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

[스크랩] 찬양예배의 이미지

김믿소사 2008. 4. 11. 11:09

찬양 예배의 이미지 ("경배와 찬양"을 중심으로)

 

♡ "예배"(worship)라는 영어 단어는 어떤 사람 혹은 어떤 사물에 가치를 매기다라는 뜻을 가진 "worth-ship"(가치를 매김)이라는 낱말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따라서 "그의 예배"란 칭호는 그를 특별한 영예를 누릴 자격이 있는 최고의 신분으로 간주한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그에게 값어치를 돌려 드린다"는 것이다.

이것은 시편기자가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고 돌릴찌어다"(시29:2)라고 말한 그 뜻이다.

독일어로는 예배라는 말이 "Gottesdienst"이다. 이 단어는 하나님께 대한 봉사를 뜻하기도 한다.

 

많은 다른 경우에 이 말은 하나님을 위해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실행된 봉사를 뜻하기도 한다.

혹은 어떤 사람을 위해 하나님이 봉사하신 것을 뜻할 수 있는 말이다. 예배에 해당되는 헬라어는 모두 일곱 개가 있는 데,

그 가운데 다섯 개는 딱 한 번 나오고 다른 하나는 세 번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59번 정도 나온다.

이 단어가 바로 "프로스퀴네오"인데 다른 것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이 등장하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이 단어의 중요성을 쉽게 알 수 있다. 그 기본적인 의미는 "(손에) 입맞추기 위해 나오다"이며 경배하기 위해 납작하게 엎드리는 외적 행위와 여기에 상응하는 존경과 겸비의 내적 자세, 두 가지 모두를 내포한다(새국제 신약성경 사전, 파터노스터 출판사1978년).

 

"예배(Worship)"란 하나님과 그의 백성간의 만남(meeting between God and His people)에서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시는 것이며 그의 백성들은 찬양과 감사로 이에 응답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레이번은 그의 책 [예배학]에서 기독교 예배란 "신자의 새 생명의 활동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나타난 신격(Godhead)의 충만과 그의 강력한 구속의 행위를 깨닫고 성령의 능력으로 그에게 합당한 영광, 존귀, 순종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드리기를 노력하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배"란 받으시기에 합당하다고 확실히 믿어지는 하나님께 기도와 존귀와 찬송과 사랑을 돌리는 인간의 방편이다. 그러므로 예배란 "최상의 존재에게 존경, 경의, 찬양, 영광을 드리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

 

그렇다면 특별히 찬양예배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1) 찬양예배의 신학적 근거 예배에 있어서 음악을 비롯한 예술의 사용은 구약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예배의 컨테스트였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넌 후에 부른 찬송의 가사가 출애굽기 15:1b-18a까지 나타나며, 같은 상황 속에서 아론의 누이 선지자 미리암을 비롯한 모든 여인들이 소고를 치며 춤출 때 미리암이 화답송으로 부른 노래가사가 15:21b에 소개되고 있다. 또한 시편의 많은 부분들이 예배때 사용되어진 찬송시라는 사실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대표적으로는 시편의 맨 마지막 편인 150편은 다양한 악기들을 동원하며 춤을 동원한 예배의 모습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

찬양예배란 주로 찬송을 부름으로써 전달되는 주제를 중심으로 드리는 예배이다.

한국교회에서는 매주일 오후에 드리는 예배를 보통 찬양예배라고 부르며 또 그렇게 알고 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주일 낮이든 저녁이든 간에 하나님께 드려지는 모든 예배는 찬양예배가 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첫째 예배 시간에 진행되는 순서(찬송, 성경봉독, 기도, 설교, 헌금) 가운데서 찬송이 가장 예배성이 높은 행위이기 때문이며 둘째, 찬송할 때 가장 많은 참석자(회중 및 집례자)가 능동적으로 예배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찬양(송)의 대상이 하나님이라면 설교(성경봉독)를 듣는 대상이 인간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드려지는 모든 예배는 찬송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께(시22:3) 찬양으로 드려지는 찬미의 제사(히13:15)로서의 예배가 되어야 한다.

 

2) 한국교회 찬양예배의 흐름과 발전 한국의 복음성가가 방향을 잃고 영적인 오염도의 위험수위가 높아졌을 때, 강한 회오리 바람처럼 한국교회에 충격을 주며 생겨난 것이 경배와 찬양(온누리교회 "경배와찬양" 모임을 지칭함)이다.

복음성가가 싱어롱(sing along)처럼 사람 앞에서 노래할 때, 구원을 주신 하나님은 잊어버리고 자기 중심의 깊은 상처만 생각하며 헤매며 노래할 때, 경배와 찬양은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누리며 그 앞에서 찬양하는지를 보여주었다. 1987년에 미약하게 시작된 경배와 찬양은 일부 지나치게 감정적이라고 부정적으로 비판도 받고 있지만, 수많은 젊은이들과 찬양하는 이들에게 새로운 도전으로 다가왔다.

 

그리하여 많은 교회, 단체들이 경배와 찬양식으로 악기를 구입하고 리더를 중앙에 세우고 싱어들은 옆에 서서 노래하는 모임이 수없이 생겨났다. 그러나 얼마 못가서 도중하차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것은 겉모습만 보고 그대로 흉내낸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한국교회는 그동안 여러 형태의 복음송 운동들이 있어 왔지만 "경배와 찬양"은 복음송 운동들과 연속성을 지니는 동시에 또한 독특성을 갖고 있는 새로운 하나의 운동이다. 복음송 운동들이 비판받았던 이슈들을 보완하려고 노력하면서도 (특히 찬송의 사랑 면에서) 또한 나름대로의 신학적 근거와 예배학적인 근거를 제시하면서 특별히 젊은층들을 대상으로 이 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것이 한국교회 내의 "경배와 찬양"의 특색이다.

80년대에 많은 찬양단체가 생겨났고 경배와 찬양이 80년대 후반 회중찬양의 활성화에 촉진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90년대에 들어오면서 세속음악에 대한 바른 이해와 비평 없이 그대로 기독교적인 옷을 덮어씌우고 있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3) 찬양예배의 문제점과 모범적 모형 제시 한국교회 찬양예배의 대표적인 모형이라 할 수 있는 "경배와 찬양"의 이해를 돕기 위해, 현재 온누리교회 두란노 경배와 찬양의 찬양 리더를 맏고 있는 하스데반 선교사의 견해와, 최근(1995.10) 총신대학교 강당에서 있었던 제10회 한국교회 심포지움에서 "현대교회의 예배문화"라는 제목을 가지고 주제발표를 한 이관직 총신대 신대원 교수의 견해를 비교하면서 "경배와 찬양"의 장,단점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먼저 하스데반 선교사의 견해를 들어보도록 하겠다. 경배와 찬양은 8가지의 예배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드려지는 예배 삶으로 드리는 예배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 구원의 복음이 선포되는 예배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드리는 예배 영성훈련을 바탕으로 한 예배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예배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을 선포하는 예배 경배와 찬양은 예배와 삶이 별개의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 하나님의 주권을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경배와 찬양은 기독교적인 문화를 보급하는 데만 그 목표가 있지 않고 오히려 찬양운동이라는 차원을 뛰어넘는 영적 운동이라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경배와 찬양은 단순히 한 시대를 풍미하는 하나의 유행사조가 아니다.

경배와 찬양은 신앙의 형태만을 기계적으로 갖추려는 모임도 아니다. 경배와 찬양은 예배의 회복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적 자유와 치유를 경험한 사람들이 복음의 마음을 가지고 선교에 의탁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받는 모임이다.

경배와 찬양의 부르심과 요청은 약해지거나 없어질 수 있다. 이데올로기가 세력을 잡던 그 시대 속에서도 경배와 찬양이 시작되었듯이 이제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을 가지고 이 시대의 모든 유행과 풍조와 사상과 언어와 종교 등을 뛰어넘어 갈 것이다. 그 이유는 바로 이러한 예배의 회복과 복음에 대한 마음 때문이다.

 

다음으로 이관직 교수의 견해를 정리해 보겠다.

긍정적인 면들부터 먼저 지적하여 보자면, 우선 "경배와 찬양" 운동 은 비교적 정적인 한국교회의 예배현장에 역동적인 에너지를 공급하는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특히 장로교회들이 많은 한국교회는 예배시에 예배인도자 중심의 예배가 되기 쉬운 경향이 있어 왔다.

온 회중이 예배에 참여하는 면이 제한되어 있어 예배를 "드리기" 보다는 예배를 "보는" 경향이 있는 것이 많은 교회들의 특성인 상황 속에서 "경배와 찬양" 운동은 모든 성도들이 예배의 적극적인 "참여자들"이 되도록 도전하였고, 따라서 예배는 이전보다 더욱 역동성이 있는 예배가 되게 되었다는 평가를 할 수 있다.

 

또한 현행 찬송가에 있어서 하나님께 경배하며 찬양하는 찬송들이 제한되어 있는데 이를 보완해주는 역할을 하였다고 생각한다. 감정의 표현이 지나치게 억제되는 장로교회 전통과 지나치게 감정적인 표현이 노출되는 순복음주의교회 전통 사이에서 어느 정도의 균형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점 또한 긍정적인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신학적으로 "경배와 찬양" 운동은 만인제사장설에 기초하여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을 힘입어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 담대하게 경배하며 찬양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깨우친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

영성의 관점에서 볼 때, "경배와 찬양" 운동을 이끌어 가는 이들의 영성훈련의 노력을 지적할 수 있다.

이전의 보다 인간위주의 복음송 운동 보다 이들의 노력은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예배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경배와 찬양"은 예배에 있어서 "다양성"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긍정적인 시도라고 생각한다.

"경배와 찬양"에 대하여 부정적인 의미에서 평가를 내리자면 또한 적지 않은 약점들을 지적할 수 있다.

첫째로,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경우에, "경배와 찬양"으로 인하여 칼빈주의 전통의 교회들에서 말씀 선포가 약화될 가능성이 있다.

둘째로, "경배와 찬양"은 자칫하면 우뇌중심적(right-brain-centered) - 감정중심적 -이 되기 쉬운 가능성을 내포하기 때문에 지적이며 의지적인 좌뇌적(left-brain)인 면과 균형을 이룰 필요가 있다.

셋째로, "경배와 찬양"을 인도하는 이들은 어느 한 면만을 지나치게 강조할 경우에 찾아오는 불균형성에 대한 위험성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넷째로, "경배와 찬양"은 젊은이들에게는 호소력이 있는 반면에, 전통적인 예배에 익숙해져 있는 장년, 노년층 성도들에게 거부감과 저항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위험성을 안고 있다.

다섯째로, "경배와 찬양"은 성도들의 전인적인 삶을 수용하기가 쉽지 않은 약점을 갖고 있다.

여섯째로, "경배와 찬양"을 예배에 어떻게 접목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 커다란 숙제로 지적할 수 있다.

일곱째로, 예배시에 "경배와 찬양"적인 찬송들만 불러야만 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질 때 "찬양과 경배"는 예배에 있어서 다른 요소들과 관련된 찬송들과 유기적인 관계를 맺게 함에 있어서 약점을 가질 수도 있다.

여덟째로, "경배와 찬양"을 인도하는 팀들의 탈진 가능성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경배와 찬양"은 한국교회에서 현재까지 많은 부분에서 긍정적인 영향들을 끼쳐왔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경배와 찬양" 운동이 내포하고 있는 위험성들을 올바로 인식하고 부정적인 면들은 보완하며 다듬어가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무조건 이 운동을 백안시한다든지 또는 무조건 환영하는 태도는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홍정표 교수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찬양은 영적인 것이다. 영적인 찬양은 능력이 있다.

이 능력을 경험한 자들은 그 모습이 달라져야 된다. 그래서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이 모임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 그 앞에 거꾸러지고, 찬양하다가 병이 낫고, 그들의 삶이 진정 거듭나고 새로워지는 것을 보았다.

이러한 현상이 예배음악 안에 적용된다면 예배 중에 찬송가를 부르다가, 성가대가 찬양하다가 똑같은 현상을 체험할 수 있으리라." 우리가 만약 찬송의 모형을 성경으로부터 직접 배우지 않고 그 모형을 배운 다른 사람이나 모임에서 찾는다면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하나님의 모형을 계속 탐구하면 우리는 하늘에 대한 일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성경중 두 책-구약의 이사야와 신약의 계시록-을 재발견하게 된다.

성서의 다른 기사들은 하늘의 생물에 대한 환상(특별히 에스겔)을 갖게하지만 이사야와 요한은 수백 년간의 차이가 있으면서도 다른 문화와 다른 상황(이사야:왕의 가정교사, 요한:왕의 감옥수)에서 다른 언어를 말하면서도 두 사람은 똑같이 하늘의 찬송을 장엄하게 보고 말하고 있다.

이사야 6장과 요한계시록 4, 5, 7, 15장에서 우리는 하늘 세계 속에 이와 같은 환상으로부터 찬송의 본질과 실행의 모형을 배울 수 있다. 그것은 목소리로 내는 것이고 흔히 여러 번 하는 것이다.

때로는 응답식이고 때로는 연합해서, 때로는 혼자서 찬송한다. 흔히 노래로 나타내며 더욱 큰 소리를 질러 찬송한다.

대부분 일어서거나 손을 높이 들거나 절하거나 무릎을 꿇거나 그 앞에 면류관을 벗어드리는 등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지금 본래적인 하나의 모형으로 되돌아와야 할 때라고 생각하며, 그것은 바로 종교개혁자들이 외쳤던 대로 다시 한 번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21C를 준비하는 한국교회와 지도자들에게 간절히 바라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시대에 맞는 예배 모형을 만들기 위해 성공한 방법(?)들을 찾아다니는 비 성경적 자세를 버리고, 시대를 초월한 성경의 모범(성경이 말하는 이미지)으로 돌아가 주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찬양하며 예배하는 자가 되라는 것이다! *****************************************************************

♡ 함께 생각해 봅시다...

 

♡ 토마스 G. 롱은 그의 책 「Witness of Preaching」(설교자는 증인이다)에서 설교자에 대해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설교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속의 기쁜 소식을 가장 절박하며 필사적인 마음을 가지고 인간의 언어로 말하도록 업무를 맡은 사람이 된다는 뜻이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들에게는 위에서 말하는 설교자의 심정처럼 구속에 대한 기쁨이 그 속에 늘 충만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소망 없는 저들을 바라보며 절박한 마음과 복음을 전하기 위한 필사적인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찬양하는 사람입니까? 그렇다면 이 마음을 갖기 위해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목적은 아름다움이나 화려함, 능숙함이나 인기에 있지 않습니다.

팀 이름은 어떻게 정할까? 팀 멤버는 어떻게 구성할까? 연습은 어디서, 어떻게? 무슨 곡으로 어떤 멘트를 사용할까?

의상은 어떻게? 등등... 모두가 중요한 사항들 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전하고 싶은 말씀이 무엇인가를 바로 아는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 찬양을 이끌어 가도록 해야 합니다.

찬양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측량할 수 없는 놀라운 은혜"(Amazing Grace)로 인해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장을 품으십시요. "절박한 심정"과 "필사적인 심정"으로 찬양할 때, 하나님은 당신을 통해 이 땅의 찬양을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 예배인도자 유제훈목사 올림 -

 
출처 :산해원선교찬양단
출처 : 늘푸른 광야의 소리
글쓴이 : 초산나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