이를 의자에 묶어 놓아야 한다는 사항을 회당록에 까지 기록하고 순서를 짜서 교대로 그 작업을 진지하게 행하였다.  어는 날 나이가 많은 랍비는 그의 사랑하는 고양이를 남기고 죽게 되었고 새로운 랍비가 그 회당에 부임하였다.  첫 예배시 새로 부임한 랍비는 설교를 시작하는데 사람들이 진지하게 고양이를 의자에 묶는 모습을 보면서 질문을 던지게 된다.  "왜 예배 중에 고양이를 의자에 묶어야 합니까?  그것이 여러분의 신앙에 어떠한 결정적인 도움을 가져다줍니까?" 우리는 이 질문을 우리가 현재 속해 있는 한인교회 예배에 적용하여 던져 본다.  앞으로 21세기를 향한 이민교회의 예배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를 우리의 현재모습에서 찾고자 한다. 
한인교회는 이민 1세, 2세, 1.5세간의 갈등 속에 영적 지도자의 권위는 위기를 맞고 있는 반면 개인주의적 감상적인 이민신앙은 예배를 신앙이 아닌 종교의식으로서 만들어 가고 있다.  오로지 어느 한 개인의 취향과 감각 속에서 말씀과 성례전과는 거리가 먼 당면한 경쟁생존의 문제 속에 빠져 있는 현실의 모습이다.  그렇다고 개혁신앙이 가르쳐 준대로 우리의 당면한 문화적 갈등과 언어문제를 예배에 반영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유행성에 따라 '열린예배' '경배와 찬양' 등에 기웃거리며 얻을 것이 없나하고 급급해하는 안타까운 모습이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현장을 돌아보고자 한다.  그냥 이야기함보다는 어떠한 틀 속에서 들여다보기를 원한다. 예배에서 모든 것이 삼위일체 하나님께 향하여져야 함을 생각하며 다음과 같은 7가지 예배의 요소들을 한국교회 상황 속에서 검토하고자 한다: 경건, 시간, 장소, 기도, 말씀, 음악, 그리고 예배자이다.   우리의 예배 속에는 우상적인 요소는 없는지?  무엇이 우리를 거룩 되고 선별된 주의백성으로 고백하게 하는지? 그리고 그 표현의 방법은 무엇인지?  성서와 신앙적인 의미 없이 그저 습관적으로 예배하지는 않는지?  왜 꼭 그렇게만 하여야 하는지? 등의 질문을 끊임없이 던져 본다. 
1. 경건 Piety
한국교회의 경건 성이 예배의 어느 부분이냐고 물을 때에 저자는 묵도의 시간이라고 대답한다.  교회본당에 들어오자마자 기도부터 하는 습관이 한국교회에 있다.  교회뿐만이 아니라 어느 곳에 가든지 자리에 앉자마자 첫 행위는 잠시 고개를 숙이고 묵도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예배의 첫 순서에도 "다같이 묵도함으로 예배를 시작하겠습니다"라는 예배인도자의 선언이 있고 피아노의 찬송소리가 이어진다.  왜 그럴까?  싫든 좋든 한국교회에 정착된 우리예배의 한 모습이기도 하다.  우리의 문화적 관습 속에는 어른께 인사하는 것을 매우 중요시한다.  누구인가 만났을 때에 제일 처음 하는 것이 정중한 인사이다.  과연 묵도가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인사일까?  아니면 그저 습관적인 경건의 과시일까?  한국교회의 묵도가 과연 옳은 것인가 아니면 그릇된 것인가의 판단보다는 어떠한 의미와 신앙 속에서 묵도하는가를 점검할 줄 아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다.  여기에 16세기 개혁 신앙인들의 예배전통을 빌린다면 그들은 시편 124편 8절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를 인용하며 예배를 시작하였다.
성경찬송가를 항상 가지고 다님 또한 한국교회의 경건의 모습이기도 하다.  성경이 때 가 묻어있고 가죽옷이 너덜너덜하게 오래 사용되면 될수록 경건의 표현이 깊게 우러나온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또한 성경에 줄을 많이 긋는 것도 경건의 표현으로 받아지고 있다. 
한국교회의 다양한 헌금조항들도 경건의 표현으로 보고 싶다.  그 헌금종류에는 다양한 감사헌금이 포함되어 이사, 개업, 취업, 건강, 여행, 생일등 우리의 생활 속에서의 경건이 드려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경건이 결핍된 다분한 보상심리에서의 습관적 행위는 아닌가 스스로 확인할 필요가 있다. 
청소년들의 예배가 교회어른들에게 거부감을 주는 이유 중 하나는 경건의 결핍성이다.  그러나 청소년들의 경건의 표현이 그들의 문화를 모르는 이에게는 우상화 심지어는 세속화로 보이기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청소년들이 보는 부모들의 경건성 또한 신앙이 아닌 따분한 의식으로 보지 않는가 모르겠다. 
그 외 우리의 의복, 사용하는 언어, 향을 비롯한 예배에 사용되는 도구, 그리고 예배하는 자세 즉 몸의 표현 등이 경건을 표현하는데 그 중에 필자는 우리말기도에 가장 많이 인용되는 문구로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손꼽고 싶다.  한국예배에서는 무엇인가가 우리를 하나 된 동질성 공동체로서 경건의 필요성을 깨닫게 하며 온 회중이 "아멘"의 화답을 거침없이 외치게 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이민교회예배의 중요한 요소인 경건을 표현하는 것 같다.  그러나 21세기 이민예배에서 어떠한 한국의 경건 성이 계속 유지되며 표현될는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고 오로지 성령의 인도하심뿐이다. 
2. 시간 Time & Cycle
시간구조를 위한 가장 기본적인 것은 교회력(Lectionary)이다.  교회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중심으로 탄생을 기다리는 대강절을 시작으로 성탄절, 현현절, 수난절, 부활절, 오순절, 그리고 마지막으로 왕 되신 그리스도 주일로 1년 교회력은 마친다.  세상의 음력, 양력 달력이 아닌 교회력은 예수의 생애를 우리 삶 속에 깊이 모시고자 발전된 오랜 기독교 전통이다.  여기에 감사절이 왜 안 들어가는가 하면 이것은 미국에 정착한 청교도들의 신앙이지 교회력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는 한국교회에서도 감사절을 11월 3번째 주일이 아닌 추석이나 10월중에 김장 추수 때에 맞추어 예배함을 보게 된다. 
교회력 외에 백일, 돌, 환갑 등 삶의 Cycle이 있는가 하면 일년을 놓고 보는 절기, 월별의 시간, 주일, 그리고 매일의 시간 등이 있다.  히스파닉문화에서는 15살이 되는 여자어린이의 성년식이 매우 중요하게 지켜져 미국감리교를 비롯한 여러 예식 서에 나와 있는 것을 보게 된다. 
한국교회는 주일성수를 잘 가르치는 전통이 있다.  여기에 주님의 날이 언제 시작하느냐의 질문이 어느 문화권이냐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기도 한다.  유대인들의 새날은 해가 지면서 시작되고 희랍인들의 새날은 12시 자정에 시작되며 로마인들의 새날은 해가 뜨면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21세기 이민교회에서는 어떠한 시간적 요소가 지켜지겠는가?  물론 새벽기도, 철야기도, 수요기도, 또한 정하여진 시간에 모이는 이민교회의 아름다운 모습을 오래 간직하고 싶다.  아직은 많은 교회들이 미국교회를 빌려 오후예배를 드리고 있다.  21세기에는 자체 교회건물구입으로 예배시간이 오전으로 바뀜에 따라 자유로운 주일오후가 예상되나 아울러 2세교회 그리고 다양한 문화수용의 요구에 따라 여러 스타일의 예배가 등장하리라 본다. 
3. 장소 Place
우리가 예배의 장소를 처음에는 지을 수는 있지만  그 장소의 틀이 시간이 감에 따라 오히려 우리를 만들어 가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만치 어디서 예배하느냐의 장소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세상과 구별된 모습의 예배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고려되는 것이 예배공간문제이다.  Gothic이냐 아니면 극장식이냐, 체육관을 포함한 다목적공간이냐에 따라서 예배는 그 주는 초점이 다르게 나타난다.  친교실공간에서 아무리 왕 중의 왕이신 메시아를 힘있게 선포하여도 같은 내용을 높은 천장의 웅장한 고딕식 성전에서 외치는 위엄성 효과에는 미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예수그리스도의 따뜻한 사랑을 부드럽게 전할 때에는 웅장한 Cathedral 보다는 조그마한 공간에서 서로 손을 잡고 나누기를 원한다. 
 
여기에 건축만이 아닌 예배용 소품들의 자리배치 또한 중요하다.  예배에 사용되는 가구 또한 고정적이냐 아니면 움직일 수 있느냐에 따라 예배의 다양성을 추구할 수 있다.  성례전의 중요성을 회복하기에 가장 좋은 시도는 성찬상과 세례 단을 잘 보이는 자리에 배치할 것과 성찬상위에 컵과 접시 외에 아무 것도 놓지 않으며 세례 단의 물이 보이게끔, 더욱 좋은 것은 흐르는 물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하든지 아니면 만질 수 있게끔 배려함이 좋다. 
 
새로이 주장되는 예배공간 전문가들의 견해는 교회에 들어가자마자 넓은 친교 실을 갖게 하고 예배실은 안쪽에 깊숙한 곳에 자리하라고 한다.  예배본당에서 너무 쉽게 파킹 장에 나가지 않도록 하는 그 이유는 예배실과 세상과의 구별을 분명하게 하며 본당을 향하여 가는 길을 길게 하여서 친교 실에서의 교제가 본당으로 계속하여 이어지게끔 함에 있다. 
 
한국교회의 문화적 수용이 예배에서 가장 자연스럽게 될 수 있는 사항이 예배공간이다.  한국도자기, 성경문구 서필, 창호지문등 창조적인 표현을 마음껏 사용하여 우리문화와 신앙의 접목을 시도할 수 있는 사항이다. 
4. 기도 Prayer
 
가장 오래된 기도서는 30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시편이다.  하나님의 언어를 사용한 기도는 어떤 것인가?  기도에는 사건의 해결을 위한 청원의 기도가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기다리는 침묵의 기도,  성령의 임재를 위한 기도, 아픈 자와 어려운 자를 위한 중보의 기도등 한 예배 안에 여러 형태의 기도순서가 있다. 
 
기독교 기도의 여러 다른 모양새는, 새벽기도, 철야기도, 산기도, 통성기도, 안수기도등 여러 이름으로 한국교회에 자리잡아 가고 있다.  여기에는 읽는 기도와 즉흥의 기도가 있다.  사실 무엇이 올바른 기도냐 하는 질문은 눈을 뜨고 기도합니까?  눈을 감고 해야합니까? 하는 질문과 같다고 본다. 칼빈은  Adiaphora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예배에 필요한 사항과 그다지 꼭 중요하지 않은 사항을 나누어 Non-essential 한 사항들을 아디아포라라고 구분하였다. 
 
기도는 예배에 꼭 필요한 사항이다.  그러나 기도의 방법은 이렇게 하여야만 한다고 명시하지 않고 있다.  한국교회에서의 기도전통은 구전에 의지하여 내려오기에 쓰여진 자료가 거의 없다.  미국장로교 기도서가 1906년도에 처음 발행될 때에 사람들은 통조림 고기와 채소는 먹을 수 있어도 통조림 기도는 못하겠다고 반박하였었다.  그러나 즉흥적인 기도가 제일 좋다고 볼 수 없는 것은 그저 아는 단어만 계속 되풀이하는 우리자신들의 언어적 한계가 오히려 우리를 통조림 신앙인으로 만들지 않는가 묻고 싶다. 
 
기도서의 의도는 카톨릭을 흉내냄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더욱 성경의 말씀에 근거한 구별된 언어로 하나님께 기도하는가에 있다.  다른 신앙인 들은 어떻게 기도하는가?  우리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서 좀 더 적합한 언어사용으로 모든 이들의 공감을 안겨 주는 기도의 노력은 종교개혁자중 Strasbourg에서 목회한 마틴 뷰서의 공이 크다.  그는 한가지 기도만 주장하지 않고 여러 형태의 기도문을 소개하며 선택은 각자에게 맡기었다.  이것이 장로교예배의 특색으로 남아서 어떠한 예배의 틀을 요구하지 않고 예배순서는 개교회가 선별하여 선택하도록 자료제공에 그치고 있다.  21세기 이민교회에 꼭 필요한 것이 있다면 바로 예배와 기도 자료집이다.  교단 예배서는 교단을 대표하는 얼굴이며 문화적 유산이다.  21세기 이민교회의 가장 시급한 과제는 이민교회예배 전통을 이어나갈 수 있는 예배서 발간에 있다. 
5. 말씀 Word
 
요리신학이 있다.  21세기 이민교회예배는 무엇을 만들까가 아닌 어떻게 요리할까의 시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선포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심령의 골수를 쪼개는 하나님의 말씀은 구별된 언어이다.  또한 이 말씀은 우리의 언어로서 구원의 이야기와 이미지들이 전하여지는 시간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먼저 예수 그리스도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우리는 고백한다.  말씀은 구원의 소식과 이미지를 담은 이야기이다.  여기에 교회력에 맞춘 3년 코스의 Lectionary 본문이 있다.  정장복교수의 예배와 설교핸드북이 한국교회에 미친 영향은 바로 Lectionary 본문 소개에 있다고 본다. 
 
현재 미국장로교회가 사용하는 성서일과 (Lectionary)는 교회일치를 위하여 1992년도에 공동본문협의회 (Consultation on Common Texts)가 제작한 개정판 공동 성서일과이다.  대부분의 모든 영어권 교회들이 이 성서일과를 사용하는데 앞으로 21세기 한국교회에 가장 큰 영향력이 반영될 전망이다.  성서일과는 말씀중심으로 돌아가자는 의도로서 주일설교외에 전교인 성경공부, 성가대 찬양곡선정, 매일 새벽기도, 가정예배등 교회의 전반적인 생활리듬을 하나로 묶어준다.  이외에도 공동본문인 성서일과를 매주일 예배에 사용할 때에 21세기 한국교회가 해결해야할 각교단간의 연합일치운동에도 핵심적인 역할이 되리라 바라본다.
 
설교의 방향 또한 '개인구원의 외침에서 공동체 만들기의 가르침'으로 변환하여 주일 Lectionary 본문에서 시작하여 매일 새벽기도와 저녁시간 식탁에 둘러앉아 드리는 매일 저녁기도로 이어지는 연관성이 기대된다.  아울러 대형교회보다는 작은 교회의 긴밀한관계속에 이어지는 예배공동체를 위한 설교가 요구된다. 
6. 찬양 Music
 
'예배와음악수련회'가 첫해에 Anaheim, CA에서 조직되어 제2회는 애틀랜타에서,  제3회는 수도 워싱턴에서 그리고 제4회는 San Francisco에서 1999년 1월 25-27일에 모인다.  "예배와음악" 진흥을 위하여 이민교회  교회음악인들과 이에 관심 있는 목회자들이 미국장로교 총회의 협조로 시작이 되었다.  모이는 과정 속에서 '장로교'만의 모임을 떠나서 모든 하나님의 교회를 대상으로 21세기 이민교회 예배와 음악지도자들을 지도하고 훈련하여 새 시대의 예배와 음악공동체를 만들어 가길 목표로 하고 있다.  목회자는 찬송을 배우고 교회음악 지도자는 신학을 공부하며 같이 예배를 만들어 가는 21세기의 이민교회를 기대하여 본다. 
 
여기에 희망하는 사항은 이민교회 특유인 생존경쟁의 틀에서 탈피하여 앞으로는 뿌리내기기 작업으로 음악을 통한 신앙교육을 바라본다.  찬양하는 사람은 몸과 마음을 모두 바치기에 기도를 2번하는것과 같다고도 한다.  아울러 전임 교회음악 지도자의 등장이 절실하다.
7. 예배자 People
 
지금까지 열거한 6가지의 요소가 아무리 훌륭하다 하더라도 가장 중요한 예배자가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예배가 된다.  그만치 예배자의 예배참여도는 6가지 요소에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 동안 한국교회에서는 예배본다, 드리다, 한다의 차이 속에서 예배개념의 발전이 있었다.  이제는 더 이상의 구분보다는 보는 것도 필요하고 듣는 것도 중요한 포괄성의 예배가 되어야 한다.  행하는 예배, 삶의 예배, 신령과 진정의 예배, 이 모든 사항들이 우리의 전부가 하나님의 구원역사속에서 어우러지는 예배자의 모습이다. 
 
잘 다듬어지고 정돈된 성격의 예배와 이질감이 느끼는 생소한 예배,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면 필자는 후의 것을 선호한다.  자기 자신의 신앙이 뚜렷하고 확고하다면 그만치 성숙한 신앙인은 다른신앙인의 예배표현을 받아 드릴 줄 알아야 한다.  예배는 결코 우리를 편안하게만 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선포를 들음으로 생기는 긴장 속에서 예배자의 사명으로 이어져야 한다.  또한 팽팽한 긴장의 대립 속에 있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그렇다면 삶을 그대로 표현할 수 있는 것 또한 예배이어야 할 줄 한다. 
 
1997년 여름 KAL기사고 합동장례식이 텔레비전 뉴스에 잠시 비치었을 때 개신교 장례예배에 이어서 천주교, 불교, 유교, 무당굿등 차례로 진행되는 각종교 장례식의 모습을 보게되었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인의 모습이다.  모든 종교와 문화가 섞여있는 21세기에는 우리가 속한 기독교문화에 대한 구체적인 정리와 표현이 주일예배를 통하여 나타나야 한다고 믿는다. 
예배자료서를 준비하며
필자는 미국에 사는 한인들의 다문화권 예배의 필요성을 절감하며 한인교회를 위한 이중언어 예배자료서를 만들기를 기도한다.  여기에는 기존 교독문의 보완, 수정, 그리고 증보가 요구되고 다양한 참회와 고백기도문이 예상된다.  이것은 다양한 시설과 크고 작은 교인 수를 갖고 있는 이민교회에 맞는 첫 예배모범서이다.  이민교회중에는 자체교회가 있는가 하면 오후에 미국교회를 빌려 예배하는 교회도 있다.  이러한 여러 상황 속에서 한국인 정서에 맞는 세례식, 성찬식, 결혼식, 장례식의 샘플 예문이 필요하다.  그 외 이사, 개업, 첫생일과 같은 특별예배예문이 요구되며 새로운 찬송과 기도문의 소개가 필요하다.  또한 이것은 영어회중과 미국인을 포함한 다문화권목회를 위한 예식서가 되어야 하며 1세와 2세가 함께 생동감 있게 드릴 수 있는 예배의 소개자료가 되어야 한다.  그 외에 초대교회 예배, 16세기 개혁예배등 값진 교회전통의 예배자료소개가 되어야 하며 Internet 정보화 시대 속에서 더욱더 가까이 자료를 나누어 점점 세계 속의 공동체로 만들어 나가야 할 목표가운데에 있다.  이 작업을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한인 교회지도자들과 온 교회가 같이 협력하여 우리의 예배를 같이 만들어 가야만 한다.  그러기에 여러분들의 조언과 적극적인 참여를 기대하여 본다. 
아울러 미국/카나다에 위치한 한인교회들의 교단일치 운동으로 이민교회를 위한 이중언어 찬송가만들기 작업이 필요하다.  어느 한 교단이 만들었다고 모두가 사용하는 자료는 아닌 것을 지난날의 경험을 통하여 배운바 있다.  그러므로 시간과 수고를 낭비하는 각교단별의 경쟁적인 모습은 피하고 모든 지혜와 경험을 살려 이민교회가 꼭 필요로 하는 작업이 되었으면 한다.  성경 또한 대한성서공회에서 발행한 개역개정판(1998)중 신약전서와 시편. 잠언이 이미 출간되었다.  새로운 언어로 새로운 옷을 입고자 하는 교회의 움직임은 계속되리라 전망한다. 
 
마지막으로 바라는 것은 이러한 모든 자료들이 교단중심에서 벗어나 교회연합운동과 일치한 이중언어자료로 미국에 사는 한인동포들과 그 자녀들을 위한 머릿돌의 역할이 되기를 기도한다.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 (고전14:15

출처 : 늘푸른 광야의 소리
글쓴이 : 초산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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