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 장, 기독교 세계관
1. 세계의 구성과 성질
1) 신적 섭리로 구성된 세계이다.
2) 유한적 성질을 가진 세계이다.
2. 세계의 가치와 목적
1) 세계는 계시로서의 가치가 있다.
2) 하나님 영광선포에 목적이 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 골 1:15 ~ 17 -
성경적 기독교의 세계관(View of the world)을 맨 마지막으로 거론하는데는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그것은 기독교 세계관이 본서의 결론이나 다름없는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알고보면 지금까지 앞서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이 살아온 역사를 차례로 알아보기 위해서 서론 다음에 성경관, 신관, 인생관, 역사관 등을 조금은 구체적으로 살펴보았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세계관의 내용이나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세계관이란 세계구성의 의의나 가치 및 목적에 관한 통일적 이해를 일컫는 말이다
.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세계란 과학적 인식의 대상이 되는 피조물이기 보다는 인간이 세상살이에서 얻어지는 인생체험의 세계를 가리키는 것이다.
세계관은 인간이 왜 살아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며 무엇이 진실되고 가치로운 삶인가를 묻고 이같은 물음에 대한 해답에 의하여 세계를 통일성 있게 해석하게 한다.
이 물음은 모두가 인간 자신에게 던져지는 물음인데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얻으려면 먼저 인간 자신에 대한 지식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좀더 근원적이고 폭넓은 질문이 필요하게 된다.
질문의 내용은 실제로 존재하는 유일한 근본적 실체가 무엇인가를 물은 후에, 계속 이어서 세계속에 살아가는 인간은 도대체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묻는다.
그리고 인간의 최후의 상태는 어떻게 될 것인가를 물으면서 인간 행동의 표준이 되는 도덕의 기초가 무엇인가를 묻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간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역사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다.
물론 이 외에도 이에 비슷하거나 조금은 색다른 질문을 던질 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모든 질문들은 위의 질문안에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다 포함이 되어 있다.
이와 같은 질문들에 대한 해답은 앞서 언급한 신관, 인생관, 역사관 등에서 구체적으로 밝혀졌다.
그러므로 세계관의 본론에 관한 자세한 언급은 피하기로 하고 원론적인 몇 가지 내용만을 결론삼아 논술하기로 하겠다.
1, 세계의 구성과 성질
단 4:34하 ~ 35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로 이르리로다. 땅의 모든 거민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사에게든지,땅의 거민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누가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 할 자가 없도다"
기독교 세계관에 있어서 먼저 풀어야 할 원론적인 문제는 세계가 어떻게 구성이 되며 어떠한 성질을 가지고 있는 가에 대한 문제이다.
이와 같은 기본적인 문제에 대한 해답의 내용에 따라서 나머지 세계관에 대한 모든 문제의 답이 결정이 되고 이에 따라서 종합적인 세계관이 수립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세계속에 살아가면서 허다한 문제의식을 느끼게 된다.
이같은 문제의식은 자기 자신에게 구체적인 질문으로 다가오는데 이에 대한 해답을 회피하면서 살아 갈 수는 없는 것이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이다.
그러나 모든 인간이 동일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사람마다 문화적 환경이나 개성에 따라 문제의식의 심도가 깊을 수도 낮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마다 자신이 느끼는 문제의식의 심도만큼 자기 나름대로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구하거나 더러는 체념한 채 살아가기도 하고, 혹자들은 분명한 세계관을 가지는 것을 포기하고 거부하며 살아가기도 하는데 알고보면 이것도 그 나름의 세계관이거나 철학적 입장이라고 평가될 수 있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현재 가지고 있는 세계관이 분명하고 확실한 것인가를 재고(reconsideration)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더러는 재고하는 것조차 포기해 버리는 경우도 있다.
그것은 정확하고 분명한 세계관이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마다 각자 나름대로의 세계관을 가지고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 살아가기를 희구하는 것이다.
그 결과 다양한 형태의 세계관이 오늘에까지 전해지고 있다.
기독교 세계관은 어떠한 것일까?
이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먼저 세계의 구성과 성질에 대하여 알아 본다.
1) 신적 섭리로 구성된 세계이다.
사 14:24 ~ 27
"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나의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나의 경영한 것이 반드시 이루리라. 내가 앗수르 사람을 나의 땅에서 파하며 나의 산에서 발아래 밟으리니 그 때에 그의 멍에가 이스라엘에게서 떠나고 그의 짐이 그들의 어깨에서 벗어질 것이라. 이것이 온 세계를 향하여 정한 경영이며 이것이 열방을 향하여 편 손이라 하셨나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경영하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폐하며 그 손을 펴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돌이키랴"
과학적 이해의 대상으로서의 세계창조에 대하여는 앞에서 기독교의 신관을 언급하면서 하나님의 사역임을 밝힌 바 있고 역사적 경험의 대상으로서의 세계섭리에 대하여는 기독교 역사관을 언급하면서 하나님께서 주관하신 것임을 밝힌 바 있다.
그러므로 세계창조와 역사섭리에 대한 세계 구성(Composition)의 내용은 생략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지금까지 역사과정에서 만들어져 전해오는 일반적인 철학적 세계관을 차례로 살피면서 성경적 기독교 세계관과 그 구성면에서 어떠한 차이가 있으며 문제점이 무엇인가를 찾고 비판을 가하는 것으로 기독교 세계관의 우월성과 신적 섭리로 구성된 세계를 확증하려고 한다.
기독교 세계관에서는 세계의 구성이 창조주 하나님의 창세전 작정에 의하여 창조되고 보존되며 인간의 구원과 멸망도 예정섭리에 따라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본다.
즉 세계창조는 물론이지만 역사적인 인간 경험의 대상으로서의 세계가 하나님의 섭리로 구성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일반적인 철학적 세계관에서는 그 형태도 다양하지만 어느것 하나도 세계의 구성이 신적 섭리로 이루어진다고 하는 세계관은 하나도 없다.
먼저,
세계는 신의 지배를 떠나서 독자적인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고 주장하는 이신론자들은 말하기를 과학적 이해의 대상이 되는 우주와 만물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후 우주의 운행은 스스로 하도록 버려두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우주 안에 내재하시는 신이 아니며 인간이나 역사를 주관하시는 신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주는 이미 결정이 된 상태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기적이나 이적같은 역사는 일어날 수 없다고 주장하며 인간도 인격체이기는 하지만 우주라는 거대한 기계의 한 부속품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신론(deism)자들의 주장이 모두 한결같은 것은 아니지만 신과 세계와의 관계에 대한 종합적인 견해를 극단적인 형태로 살펴본 것이다.
다음은,
자연을 근본 원리로 삼고 모든 현상을 그의 소산이나 소위로 돌리는 자연주의(naturalism)는 유신론에서 이신론을 거쳐 파생된 무신론적 사상이다.
이들의 주장은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으며 물질 자체가 영원한 것이며 존재하는 것의 전부라고 한다.
그리고 우주에 대한 견해는 이신론자들과 비슷한 주장을 한다.
우주란 완전히 폐쇄체계 속에서 인과율의 일치체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자면, 우주 이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은 물론 우주 밖에서 우주를 조정할 수 없는 상태로 완전히 갇혀져 있다는 뜻이다.
인간 역시도 우주의 한 부속품에 지나지 않다고 보고 인간의 자율적인 능력에 의해서 우주를 재조정 할 수 없도록 갇혀있는 것이 우주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주는 사물의 본질에 기초하고 있는 자연질서에 의해 조정되는 것이라고 결론한다.
그런데 자연질서가 확정적이냐 불확정적이냐에 대한 자연주의자들의 견해는 서로 다른 이견을 보이기도 한다.
이와 같은 이견은 인간관에서 견해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자연질서가 확정적이라고 보는 자들은 거대한 우주의 확정된 자연질서에 따라서 움직여야만 하는 기계적 인간으로 본 것이고,
반대로 불확정적이라고 보는 자들은 인간의 자율의지에 의해 자연질서를 바꿀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자연주의는 18세기로부터 20세기말인 오늘에 이르기까지 굉장한 힘을 가지고 과학발전과 함께 현대문명을 장악하고 있다.
다음은,
사물의 실제나 진리는 물론 보편적인 표준마저도 일체 무시하거나 부정하는 허무주의(nihilism)는 자연주의로부터 자연스럽게 파생된 것인데 허무주의자들은 모든 것은 우연한 것이기 때문에 무의미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연이란 비이성적인 것이기 때문에 의미부여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우연한 사건은 이유나 의미 또는 목적을 가질 수가 없다.
이와 같은 허무주의가 자연주의로부터 자연스럽게 파생되게 된 까닭은 여러가지가 있겠으나 자연주의에서 인간에게 의미있는 행동을 하기 위한 근거를 제시해 주지 못한데 있으며 우주존재의 목적제시를 해주지 못한데 있는 것이다.
자연주의적 입장에서 본다면 우주가 존재하는 의미나 목적을 가지려면 우주의 한 부속품인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야만 한다.
그런데 여기서 또 문제가 되는 것은 이렇게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낸 의미나 목적에 의한 가치판단은 누가 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당연히 인간 스스로가 할 수 밖에 없고 그것도 인간 개개인이 각자 나름대로 가치판단을 기준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따라서 절대치의 가치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이와 같은 우주는 일치체가 아닌 집합체에 불과한 것이 된다.
그래서 자연주의로부터 허무주의가 자연스럽게 파생될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그 다음은,
생존을 주제로 하고 또 그것을 자기 문제로 삼아 나아가려는 경향이나 주장을 하는 실존주의(existentialism)자들은 허무주의를 초월하기 위해 새로운 세계관을 제시하였다.
그런데 실존주의자들 중에는 자연주의에서 기생한 무신론적 실존주의자가 있고 유신론에서 기생한 유신론적 실존주의가 있다.
무신론적 실존주의는 인간의 본질과 우주와의 관계에 대한 문제만을 제외하고는 자연주의의 주장에 의견을 같이 한다.
인간의 본질과 우주와의 관계에 있어서 무신론적 실존주의의 주장은 우주는 단지 물질로만 구성되었는데 인간에게는 실재가 주관과 객관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주관적 실재는 정신, 의식, 인식, 자유, 안정 등의 주관세계(subjective World)를 말하고 객관적 실재는 물질, 불변의 법칙, 인과율, 시간, 기계장치 등의 객관세계(objective World)를 말한다.
그래서 인간은 우주가운데 의식과 자기 결정력이 있는 존재로서 의미와 가치를 부여 할 수 있다고 한다.
유신론적 실존주의는 앞에서 언급한 유신론의 대부분의 주장들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출발전으로 하지 아니하고 인격적 존재인 인간의 의식에서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존재 여부는 이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믿음에 의해서 해결되는 난제라고 한다.
이것이 유신론과의 가장 중요한 차이점이다.
이같은 차이점은 유신론적 실존주의자들이 기적이란 불가능한 것이며 성경은 역사적으로 믿을 수 있는 것이 못된다고 하는 전제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동양에서 범람하는 범신론(pantheism)적 일신론이다.
이 사상은 서양사상의 혼미와 방황을 끝내려는 현대인들의 노력으로부터 관심이 쏠리고 있는 동양적 특유의 사상이다.
범신론적일신론(범일론 또는 만유신론)은 신이 곧 만유이며 만유는 곧 신이어서 우주 밖에 신이 따로 있지 않다는 주장으로부터 출발한다.
따라서 모두는 합일된 유일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실재에도 현상적 계서제라는 것이 있어서 실재인 유일자와 합일이 되는데는 광물, 식물, 동물, 인간 등의 순서로 서열이 정해져 있는데 그중 제일로 가까운 인간에게 있어서도 별도의 계서제가 적용이 된다는 주장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유일자인 실재와 완전 합일이 이루어지면 무한한 비인격적 존재 즉 무아경에 이른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유일자와 합일을 이루는 방법으로는 교리가 아닌 기술에 있다고 보고 인격, 지식, 선악, 시간 등을 초월하는 것이 유일자와의 합일을 체험하는 것이라고 한다.
지금까지 세계의 구성에 대한 일반적인 철학적, 종교적 견해들을 대략 살펴보았다.
(이 부분의 내용은 제임스 사이어가 저술하고 김헌수가 옮긴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사상을 참고한 것임)
결론은 성경적 기독교의 견해와는 원리나 방법적인 면에서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이신론의 경우는 기독교의 내재신은 부정하고 초월신만을 강조하고, 자연주의는 기독교의 유신론을 반대하여 무신론에 기초하며, 허무주의는 기독교의 우주에 대한 근원과 의미와 목적을 송두리채 무시하고 우주를 허무로 돌려버리고, 실존주의는 무신론적 실존주의나 유신론적 실존주의 모두가 한결같이 기독교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지 아니하고 인간으로부터 출발하며, 범신론적 일신론은 기독교의 창조주 하나님이 아닌 우주의 모든 존재자체를 하나님으로 규정하고 있는 점이다.
성경적 기독교의 세계관에 있어서 세계의 구성은 어디까지나 영원자존자이신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섭리에 따라 창조 보존되고 만사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섭리로 이루어진다.
2) 유한적 성질을 가진 세계이다.
계 21:1 ~ 4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성경적인 기독교 세계관에 있어서 독특한 성질을 하나 꼽으라면 세계의 유한성을 꼽지 않을 수 없다.
앞서 여러가지 다양한 세계관에 대하여 살펴 보았지만 대부분은 세계의 종말에 대하여 언급하기를 회피하거나 세계의 계속적인 유지를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성경은 첫 머리에 있는 창세기에서 세계의 시작을 알려주고 맨 마지막에 있는 요한 계시록에서 세계의 종말을 예고해 주고 있다.
하나님의 창조사역은 종말을 전제한 태초라는 시간의 출발과 함께 시작이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창조세계는 반드시 시간의 종결과 함께 끝을 맺게 된다.
이에 관해서는 앞서 기독교 역사관을 거론할 때 조금은 상세히 취급한 바 있다.
역사관의 원리 가운데 종결적인 원리로서 역사는 종말론적이라는 제목아래서 취급이 되었다.
역사의 종말은 세계와 인간의 종말이 모두 함께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세계와 인간이 존재하는 한, 역사는 계속 진행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독교 세계관에 있어서 세계란 유한적인 성질을 가진 것으로 보기 때문에 우주도 인간도 역사도 모두가 유한적인 것이다.
성경적 기독교가 세계관에 있어서 세계를 유한적인 것으로 보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그것은 세계라는 개념을 현세와 내세로 구분해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개념은 오직 기독교 세계관의 특유물이다.
현세는 피조세계를 말하고 내세는 영원세계를 말한다.
내세라는 말의 뜻으로 보면 오는 세상을 말한다고도 할 수 있으나 그것은 현세에서의 시간개념을 첨가한 이해개념이고 본래는 영원자존한 세계라는 개념으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영원세계는 영원부터 자존해서 영존하는 세계를 말한다.
그와 반면에 피조세계는 영원세계에서 영원자존하시는 하나님에 의해 시간과 공간과 형상(물질)적인 것으로 창조되어진 세계를 말한다.
그러므로 피조세계와 영원세계는 이원론적 구별이 아니라 일원론적 구별인 것이다.
피조세계란 어디까지나 영원한 것은 아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지만 보이지 않은 것은 영원한 것이다.(고후 4:18)
알고 보면, 피조세계는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잠깐 자신을 계시하신 계시세계일 뿐이다.
따라서 시간도 유한하고 공간도 유한하며 물질 역시 유한한 것이다.
유한세계는 영원세계에 비하면 밤의 한 경점에 불과한 것이다.(시 90:4)
다시 수학적으로 계산한다면, 피조세계의 유한성과 영원세계의 무한성을 비율로 계산할 때 Ω:0,000.....으로 계산될 수 밖에 없다.
기독교 세계관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피조세계는 물질이 구성되므로 공간이 이루어지고 공간과 함께 시간이 형성되게 된다.
그런데 물질의 최소 기본단위는 소립자 또는 쿼크(Quark)라는 입자인데 이 입자 역시 궁극의 입자라는 보장이 없다.
현재 비교적 덩치가 큰 원자는 특수한 장치(STM)로 볼 수 있으나 아원자 차원의 모든 소립자는 볼 수도 만질 수도 느낄 수도 없어 단지 그 흔적(구름상자)만 추적할 따름이다.
이와 같은 작은 입자들이 모여서 물질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없는 것이나 다름 없는 입자들이 밀고 당기는 힘에 의하여 응집이 되면 하나의 커다란 물체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전능하신 하나님에 의해 아무것도 없는 데서 물질과 공간과 시간으로 구성된 세계가 창조되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창조된 물질과 공간과 시간으로 이루어진 피조세계는 영원할 수는 없는 것이며 영원할 수 없는 세계는 당연히 종말이 있을 수 밖에 없다.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로 시작된 세계는 종말이 전제된 세계임을 알 수 있다.
세계가 종말론적인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창조라는 말은 없는 데서 있게 만드신 것을 말한다.
그러나 좀더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영원 안에서 형상, 공간, 시간적인 것으로 만드셨다는 뜻도 된다.
영원은 시간과 공간과 형상(물질)을 초월한 상태를 말하는데, 생각해 보면 영원은 시간과 공간과 형상적인 피조세계에서 볼 때는 없는 것과 같다.
그와는 반대로 피조세계를 영원세계에서 볼 때에는 없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여기에서 참으로 존재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은 분명해진다.
그것은 있고 없다는 판단 기준이 영원 자존하시는 하나님께만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참으로 존재하는 것은 영원한 것일 뿐이다.
참으로 존재하는 것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며 바로 그 자체가 시작도 되고 끝도 되는 것이다.(계 22:13)
그러나 참으로 존재하지 않은 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시작과 끝이 따로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시간과 공간과 형상을 초월할 수 없는 피조세계는 아무리 오래 지속이 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영원한 존재는 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분명한 시작이 하나님의 창조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즉 시작이 있는 세계는 영원한 세계가 아니며 영원한 세계는 시작도 끝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세계관에서의 세계는 종말론적임이 분명한 것이다.
피조세계가 종말론적인 또 하나의 이유는, 피조세계의 창조가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데 있다.
언제나 계획은 목적을 수반한다.
하나님의 목적을 수반한 계획이 창조로 시작이 되었다면 종말로 완성시키는 것은 분명하다.
목적을 수반한 계획을 창조로 시작하셨다는 것은 그 계획 자체가 시간 속에서 완성시킬 계획이라는 증거가 된다.
그러므로 그 계획된 목적은 시간 속에서 완성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목적이 달성되면 피조세계의 종말은 반드시 있어야하며 또 있도록 하나님의 계획속에 포함이 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계획된 목적을 이루시는 방법을 크게 세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그것은 첫째가 세계창조이며 둘째는 세계보존이며 셋째가 세계종말이다.
즉 하나님께서 세계를 시작하시고 진행하시고 끝을 맺으심으로 목적을 달성 하신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피조세계를 창조섭리로 시작하시고 보존섭리로 존속시키며 종말섭리로 끝을 맺으시는 목적에 대하여는 다음 항에서 자세히 취급하게 된다.
여기서는 다만 세계의 유한적 성질에 대해서만 거론하기 위해서 목적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뒤로 미루기로 한다.
여기서 말하는 목적은 피조세계를 통하여 이루실 목적을 말한다.
이 목적은 영원세계에 이르는 목적과 밀접하게 연결이 되게 되지만 일단은 피조세계의 종말과 함께 완전히 달성이 되는 목적이다.
지금까지 유한성을 가진 세계의 성질에 대하여 그 정당성을 논증했다.
우선 기독교 세계관에 있어서의 세계라는 개념이 영원세계와 피조세계로 구분해서 영원세계를 전제한 피조세계 개념으로 정리된다는 것과,
피조세계의 창조라는 개념이 종말을 전제한 것이라는 것과,
피조세계의 창조가 하나님의 목적이 수반된 계획실현의 출발로서 목적완성이 수반되는 피조세계의 종말이 전제된 하나님의 섭리라는 점을 들어서 피조세계의 유한성에 대하여 그 정당성을 논증하였다.
따라서 기독교 세계관에 있어서의 세계는 유한적인 성질을 가진 것임이 확증된다.
2. 세계의 가치와 목적
시 145:9 ~ 13
"여호와께서는 만유를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 여호와여, 주의 지으신 모든 것이 주께 감사하며 주의 성도가 주를 송축하리이다. 저희가 주의 나라의 영광을 말하며 주의 능을 일러서 주의 능하신 일과 주의 나라의 위엄의 영광을 인생에게 알게 하리이다. 주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니 주의 통치는 대대에 이르리이다"
성경적인 기독교 세계관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세계의 가치와 목적을 알아보는 것은 빼어 놓을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계의 가치와 목적은 세계관 정립에 결정적인 역활을 할 뿐만 아니라 세계관의 성격을 좌우하는 매우 중요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다양한 세계관들에 있어서는 세계의 가치와 목적이 다양하기도 하고 또는 희미하기도 하며 어떤 경우는 언급마저도 회피하거나 없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그것도 그럴것이 세계존재의 근본에 대한 관념자체가 다양하거나 희미하고 언급을 회피하거나 없다고 하기 때문이다.
세계에 대한 정확한 인식은 세계의 근본과 실재와 결과 또는 시작과 과정과 결말을 종합적으로 인식할 때만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의 근본이나 시작을 모른다거나 어느것 하나라도 모르는 상태에서는 정확한 세계에 대한 인식은 불가능할 수 밖에 없다.
세계의 근본이나 시작에 대한 정확한 인식은 세계의 실재나 과정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가능하게 할 뿐만 아니라 결과나 결말에 대한 정확한 인식도 가능하도록 해 주는 것이다.
그런데 일반적인 여러 형태의 세계관은 대부분이 세계의 근본과 시작은 물론 결과와 결말에 대하여는 흐리거나 회피해 버리고 다만 실재와 과정 부분만을 집중적으로 언급하기 때문에 모두가 제나름의 주장이 나오게 될 뿐이다.
1) 세계는 계시로서의 가치가 있다.
신 4:32 ~ 35
"네가 있기 전 하나님이 사람을 세상에 창조하신 날부터 지금까지 지나간 날을 상고하여 보라 !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이런 큰 일이 있었느냐 ? 이런 일을 들은 적이 있었느냐 ? 어떤 국민이 불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너처럼 듣고 생존하였었느냐 ? 어떤 신이 와서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전쟁과 강한 손과 편 팔과 크게 두려운 일로 한 민족을 다른 민족에게서 인도하여 낸 일이 있느냐 ? 이는 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의 목전에서 행하신 일이라. 이것을 네게 나타내심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네게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세계는 절대의지자이신 하나님의 작정계획에 의하여 창조되고 보존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는 반드시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그 의미는 반드시 가치를 수반하게 된다.
그러므로 의미가 있는 것은 반드시 가치로운 것이다.
세계의 가치란 무엇일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절대자이신 하나님께서 세계를 창조하시고 보존하실려고 의지로 작정하신 세계는 어떠한 의미가 있는가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작정하신대로 창조하시고 보존하시는 세계는 반드시 의미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능력과 영광을 나타내시는 계시로서의 아주 중요한 근본적인 의미이다.
물론 이외에도 다양한 의미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계시로서의 근본적인 의미 외에는 모두가 간접적인 의미는 될 수 있으나 직접적인 근본 의미는 아닌 것이다.
성경적 기독교는 계시를 크게 두가지로 구분한다.
하나는 일반계시이고 또 하나는 특별계시이다.
이에 관하여는 이미 성경관에서 언급된 바 있다.
그런데 피조세계에서 일어나는 온갖 모든 것을 포함하는 세계는 일반계시와 특별계시 사건들을 모두 포함하는 세계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일반계시도 피조세계를 통하여 하시고, 특별계시 역시도 피조세계를 통하여 하시기 때문이다.
일반계시는 물론이지만 특별계시의 기록문서인 성경의 내용 역시 모두가 피조세계에서 이루어진 것들이다.
따라서 일반계시와 특별계시의 사건이 포함된 세계는 근본적으로 계시로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기독교 세계관에 있어서, 세계가 가지고 있는 계시로서의 의미는 세계의 가치를 확실하게 해준다.
따라서 세계의 가치는 계시로서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
세계는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신 계시 도구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유일의 방법은 계시의 도구인 세계를 바로 아는 데 있다.
이와 같은 계시의 도구인 세계를 바로 알게되면 결과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지식을 얻어 경외하게 되고 따라서 올바른 기독교 세계관 정립이 가능하게 되는데,
문제는 어떻게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신 도구로서의 세계에 대한 지식을 올바르게 얻을 수 있는가에 있다.
이 문제는 반드시 해결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 문제의 해결은 성경적인 기독교 세계관 정립의 열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문제의 해답은 이미 기독교 성경관을 거론할 때 해결되고 확정된 사실이다.
논리의 흐름에 따라 다시 한번 그 인식방법에 대하여 언급을 하면,
일반계시와 특별계시 사건과 사물로 가득 채워진 세계에 대한 올바른 지식은 특별계시로부터 접근을 시도해야 한다.
그 이유는 인간은 타락해서 일반계시를 통해서는 진정한 지식이 전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특별계시를 주신 이유도 역시 그러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특별계시인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지식을 얻게 되면 그 신지식은 일반계시에 대한 지식은 물론 세계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수반하게 되는 것이다.
특별계시인 성경은 내용 자체에 의하여 분명한 진리임이 확증이 되고 일반계시에 의해 실증이 되어 하나님과 세계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충분히 가능하게 한다.
그런데 하나님과 세계에 대한 지식은 서로 상관관계를 가지는데 하나님을 모르면 세계를 알 수 없고 세계를 모르면 하나님도 모른다는 증거가 된다.
그러므로 만일 과학으로써 세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가능하게만 된다면 반드시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동반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특별계시인 성경과 과학은 참 진리를 찾아가는 두개의 통로인데, 성경이 하나님으로부터 닦아온 통로라면, 과학은 인간으로부터 닦아가고 있는 통로라고 할 수 있다.
둘 중에 어느 통로가 확실하고 찾기 쉬운 통로인가는 너무도 분명하다.
하나님을 알고 세계를 알 수 있는 계시로서의 의미를 담고 있는 세계는 참으로 얼마나 가치로운 것인가?
인간이 하나님도 모르고 세계도 알 수 없다면 인간 자신의 근원은 물론, 생존 과정에서의 의미도 모르고 가치도 모르고 목적도 없이 만사를 체념하고 허무한 인생을 살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인간의 이 비참함을 무엇에 비길 수 있겠는가?
그러나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에게 특별계시를 세계속에 허락하셔서 하나님을 알며 인간 자신의 근본과 생존 과정에서의 의미와 가치를 알고 영원한 나라를 소망하며 살게 하셨으니 피조세계가 가지고 있는 계시로서의 가치를 무엇에 비길 수 있으랴.
2) 하나님 영광선포에 목적이 있다.
시 19:1 ~ 6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해는 그 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 온기에서 피하여 숨은 자 없도다"
세계의 가치에 대한 내용이 세계와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설명이라면,
세계의 목적에 대한 내용은 세계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설명이 되겠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세계에 대한 분명한 목적을 의도하셨으므로 인간에게 있어서의 세계는 가치로운 것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세계에 대한 분명한 목적을 의도하시지도 않았는데 인간에게 세계가 가치로운 것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치는 어디까지나 목적에 수반이 되고 목적의 가치비중에 따라 그 비중도 결정이 되는 것이다.
기독교 세계관에 있어서 세계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선포에 있다.
영원자존하신 하나님께서 무슨 목적으로 세계를 창조하셨는가?
이 질문은 기독교 세계관에 있어서 가장 근본이 되는 질문이며 세계관 정립에 절대적인 열쇠를 가지고 있는 질문이다.
이와 같은 질문은 일반적인 세계관에서는 대답이 불가능하다는 전제 아래 다양한 견해를 펴고 있다.
이신론자들은 하나님이 세계를 떠나 버렸다고 함으로써 창조주 하나님께서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에 대해서는 언급해야 할 이유를 제거해 버린다.
그리고 인간 역시 우주의 한 부속품으로서 인간 편에서의 세계에 대한 목적부여의 기회도 주지 않는다.
자연주의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물질을 영원한 존재로 생각하면서 세계의 목적을 부인한다.
허무주의는 그 자체가 세계의 의미나 가치 또는 목적을 부정하는 것이므로 더 말할 것도 없다.
실존주의 가운데 무실론적 실존주의는 역시 신의 존재를 거부함으로써 세계에 대한 신적인 목적은 생각조차 할 필요가 없게 되었고 다만 인간적인 목적은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유신론적 실존주의는 하나님으로 출발점을 삼고 있지 않기 때문에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은 자연히 회피되고 만다.
범신론적 일신론 즉 범일론에서는 역시 창조주 하나님을 부인하고 유일 무한한 비인격적인 궁극적 실재를 신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세계에 목적은 생각할 필요조차 없게 된다.
이와 같이 몇 개의 대부분의 세계관들이 세계의 목적 자체를 거론하지도 아니하고 거론할 필요성도 가지지 못하고 있다.
목적없는 세계에 의미가 가능하며 의미없는 세계에 가치가 있을 수 있겠는가?
설령 인간 자신들이 의미나 가치 또는 목적을 창출해 낸다 하더라도 그것이 참된 의미나 가치 또는 목적이 될 수 있는 것일까?
그러므로 일반적인 세계관에 있어서의 세계는 목적없는 방황을 계속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주인을 잃어버린 세계는 주인이 나타날 때까지 방황은 계속되어질 것이다.
기독교 세계관에 있어서의 세계의 목적은 너무도 분명하다.
그 목적은 곧 전능자 하나님의 영광선포라고 했다.
그러면 영광선포라는 구체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영광선포가 세계의 목적이 될만한 가치는 있는 것일까? 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으로 결론을 맺고자 한다.
하나님의 영광선포라는 말은 하나님께는 전능성과 성실성과 주권성과 영원성과 자비성 등의 영광을 가지고 계신다.
그런데 이 모든 영광을 세계창조와 세계보존과 세계종말이라는 섭리를 통하여 선포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없는 데서 세계가 존재하도록 창조하심으로 하나님 자신의 전능성의 영광을 선포하시며,
영원전 작정섭리대로 창조하셔서 주관해 가심으로 하나님 자신의 주권성의 영광을 선포하시고,
인간에게 약속하고 약속대로 성취해 주심으로 하나님 자신의 성실성의 영광을 선포하시며,
피조된 세계의 종말을 맺으시고 영원한 세계를 주관 섭리하시므로 하나님 자신의 영원성의 영광을 선포하시고,
영원 안에서 사랑과 은혜로 선택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셔서 영원토록 사랑하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심으로 자비성의 영광을 선포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선포는 피조세계나 영원세계 모두의 궁극적인 목적인 것이다.
이 목적이야말로 참으로 영원한 가치를 지닌 목적이 아닌가?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고 6일동안 만물을 창조하시면서 거의 매일같이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창조를 보시기에 좋으신대로 하신 것 같이 보존섭리도 하나님 자신의 창세전에 작정해 놓으신 좋으신 뜻대로 섭리하시며 세계종말 역시도 그의 좋으신 뜻대로 섭리 하시는 것이다.
즉 모든 세계를 하나님 자신의 작정하신 좋으신 뜻을 따라 창조하시고 보존하시고 종결을 맺으신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좋으신 이유는 두말 할 것도 없이 하나님 자신의 모든 영광이 선포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선포는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이 곧 궁극적인 "선" 인 것이다.
즉 "최고선" 을 말한다.
이 최고선이야 말로 최고의 값을 가진 것이다.
즉 바꾸어 말하면 최고선은 궁극적 선을 말하고 궁극적인 선은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작정된 뜻을 따라 창조되고 보존되며 종결이 되는 피조세계에 대한 섭리이고 피조세계의 섭리는 하나님의 영광선포의 한 방편이시다.
따라서 세계의 목적 즉 영원세계나 피조세계 모두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선포에 있는 것이다.
롬 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계 22:20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1) 신적 섭리로 구성된 세계이다.
2) 유한적 성질을 가진 세계이다.
2. 세계의 가치와 목적
1) 세계는 계시로서의 가치가 있다.
2) 하나님 영광선포에 목적이 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 골 1:15 ~ 17 -
성경적 기독교의 세계관(View of the world)을 맨 마지막으로 거론하는데는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그것은 기독교 세계관이 본서의 결론이나 다름없는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알고보면 지금까지 앞서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이 살아온 역사를 차례로 알아보기 위해서 서론 다음에 성경관, 신관, 인생관, 역사관 등을 조금은 구체적으로 살펴보았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세계관의 내용이나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세계관이란 세계구성의 의의나 가치 및 목적에 관한 통일적 이해를 일컫는 말이다
.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세계란 과학적 인식의 대상이 되는 피조물이기 보다는 인간이 세상살이에서 얻어지는 인생체험의 세계를 가리키는 것이다.
세계관은 인간이 왜 살아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며 무엇이 진실되고 가치로운 삶인가를 묻고 이같은 물음에 대한 해답에 의하여 세계를 통일성 있게 해석하게 한다.
이 물음은 모두가 인간 자신에게 던져지는 물음인데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얻으려면 먼저 인간 자신에 대한 지식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좀더 근원적이고 폭넓은 질문이 필요하게 된다.
질문의 내용은 실제로 존재하는 유일한 근본적 실체가 무엇인가를 물은 후에, 계속 이어서 세계속에 살아가는 인간은 도대체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묻는다.
그리고 인간의 최후의 상태는 어떻게 될 것인가를 물으면서 인간 행동의 표준이 되는 도덕의 기초가 무엇인가를 묻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간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역사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다.
물론 이 외에도 이에 비슷하거나 조금은 색다른 질문을 던질 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모든 질문들은 위의 질문안에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다 포함이 되어 있다.
이와 같은 질문들에 대한 해답은 앞서 언급한 신관, 인생관, 역사관 등에서 구체적으로 밝혀졌다.
그러므로 세계관의 본론에 관한 자세한 언급은 피하기로 하고 원론적인 몇 가지 내용만을 결론삼아 논술하기로 하겠다.
1, 세계의 구성과 성질
단 4:34하 ~ 35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로 이르리로다. 땅의 모든 거민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사에게든지,땅의 거민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누가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 할 자가 없도다"
기독교 세계관에 있어서 먼저 풀어야 할 원론적인 문제는 세계가 어떻게 구성이 되며 어떠한 성질을 가지고 있는 가에 대한 문제이다.
이와 같은 기본적인 문제에 대한 해답의 내용에 따라서 나머지 세계관에 대한 모든 문제의 답이 결정이 되고 이에 따라서 종합적인 세계관이 수립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세계속에 살아가면서 허다한 문제의식을 느끼게 된다.
이같은 문제의식은 자기 자신에게 구체적인 질문으로 다가오는데 이에 대한 해답을 회피하면서 살아 갈 수는 없는 것이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이다.
그러나 모든 인간이 동일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사람마다 문화적 환경이나 개성에 따라 문제의식의 심도가 깊을 수도 낮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마다 자신이 느끼는 문제의식의 심도만큼 자기 나름대로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구하거나 더러는 체념한 채 살아가기도 하고, 혹자들은 분명한 세계관을 가지는 것을 포기하고 거부하며 살아가기도 하는데 알고보면 이것도 그 나름의 세계관이거나 철학적 입장이라고 평가될 수 있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현재 가지고 있는 세계관이 분명하고 확실한 것인가를 재고(reconsideration)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더러는 재고하는 것조차 포기해 버리는 경우도 있다.
그것은 정확하고 분명한 세계관이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마다 각자 나름대로의 세계관을 가지고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 살아가기를 희구하는 것이다.
그 결과 다양한 형태의 세계관이 오늘에까지 전해지고 있다.
기독교 세계관은 어떠한 것일까?
이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먼저 세계의 구성과 성질에 대하여 알아 본다.
1) 신적 섭리로 구성된 세계이다.
사 14:24 ~ 27
"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나의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나의 경영한 것이 반드시 이루리라. 내가 앗수르 사람을 나의 땅에서 파하며 나의 산에서 발아래 밟으리니 그 때에 그의 멍에가 이스라엘에게서 떠나고 그의 짐이 그들의 어깨에서 벗어질 것이라. 이것이 온 세계를 향하여 정한 경영이며 이것이 열방을 향하여 편 손이라 하셨나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경영하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폐하며 그 손을 펴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돌이키랴"
과학적 이해의 대상으로서의 세계창조에 대하여는 앞에서 기독교의 신관을 언급하면서 하나님의 사역임을 밝힌 바 있고 역사적 경험의 대상으로서의 세계섭리에 대하여는 기독교 역사관을 언급하면서 하나님께서 주관하신 것임을 밝힌 바 있다.
그러므로 세계창조와 역사섭리에 대한 세계 구성(Composition)의 내용은 생략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지금까지 역사과정에서 만들어져 전해오는 일반적인 철학적 세계관을 차례로 살피면서 성경적 기독교 세계관과 그 구성면에서 어떠한 차이가 있으며 문제점이 무엇인가를 찾고 비판을 가하는 것으로 기독교 세계관의 우월성과 신적 섭리로 구성된 세계를 확증하려고 한다.
기독교 세계관에서는 세계의 구성이 창조주 하나님의 창세전 작정에 의하여 창조되고 보존되며 인간의 구원과 멸망도 예정섭리에 따라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본다.
즉 세계창조는 물론이지만 역사적인 인간 경험의 대상으로서의 세계가 하나님의 섭리로 구성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일반적인 철학적 세계관에서는 그 형태도 다양하지만 어느것 하나도 세계의 구성이 신적 섭리로 이루어진다고 하는 세계관은 하나도 없다.
먼저,
세계는 신의 지배를 떠나서 독자적인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고 주장하는 이신론자들은 말하기를 과학적 이해의 대상이 되는 우주와 만물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후 우주의 운행은 스스로 하도록 버려두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우주 안에 내재하시는 신이 아니며 인간이나 역사를 주관하시는 신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주는 이미 결정이 된 상태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기적이나 이적같은 역사는 일어날 수 없다고 주장하며 인간도 인격체이기는 하지만 우주라는 거대한 기계의 한 부속품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신론(deism)자들의 주장이 모두 한결같은 것은 아니지만 신과 세계와의 관계에 대한 종합적인 견해를 극단적인 형태로 살펴본 것이다.
다음은,
자연을 근본 원리로 삼고 모든 현상을 그의 소산이나 소위로 돌리는 자연주의(naturalism)는 유신론에서 이신론을 거쳐 파생된 무신론적 사상이다.
이들의 주장은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으며 물질 자체가 영원한 것이며 존재하는 것의 전부라고 한다.
그리고 우주에 대한 견해는 이신론자들과 비슷한 주장을 한다.
우주란 완전히 폐쇄체계 속에서 인과율의 일치체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자면, 우주 이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은 물론 우주 밖에서 우주를 조정할 수 없는 상태로 완전히 갇혀져 있다는 뜻이다.
인간 역시도 우주의 한 부속품에 지나지 않다고 보고 인간의 자율적인 능력에 의해서 우주를 재조정 할 수 없도록 갇혀있는 것이 우주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주는 사물의 본질에 기초하고 있는 자연질서에 의해 조정되는 것이라고 결론한다.
그런데 자연질서가 확정적이냐 불확정적이냐에 대한 자연주의자들의 견해는 서로 다른 이견을 보이기도 한다.
이와 같은 이견은 인간관에서 견해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자연질서가 확정적이라고 보는 자들은 거대한 우주의 확정된 자연질서에 따라서 움직여야만 하는 기계적 인간으로 본 것이고,
반대로 불확정적이라고 보는 자들은 인간의 자율의지에 의해 자연질서를 바꿀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자연주의는 18세기로부터 20세기말인 오늘에 이르기까지 굉장한 힘을 가지고 과학발전과 함께 현대문명을 장악하고 있다.
다음은,
사물의 실제나 진리는 물론 보편적인 표준마저도 일체 무시하거나 부정하는 허무주의(nihilism)는 자연주의로부터 자연스럽게 파생된 것인데 허무주의자들은 모든 것은 우연한 것이기 때문에 무의미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연이란 비이성적인 것이기 때문에 의미부여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우연한 사건은 이유나 의미 또는 목적을 가질 수가 없다.
이와 같은 허무주의가 자연주의로부터 자연스럽게 파생되게 된 까닭은 여러가지가 있겠으나 자연주의에서 인간에게 의미있는 행동을 하기 위한 근거를 제시해 주지 못한데 있으며 우주존재의 목적제시를 해주지 못한데 있는 것이다.
자연주의적 입장에서 본다면 우주가 존재하는 의미나 목적을 가지려면 우주의 한 부속품인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야만 한다.
그런데 여기서 또 문제가 되는 것은 이렇게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낸 의미나 목적에 의한 가치판단은 누가 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당연히 인간 스스로가 할 수 밖에 없고 그것도 인간 개개인이 각자 나름대로 가치판단을 기준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따라서 절대치의 가치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이와 같은 우주는 일치체가 아닌 집합체에 불과한 것이 된다.
그래서 자연주의로부터 허무주의가 자연스럽게 파생될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그 다음은,
생존을 주제로 하고 또 그것을 자기 문제로 삼아 나아가려는 경향이나 주장을 하는 실존주의(existentialism)자들은 허무주의를 초월하기 위해 새로운 세계관을 제시하였다.
그런데 실존주의자들 중에는 자연주의에서 기생한 무신론적 실존주의자가 있고 유신론에서 기생한 유신론적 실존주의가 있다.
무신론적 실존주의는 인간의 본질과 우주와의 관계에 대한 문제만을 제외하고는 자연주의의 주장에 의견을 같이 한다.
인간의 본질과 우주와의 관계에 있어서 무신론적 실존주의의 주장은 우주는 단지 물질로만 구성되었는데 인간에게는 실재가 주관과 객관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주관적 실재는 정신, 의식, 인식, 자유, 안정 등의 주관세계(subjective World)를 말하고 객관적 실재는 물질, 불변의 법칙, 인과율, 시간, 기계장치 등의 객관세계(objective World)를 말한다.
그래서 인간은 우주가운데 의식과 자기 결정력이 있는 존재로서 의미와 가치를 부여 할 수 있다고 한다.
유신론적 실존주의는 앞에서 언급한 유신론의 대부분의 주장들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출발전으로 하지 아니하고 인격적 존재인 인간의 의식에서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존재 여부는 이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믿음에 의해서 해결되는 난제라고 한다.
이것이 유신론과의 가장 중요한 차이점이다.
이같은 차이점은 유신론적 실존주의자들이 기적이란 불가능한 것이며 성경은 역사적으로 믿을 수 있는 것이 못된다고 하는 전제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동양에서 범람하는 범신론(pantheism)적 일신론이다.
이 사상은 서양사상의 혼미와 방황을 끝내려는 현대인들의 노력으로부터 관심이 쏠리고 있는 동양적 특유의 사상이다.
범신론적일신론(범일론 또는 만유신론)은 신이 곧 만유이며 만유는 곧 신이어서 우주 밖에 신이 따로 있지 않다는 주장으로부터 출발한다.
따라서 모두는 합일된 유일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실재에도 현상적 계서제라는 것이 있어서 실재인 유일자와 합일이 되는데는 광물, 식물, 동물, 인간 등의 순서로 서열이 정해져 있는데 그중 제일로 가까운 인간에게 있어서도 별도의 계서제가 적용이 된다는 주장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유일자인 실재와 완전 합일이 이루어지면 무한한 비인격적 존재 즉 무아경에 이른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유일자와 합일을 이루는 방법으로는 교리가 아닌 기술에 있다고 보고 인격, 지식, 선악, 시간 등을 초월하는 것이 유일자와의 합일을 체험하는 것이라고 한다.
지금까지 세계의 구성에 대한 일반적인 철학적, 종교적 견해들을 대략 살펴보았다.
(이 부분의 내용은 제임스 사이어가 저술하고 김헌수가 옮긴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사상을 참고한 것임)
결론은 성경적 기독교의 견해와는 원리나 방법적인 면에서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이신론의 경우는 기독교의 내재신은 부정하고 초월신만을 강조하고, 자연주의는 기독교의 유신론을 반대하여 무신론에 기초하며, 허무주의는 기독교의 우주에 대한 근원과 의미와 목적을 송두리채 무시하고 우주를 허무로 돌려버리고, 실존주의는 무신론적 실존주의나 유신론적 실존주의 모두가 한결같이 기독교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지 아니하고 인간으로부터 출발하며, 범신론적 일신론은 기독교의 창조주 하나님이 아닌 우주의 모든 존재자체를 하나님으로 규정하고 있는 점이다.
성경적 기독교의 세계관에 있어서 세계의 구성은 어디까지나 영원자존자이신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섭리에 따라 창조 보존되고 만사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섭리로 이루어진다.
2) 유한적 성질을 가진 세계이다.
계 21:1 ~ 4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성경적인 기독교 세계관에 있어서 독특한 성질을 하나 꼽으라면 세계의 유한성을 꼽지 않을 수 없다.
앞서 여러가지 다양한 세계관에 대하여 살펴 보았지만 대부분은 세계의 종말에 대하여 언급하기를 회피하거나 세계의 계속적인 유지를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성경은 첫 머리에 있는 창세기에서 세계의 시작을 알려주고 맨 마지막에 있는 요한 계시록에서 세계의 종말을 예고해 주고 있다.
하나님의 창조사역은 종말을 전제한 태초라는 시간의 출발과 함께 시작이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창조세계는 반드시 시간의 종결과 함께 끝을 맺게 된다.
이에 관해서는 앞서 기독교 역사관을 거론할 때 조금은 상세히 취급한 바 있다.
역사관의 원리 가운데 종결적인 원리로서 역사는 종말론적이라는 제목아래서 취급이 되었다.
역사의 종말은 세계와 인간의 종말이 모두 함께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세계와 인간이 존재하는 한, 역사는 계속 진행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독교 세계관에 있어서 세계란 유한적인 성질을 가진 것으로 보기 때문에 우주도 인간도 역사도 모두가 유한적인 것이다.
성경적 기독교가 세계관에 있어서 세계를 유한적인 것으로 보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그것은 세계라는 개념을 현세와 내세로 구분해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개념은 오직 기독교 세계관의 특유물이다.
현세는 피조세계를 말하고 내세는 영원세계를 말한다.
내세라는 말의 뜻으로 보면 오는 세상을 말한다고도 할 수 있으나 그것은 현세에서의 시간개념을 첨가한 이해개념이고 본래는 영원자존한 세계라는 개념으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영원세계는 영원부터 자존해서 영존하는 세계를 말한다.
그와 반면에 피조세계는 영원세계에서 영원자존하시는 하나님에 의해 시간과 공간과 형상(물질)적인 것으로 창조되어진 세계를 말한다.
그러므로 피조세계와 영원세계는 이원론적 구별이 아니라 일원론적 구별인 것이다.
피조세계란 어디까지나 영원한 것은 아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지만 보이지 않은 것은 영원한 것이다.(고후 4:18)
알고 보면, 피조세계는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잠깐 자신을 계시하신 계시세계일 뿐이다.
따라서 시간도 유한하고 공간도 유한하며 물질 역시 유한한 것이다.
유한세계는 영원세계에 비하면 밤의 한 경점에 불과한 것이다.(시 90:4)
다시 수학적으로 계산한다면, 피조세계의 유한성과 영원세계의 무한성을 비율로 계산할 때 Ω:0,000.....으로 계산될 수 밖에 없다.
기독교 세계관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피조세계는 물질이 구성되므로 공간이 이루어지고 공간과 함께 시간이 형성되게 된다.
그런데 물질의 최소 기본단위는 소립자 또는 쿼크(Quark)라는 입자인데 이 입자 역시 궁극의 입자라는 보장이 없다.
현재 비교적 덩치가 큰 원자는 특수한 장치(STM)로 볼 수 있으나 아원자 차원의 모든 소립자는 볼 수도 만질 수도 느낄 수도 없어 단지 그 흔적(구름상자)만 추적할 따름이다.
이와 같은 작은 입자들이 모여서 물질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없는 것이나 다름 없는 입자들이 밀고 당기는 힘에 의하여 응집이 되면 하나의 커다란 물체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전능하신 하나님에 의해 아무것도 없는 데서 물질과 공간과 시간으로 구성된 세계가 창조되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창조된 물질과 공간과 시간으로 이루어진 피조세계는 영원할 수는 없는 것이며 영원할 수 없는 세계는 당연히 종말이 있을 수 밖에 없다.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로 시작된 세계는 종말이 전제된 세계임을 알 수 있다.
세계가 종말론적인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창조라는 말은 없는 데서 있게 만드신 것을 말한다.
그러나 좀더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영원 안에서 형상, 공간, 시간적인 것으로 만드셨다는 뜻도 된다.
영원은 시간과 공간과 형상(물질)을 초월한 상태를 말하는데, 생각해 보면 영원은 시간과 공간과 형상적인 피조세계에서 볼 때는 없는 것과 같다.
그와는 반대로 피조세계를 영원세계에서 볼 때에는 없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여기에서 참으로 존재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은 분명해진다.
그것은 있고 없다는 판단 기준이 영원 자존하시는 하나님께만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참으로 존재하는 것은 영원한 것일 뿐이다.
참으로 존재하는 것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며 바로 그 자체가 시작도 되고 끝도 되는 것이다.(계 22:13)
그러나 참으로 존재하지 않은 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시작과 끝이 따로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시간과 공간과 형상을 초월할 수 없는 피조세계는 아무리 오래 지속이 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영원한 존재는 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분명한 시작이 하나님의 창조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즉 시작이 있는 세계는 영원한 세계가 아니며 영원한 세계는 시작도 끝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세계관에서의 세계는 종말론적임이 분명한 것이다.
피조세계가 종말론적인 또 하나의 이유는, 피조세계의 창조가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데 있다.
언제나 계획은 목적을 수반한다.
하나님의 목적을 수반한 계획이 창조로 시작이 되었다면 종말로 완성시키는 것은 분명하다.
목적을 수반한 계획을 창조로 시작하셨다는 것은 그 계획 자체가 시간 속에서 완성시킬 계획이라는 증거가 된다.
그러므로 그 계획된 목적은 시간 속에서 완성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목적이 달성되면 피조세계의 종말은 반드시 있어야하며 또 있도록 하나님의 계획속에 포함이 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계획된 목적을 이루시는 방법을 크게 세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그것은 첫째가 세계창조이며 둘째는 세계보존이며 셋째가 세계종말이다.
즉 하나님께서 세계를 시작하시고 진행하시고 끝을 맺으심으로 목적을 달성 하신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피조세계를 창조섭리로 시작하시고 보존섭리로 존속시키며 종말섭리로 끝을 맺으시는 목적에 대하여는 다음 항에서 자세히 취급하게 된다.
여기서는 다만 세계의 유한적 성질에 대해서만 거론하기 위해서 목적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뒤로 미루기로 한다.
여기서 말하는 목적은 피조세계를 통하여 이루실 목적을 말한다.
이 목적은 영원세계에 이르는 목적과 밀접하게 연결이 되게 되지만 일단은 피조세계의 종말과 함께 완전히 달성이 되는 목적이다.
지금까지 유한성을 가진 세계의 성질에 대하여 그 정당성을 논증했다.
우선 기독교 세계관에 있어서의 세계라는 개념이 영원세계와 피조세계로 구분해서 영원세계를 전제한 피조세계 개념으로 정리된다는 것과,
피조세계의 창조라는 개념이 종말을 전제한 것이라는 것과,
피조세계의 창조가 하나님의 목적이 수반된 계획실현의 출발로서 목적완성이 수반되는 피조세계의 종말이 전제된 하나님의 섭리라는 점을 들어서 피조세계의 유한성에 대하여 그 정당성을 논증하였다.
따라서 기독교 세계관에 있어서의 세계는 유한적인 성질을 가진 것임이 확증된다.
2. 세계의 가치와 목적
시 145:9 ~ 13
"여호와께서는 만유를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 여호와여, 주의 지으신 모든 것이 주께 감사하며 주의 성도가 주를 송축하리이다. 저희가 주의 나라의 영광을 말하며 주의 능을 일러서 주의 능하신 일과 주의 나라의 위엄의 영광을 인생에게 알게 하리이다. 주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니 주의 통치는 대대에 이르리이다"
성경적인 기독교 세계관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세계의 가치와 목적을 알아보는 것은 빼어 놓을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계의 가치와 목적은 세계관 정립에 결정적인 역활을 할 뿐만 아니라 세계관의 성격을 좌우하는 매우 중요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다양한 세계관들에 있어서는 세계의 가치와 목적이 다양하기도 하고 또는 희미하기도 하며 어떤 경우는 언급마저도 회피하거나 없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그것도 그럴것이 세계존재의 근본에 대한 관념자체가 다양하거나 희미하고 언급을 회피하거나 없다고 하기 때문이다.
세계에 대한 정확한 인식은 세계의 근본과 실재와 결과 또는 시작과 과정과 결말을 종합적으로 인식할 때만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의 근본이나 시작을 모른다거나 어느것 하나라도 모르는 상태에서는 정확한 세계에 대한 인식은 불가능할 수 밖에 없다.
세계의 근본이나 시작에 대한 정확한 인식은 세계의 실재나 과정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가능하게 할 뿐만 아니라 결과나 결말에 대한 정확한 인식도 가능하도록 해 주는 것이다.
그런데 일반적인 여러 형태의 세계관은 대부분이 세계의 근본과 시작은 물론 결과와 결말에 대하여는 흐리거나 회피해 버리고 다만 실재와 과정 부분만을 집중적으로 언급하기 때문에 모두가 제나름의 주장이 나오게 될 뿐이다.
1) 세계는 계시로서의 가치가 있다.
신 4:32 ~ 35
"네가 있기 전 하나님이 사람을 세상에 창조하신 날부터 지금까지 지나간 날을 상고하여 보라 !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이런 큰 일이 있었느냐 ? 이런 일을 들은 적이 있었느냐 ? 어떤 국민이 불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너처럼 듣고 생존하였었느냐 ? 어떤 신이 와서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전쟁과 강한 손과 편 팔과 크게 두려운 일로 한 민족을 다른 민족에게서 인도하여 낸 일이 있느냐 ? 이는 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의 목전에서 행하신 일이라. 이것을 네게 나타내심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네게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세계는 절대의지자이신 하나님의 작정계획에 의하여 창조되고 보존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는 반드시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그 의미는 반드시 가치를 수반하게 된다.
그러므로 의미가 있는 것은 반드시 가치로운 것이다.
세계의 가치란 무엇일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절대자이신 하나님께서 세계를 창조하시고 보존하실려고 의지로 작정하신 세계는 어떠한 의미가 있는가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작정하신대로 창조하시고 보존하시는 세계는 반드시 의미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능력과 영광을 나타내시는 계시로서의 아주 중요한 근본적인 의미이다.
물론 이외에도 다양한 의미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계시로서의 근본적인 의미 외에는 모두가 간접적인 의미는 될 수 있으나 직접적인 근본 의미는 아닌 것이다.
성경적 기독교는 계시를 크게 두가지로 구분한다.
하나는 일반계시이고 또 하나는 특별계시이다.
이에 관하여는 이미 성경관에서 언급된 바 있다.
그런데 피조세계에서 일어나는 온갖 모든 것을 포함하는 세계는 일반계시와 특별계시 사건들을 모두 포함하는 세계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일반계시도 피조세계를 통하여 하시고, 특별계시 역시도 피조세계를 통하여 하시기 때문이다.
일반계시는 물론이지만 특별계시의 기록문서인 성경의 내용 역시 모두가 피조세계에서 이루어진 것들이다.
따라서 일반계시와 특별계시의 사건이 포함된 세계는 근본적으로 계시로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기독교 세계관에 있어서, 세계가 가지고 있는 계시로서의 의미는 세계의 가치를 확실하게 해준다.
따라서 세계의 가치는 계시로서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
세계는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신 계시 도구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유일의 방법은 계시의 도구인 세계를 바로 아는 데 있다.
이와 같은 계시의 도구인 세계를 바로 알게되면 결과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지식을 얻어 경외하게 되고 따라서 올바른 기독교 세계관 정립이 가능하게 되는데,
문제는 어떻게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신 도구로서의 세계에 대한 지식을 올바르게 얻을 수 있는가에 있다.
이 문제는 반드시 해결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 문제의 해결은 성경적인 기독교 세계관 정립의 열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문제의 해답은 이미 기독교 성경관을 거론할 때 해결되고 확정된 사실이다.
논리의 흐름에 따라 다시 한번 그 인식방법에 대하여 언급을 하면,
일반계시와 특별계시 사건과 사물로 가득 채워진 세계에 대한 올바른 지식은 특별계시로부터 접근을 시도해야 한다.
그 이유는 인간은 타락해서 일반계시를 통해서는 진정한 지식이 전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특별계시를 주신 이유도 역시 그러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특별계시인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지식을 얻게 되면 그 신지식은 일반계시에 대한 지식은 물론 세계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수반하게 되는 것이다.
특별계시인 성경은 내용 자체에 의하여 분명한 진리임이 확증이 되고 일반계시에 의해 실증이 되어 하나님과 세계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충분히 가능하게 한다.
그런데 하나님과 세계에 대한 지식은 서로 상관관계를 가지는데 하나님을 모르면 세계를 알 수 없고 세계를 모르면 하나님도 모른다는 증거가 된다.
그러므로 만일 과학으로써 세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가능하게만 된다면 반드시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동반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특별계시인 성경과 과학은 참 진리를 찾아가는 두개의 통로인데, 성경이 하나님으로부터 닦아온 통로라면, 과학은 인간으로부터 닦아가고 있는 통로라고 할 수 있다.
둘 중에 어느 통로가 확실하고 찾기 쉬운 통로인가는 너무도 분명하다.
하나님을 알고 세계를 알 수 있는 계시로서의 의미를 담고 있는 세계는 참으로 얼마나 가치로운 것인가?
인간이 하나님도 모르고 세계도 알 수 없다면 인간 자신의 근원은 물론, 생존 과정에서의 의미도 모르고 가치도 모르고 목적도 없이 만사를 체념하고 허무한 인생을 살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인간의 이 비참함을 무엇에 비길 수 있겠는가?
그러나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에게 특별계시를 세계속에 허락하셔서 하나님을 알며 인간 자신의 근본과 생존 과정에서의 의미와 가치를 알고 영원한 나라를 소망하며 살게 하셨으니 피조세계가 가지고 있는 계시로서의 가치를 무엇에 비길 수 있으랴.
2) 하나님 영광선포에 목적이 있다.
시 19:1 ~ 6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해는 그 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 온기에서 피하여 숨은 자 없도다"
세계의 가치에 대한 내용이 세계와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설명이라면,
세계의 목적에 대한 내용은 세계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설명이 되겠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세계에 대한 분명한 목적을 의도하셨으므로 인간에게 있어서의 세계는 가치로운 것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세계에 대한 분명한 목적을 의도하시지도 않았는데 인간에게 세계가 가치로운 것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치는 어디까지나 목적에 수반이 되고 목적의 가치비중에 따라 그 비중도 결정이 되는 것이다.
기독교 세계관에 있어서 세계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선포에 있다.
영원자존하신 하나님께서 무슨 목적으로 세계를 창조하셨는가?
이 질문은 기독교 세계관에 있어서 가장 근본이 되는 질문이며 세계관 정립에 절대적인 열쇠를 가지고 있는 질문이다.
이와 같은 질문은 일반적인 세계관에서는 대답이 불가능하다는 전제 아래 다양한 견해를 펴고 있다.
이신론자들은 하나님이 세계를 떠나 버렸다고 함으로써 창조주 하나님께서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에 대해서는 언급해야 할 이유를 제거해 버린다.
그리고 인간 역시 우주의 한 부속품으로서 인간 편에서의 세계에 대한 목적부여의 기회도 주지 않는다.
자연주의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물질을 영원한 존재로 생각하면서 세계의 목적을 부인한다.
허무주의는 그 자체가 세계의 의미나 가치 또는 목적을 부정하는 것이므로 더 말할 것도 없다.
실존주의 가운데 무실론적 실존주의는 역시 신의 존재를 거부함으로써 세계에 대한 신적인 목적은 생각조차 할 필요가 없게 되었고 다만 인간적인 목적은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유신론적 실존주의는 하나님으로 출발점을 삼고 있지 않기 때문에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은 자연히 회피되고 만다.
범신론적 일신론 즉 범일론에서는 역시 창조주 하나님을 부인하고 유일 무한한 비인격적인 궁극적 실재를 신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세계에 목적은 생각할 필요조차 없게 된다.
이와 같이 몇 개의 대부분의 세계관들이 세계의 목적 자체를 거론하지도 아니하고 거론할 필요성도 가지지 못하고 있다.
목적없는 세계에 의미가 가능하며 의미없는 세계에 가치가 있을 수 있겠는가?
설령 인간 자신들이 의미나 가치 또는 목적을 창출해 낸다 하더라도 그것이 참된 의미나 가치 또는 목적이 될 수 있는 것일까?
그러므로 일반적인 세계관에 있어서의 세계는 목적없는 방황을 계속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주인을 잃어버린 세계는 주인이 나타날 때까지 방황은 계속되어질 것이다.
기독교 세계관에 있어서의 세계의 목적은 너무도 분명하다.
그 목적은 곧 전능자 하나님의 영광선포라고 했다.
그러면 영광선포라는 구체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영광선포가 세계의 목적이 될만한 가치는 있는 것일까? 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으로 결론을 맺고자 한다.
하나님의 영광선포라는 말은 하나님께는 전능성과 성실성과 주권성과 영원성과 자비성 등의 영광을 가지고 계신다.
그런데 이 모든 영광을 세계창조와 세계보존과 세계종말이라는 섭리를 통하여 선포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없는 데서 세계가 존재하도록 창조하심으로 하나님 자신의 전능성의 영광을 선포하시며,
영원전 작정섭리대로 창조하셔서 주관해 가심으로 하나님 자신의 주권성의 영광을 선포하시고,
인간에게 약속하고 약속대로 성취해 주심으로 하나님 자신의 성실성의 영광을 선포하시며,
피조된 세계의 종말을 맺으시고 영원한 세계를 주관 섭리하시므로 하나님 자신의 영원성의 영광을 선포하시고,
영원 안에서 사랑과 은혜로 선택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셔서 영원토록 사랑하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심으로 자비성의 영광을 선포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선포는 피조세계나 영원세계 모두의 궁극적인 목적인 것이다.
이 목적이야말로 참으로 영원한 가치를 지닌 목적이 아닌가?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고 6일동안 만물을 창조하시면서 거의 매일같이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창조를 보시기에 좋으신대로 하신 것 같이 보존섭리도 하나님 자신의 창세전에 작정해 놓으신 좋으신 뜻대로 섭리하시며 세계종말 역시도 그의 좋으신 뜻대로 섭리 하시는 것이다.
즉 모든 세계를 하나님 자신의 작정하신 좋으신 뜻을 따라 창조하시고 보존하시고 종결을 맺으신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좋으신 이유는 두말 할 것도 없이 하나님 자신의 모든 영광이 선포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선포는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이 곧 궁극적인 "선" 인 것이다.
즉 "최고선" 을 말한다.
이 최고선이야 말로 최고의 값을 가진 것이다.
즉 바꾸어 말하면 최고선은 궁극적 선을 말하고 궁극적인 선은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작정된 뜻을 따라 창조되고 보존되며 종결이 되는 피조세계에 대한 섭리이고 피조세계의 섭리는 하나님의 영광선포의 한 방편이시다.
따라서 세계의 목적 즉 영원세계나 피조세계 모두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선포에 있는 것이다.
롬 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계 22:20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출처 : 하나님(Logos)의 존재와 속성을 아십니까
글쓴이 : 찬바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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