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스크랩]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눅 9:23-24)

김믿소사 2007. 6. 7. 20:55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눅 9:23-24)

 

성경을 읽어보면 예수 믿는 사람이 꼭 해야 할 일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눅9장 23절 말씀입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가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예수 믿는 사람은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의 어깨에 십자가가 놓여 있는지 한 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어깨에 백 근 짜리, 이백 근 짜리 십자가가 달려있다고 말합니다. 사업의 십자가, 자식의 십자가, 건강의 십자가 이루 말할 수 없이 무거운 십자가가 달려있다고 말합니다. 또 어떤 이는 하나만이 아니라 여러 개의 십자가를 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예수님과의 관계에서만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 이전에도 십자가는 있었습니다. 로마제국의 반란자들 정치범들을 처형하던 형틀이 바로 십자가였습니다. 인류가 고안한 많은 형틀 중에 가장 비참한 사형제도가 바로 십자가처형입니다. 손과 발에 못을 박아 이틀이고 사흘이고 십자가에 매달아 스스로 지쳐 죽게 하는 것입니다. 로마 제국에 반대하는 사람에게 주었던 사형제도였습니다. 사실 로마 제국에서 보면 예수님은 로마제국의 정치적인 반란자였습니다. 예수님을 못박은 십자가 위에 죄패, 예수님의 죄명이 적혀 있었습니다. 마가복음 15장 26절에 보면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여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실 십자가 양편의 강도는 로마제국에 반대하던 정치범이었습니다. 당시의 강도는 정치범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자신이 지셨던 십자가를 져야한다고 말씀하신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역사적으로 보면 예수님의 이 말씀에 따라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를 진 영광스러운 순교자들이 있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에 스스로 자결한 가룟 유다와 요한 두 사람만이 순교당하지 않고 열 사람이 다 순교를 당했다고 합니다.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서, 야고보는 목이 톱으로 썰려서 죽었으며, 나이 어린 제자 도마는 돌을 맞아 죽었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도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를 지고 순교의 길을 갔습니다. 이런 예수님이 지셨던 십자가 제자들이 지었던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순교는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특별히 허락하신 사람에게 주시는 축복이 순교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이 무엇인지 저는 목사가 된 한참 후에야 알았습니다. 제가 어려서부터 예수를 믿었으니까 십자가를 지고 내가 주를 따라가리라 찬송도 불렀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한다는 말씀도 배웠고, 신학교에서 여러 이론도 배웠지만 십자가가 진정으로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70년 초에 민주화운동을 하면서 감옥에 가서야 십자가의 의미를 알았습니다. 감옥에 가면 죄수들에게 하루에 10분 정도 사형장 앞의 뜰로 운동을 나갑니다. 을씨년스럽기 그지없습니다. 그 사형장 앞뜰에서 저는 ‘예수님이 여기 와서 죽음을 당하셨구나. 그렇다면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여기 사형장까지 와서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구나.’ 그때서야 십자가를 진다는 것의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제 마음에 큰 충격이 왔습니다. ‘그동안 아무 것도 모르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했는데 만약 하나님께서 제 기도를 들으셨다면 여기서 죽어야 하는 것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때부터 하나님께 ‘그동안 철없이 아무것도 모르고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른다고 기도하고 찬송했습니다. 그거 다 듣지 마시고 감옥까지는 오겠지만 이 사형장 앞에까지는 따라가지 않게 해주십시오.’ 라고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그 뒤로부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부분이 나오면 저는 우물우물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그 후 1980년에 제가 정말 예수님이 지셨던 십자가를 질 뻔한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중앙정보부에 김대중내란 음모사건에 연루되어서 정보부에 잡혀가서 두 달 동안 정보부 지하실에서 온갖 고문을 당하고 조사를 받았는데 그때 이렇게 죽는구나 하는 생각에 임종기도까지 했습니다. 제가 이 두세 달 동안 찬송가 398장 주 예수 우리 구하려 라는 찬송을 수천 번도 더 불렀습니다. 지금도 잊지 못하는 찬송입니다.

주 예수 우리 구하려 큰 싸움 하시니 주 십자가를 따라서 나갈 자 누구랴

큰 환난 핍박당하고 또 고통 받으나 제 십자가를 지고서 늘 참는 이로다

주 예수 고난 당할 때 저 원수 위하여 죄 용서함을 빎같이 또 빌자 누구랴

저 순교자가 죽을 때 그 원수 사하고 제 영혼 부탁했으니 주 따른 이로다

저 택함받은 사도들 주 성령 받은 후 큰 환난 고통 당할 때 다 참고 이겼네

그 험한 고개 넘어서서 천성 갔으니 주 예수 믿는 우리도 본받게 하소서 아멘

저는 이 찬송을 부르면서 그 힘들고 어려운 고난의 순간순간들을 이겨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하나님은 저에게 순교의 기회를 주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사람이 오래 산다고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때는 죽는 것이 무섭고 두려워 살게 해달라고 했지만 그때 죽었다면 영광스러운 삶이었을 것입니다. 오래 사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 어떻게 죽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사람에게 순교의 기회를 주십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죽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면 하나님의 은혜인줄 알고 축복인지 알고 마다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 모두가 베드로처럼 바울처럼 예수를 믿어야 한다면 우리 중에 많은 사람이 그럴 엄두를 내지 못할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에 대한 대답이 나와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처럼 주님이 지셨던 십자가를 질 것을 엄두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말씀 같습니다. 눅가복음 9장 23절 말씀입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여기에는 재미있는 단어가 두 가지 나옵니다. 하나는 날마다입니다. 단 번에 십자가를 지고 죽으라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우리가 수명이 다 하는 날까지 십자가를 지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듣고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두 번째는 제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지셨던 십자가, 베드로가 졌던 십자가, 바울이 졌던 십자가가 아니어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예수를 믿는 사람은 아무든지 이 십자가는 꼭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마저 피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져야할 십자가는 어떤 십자가일까요? 십자가는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한 사랑의 표시입니다. 이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져야 할 최소한의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지신 십자가의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은혜에 감사하는 십자가는 져야 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버린 예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으로서 그 은혜에 감사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보답하는 일이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셨는데 우리는 아무 일도 안하고 아무것도 손해 보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모른 척 해서는 안 됩니다. 그 은혜를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혹시 우리의 생명을 살려준 생명의 은인이 있는데 우리가 그에게 감사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인간도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도 우리에게 똑같은 말씀을 하실지도 모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고난의 흔적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은혜를 생각한다면 예수님을 위해서 우리 삶의 무엇인가를 베어내야 합니다. 시간이든 삶이든 물질이든 그 어느 것을 베어낸 상처를 지내고 살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도 그 상처가 예수님 때문에 생긴 상처라는 것을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손해 본 것, 예수님 때문에 희생한 것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 져야할 최소한의 십자가라 할 것입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한 죽음이었습니다. 성경에서 보는 대로 예수님은 서른세 살 참으로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할 일이 많은데 그 인생이 꺾였습니다. 예수님은 최고의 주목을 받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가는 곳마다 대단한 이적이 일어났으며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 수천 명의 사람이 모였습니다. 평생을 생명을 걸고 예수님을 따랐던 열두 명의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재정적으로 후원하는 후원자도 있습니다. 한참 뻗어가던 잘나가던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자신의 삶을 희생한 것입니다. 바로 우리들을 위해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우리는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삽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우리가 하던 일을 중단하거나, 시간을 쓰거나, 내가 필요한 것을 양보하지 못합니다.

성경에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은 장사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장사하는 사람은 시간이 돈입니다. 그런데 강도만난 사람을 만난 이 사마리아 사람은 자신이 가던 길을 멈추어 섰습니다. 할 일이 없어서 멈추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었기에 멈추어 선 것입니다. 자기가 타던 나귀를 그 사람에게 주었습니다. 자신에게 필요한 포도주와 기름을 그 사람을 위해서 사용했습니다. 주막집에 자신의 돈을 주었습니다. 그 강도 만난 사람을 만나 보살피지 않았다면 이 사마리아 사람은 자기의 길을 갔을 텐데 멈추어 선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의 삶이 이래야 합니다. 내가 할 일일 없어서가 아니라 내가 할 일이 있고 바쁘지만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기 때문에 멈추어서는 것입니다. 양보와 희생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필요하지만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주위에서 우리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식이나 부모, 형제 어떤 때는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있으면 멈출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인생을 방해하고 힘들게 하는 사람이지만 그런 사람을 보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것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필요한 때에 멈추어 설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지어야 할 십자가입니다.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이 말씀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예수님처럼, 베드로처럼, 바울처럼은 살 수 없지만 날마다 사는 동안 피하지 말고 그것만이라도 지고 예수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귀한 말씀인지 이 말씀이 여러분의 삶에 큰 은혜가 되시길 바랍니다.

출처 : 낙송의 집
글쓴이 : 낙송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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