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영과 육에 대한
고찰
Ⅰ. 시작하는 말
예수의 영과 육에 대한 논의와 논란은 예수님이 이땅에 오신 이후 지금까지 끊이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이렇게 이
문제가 논의와 논란이 되는 것은 기독교에 있어서 이 문제는 그 만큼 중요하다는 뜻도 된다.
예수의 영과 육에 대한 논의와 논란을 통해
교리화 된 내용들이 기독교 전반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예수의 영과 육에 대한 문제는 기독론에 있어서 핵심적 위치를 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예수의 영과 육의 문제는 단편적인 이 문제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의 핵심적인 주제들인 성경관과 신관 그리고
역사관 등의 문제들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렇게 이 문제는 그 자체에 대한 부분적인 정리나 결론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기독교의 중요한 진리들과 맞물려 있기 때문에,
주제의 흥미진진함을 넘어 신앙생활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문제로
생각된다.
이에 비록 이 문제가 아주 방대하게 논의될 수 있고 또한 예민한 문제로 생각되기는 하나,
이 글에서는 문제 제기와 연구
차원에 의의를 두고 고찰해 보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기독교는 구속(救贖)의 종교라고 많이 알려져 있고 이에 대하여 반론이나 문제
제기가 거의 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여기서 기독교가 구속의 종교가 아니라는 논리를 펴거나 주장을 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단지
기독교의 핵심적인 교리나 표지가 구속으로 일반화 되기에는 큰 문제점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구속은 하나님이 자기를
보여주고 드러내는 하나의 방법 내지 방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것과 결부되어 과연 예수님은 인간의 구속을 최대의 목적으로 하여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겠는가?
구속을 최대의 목적으로 삼아 오셨다면 자연히 예수님의 영과 육의 문제도 그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논의되고
정리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기독론에 관한 전통적 교의의 결론이 "한 인격 안에 참되고 바른 신성과 인성이 확실히 구별되는 가운데
연합되어 있다" 라는 식으로 참으로 모호하게 내려져 있다.
이러한 결론은 근본적으로 성경관과 성경의 중심주제에 대한 오해로부터 말미암은
것으로 생각된다.
예수의 영과 육의 문제는 기독교를 계시의 종교로 인식되게 할 수도 있고 아니면 구속의 종교 더 나아가 도덕
종교로까지 인식되게 할 수 있는 중요한 하나의 길잡이 근거가 된다고 보여진다.
왜 기독교가 일반적으로 도덕 종교로 많이 인식되고 또한 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는가?
이 주제는 위와 같은 심각한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
전통적으로 한번 교리화되어 버린 것에 대한 문제
제기는 그리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었다.
그러나 아무리 오래된 교리라 할지라도 오래되었다는 것 자체만으로 그 가치성이 인정받는다는 것은
타당하지 못하며 비성경적이다.
이 글에서는 전통적인 교리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 제기의 일환으로 예수의 영과 육의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먼저 예수의 영과 육의 문제에 대한 전통적 관념이 어떠한지 간략하게 역사적인 순서로 살펴본다.
그 다음에 성경신학적인
성경관의 원리와 구체적인 성경의 증거를 들어 이 주제를 다루어 보고자 한다.
예수의 영과 육으로 나누어 고찰하는 목적이 예수의 영과
예수의 육 그 자체를 따로따로 연구하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영과 육의 분석과 그 관계를 종합적으로 살펴봄으로 기독교의 성경관이
구속사 관점인가 아니면 언약사적 관점인가를 확인하는데 그 의의가 있다.
왜냐하면 의미있는 분석은 종합하기 위해서이며 종합하는 의미는 잘
분석하려는데 있기 때문이다.
이 주제는 단순히 정보수집적 차원의 문제로 남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의 성경관으로부터 문제가 제기되어
성도의 신앙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고 생각된다.
Ⅱ. 예수의 영과
육에 대한 전통적 관념
앞에서 언급했듯이 예수님이 오신 이후 지금까지 오랜 기간을 통하여 예수의 영과 육에 대하여
이미 아주 보편적인 교의가 확립되어 있다.
그것이 바로 이 글에서 말하는 전통적 관념이며 전통적 교의이다.
예수의 영과 육에 관련된
전통적이고 보편적인 교의가 어떠한 것인가에 대하여 신빙성과 실감성을 느끼도록 하기 위해 여기서는 사전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여
옮긴다.
기독교문사에서 16권으로 출판된 기독교 대백과사전의 핵심적 사상과 내용을 축소시켜 단권으로 출판한 기독교
백과사전(기독교문사, 1994)의 기독론(174 175쪽)의 내용을 아래에 인용한다.
기독론의 중심 논제는 그리스도의 인격에 있어서
신성과 인성의 결합 관계에 관한 것이다.
성경에 근거한 기독론의 정통적 교의는 '한 인격 안에 참되고 바른 신성과 인성이 확실히 구별된
가운데 연합되어 있다는 것' 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통적 교의가 확립될 때까지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가장 초기에 육체를
무시하는 헬라의 인간관에 근거해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이 실재가 아니라 외견상이라는 가현설이 등장했고, 한편으로 유대사상에 근거해
그리스도의 신성을 삭감시키고 인성을 고집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신격화된 인간이라고 주장한 에비온주의가 나타났다.
이런 가운데 그리스도의
신성과 선재성을 명확하게 한 사람은 사도교부인 이그나티우스였고,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말씀의 성육신으로 생각한 사람은 이레니우스였다.
그리고
유스티아누스는 로고스기독론을 제창했다.
3세기에 들어와 오리겐은 아버지로부터의 아들의 출생을 '영원한 출생'으로 봄으로써 시간적 시작을
의미하는 출생이라는 말의 한계를 극복했다.
따라서 아들은 아버지에게 종속적이기는 하지만 영원자이신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터툴리안은 삼위일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하면서 삼위일체론과 관련해 기독론을 전개했고 그리스도의 무죄성을 구속론적으로
설명했으며, 인격과 본질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이로 인해 결국 성자의 인격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본격적인 기독론
논쟁은 4세기에 아리우스의 출현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그리스도가 아들이기 때문에 태어나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따라서 선재했을지라도
피조물이며 하나님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니케아공의회(325)는 아들인 그리스도는 아버지인 하나님과 "본질을 같이한다" 라고
주장한 아타나시우스의 주장을 채택하고 아리우스주의를 정죄했다.
그러나 여전히 신성과 인성의 상호관계에 대한 문제는 남아
있었다.
4세기 말경 아폴리나리우스는 아리우스에 반대하고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을 강조하기 위해 예수의 육체와 혼은 인간이었으나
이성적인 영은 하나님의 로고스로 대체되었다고 주장함으로써 그리스도는 완전한 인간이 아니라 기껏해야 3분의 2만이 인간이 되는 학설을
내세웠다.
그러나 제1차 콘스탄티 노플공의회(381)는 그를 정죄했다.
5세기에 들어와 네스토리우스는 아폴리나리우스에 대한
반동으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구별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한 인격에서의 통일성을 위태롭게 하였고, 결국 에베소공의회(431)에서
정죄되었다.
반면 유티케스는 네스토리우스에 대한 반동으로 양성의 통일성과 혼합을 주장함으로써 인성의 고유성을 해소해 버리고 인성이
신성에 흡수되어 버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에 대해 칼케돈회의(451)는 그를 정죄하고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 이고
신인양성은 '혼합되지 않으며', '분리되지 않는다' 는 것을 명확히 밝혔다.
그러나 유티케스의 견해는 여전히 지지를 받았으며 칼케돈회의
이후 2세기 동안 단성론과 단의론에 의해 계속되었다.
그러나 제3차 콘스탄티노플공의회(681)는 "비록 인적 의지가 신적 의지에
종속된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에게는 두 본성적 작용과 두 의지가 존재한다" 라고 선언함으로써 그 주장들을 정죄했다.
결국 기독론 논쟁은
칼케돈회의와 콘스탄티노플공의회에 의해 종식되었다고 할 수 있다.
중세기에는 기독론이 크게 문제되지 않았으나 종교개혁기에 들어서면서
성찬론 논쟁을 계기로 또다시 기독론 논쟁이 일어났다.
루터는 실재적 임재를 주장함으로써 편재성이라는 신성의 속성이 인성에도 적용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것을 '속성의 교류' 라고 하였다.
반면에 칼빈은 속성의 교류를 반대하고 '신성과 인성의 구별' 을
강조했다.
그러나 루터와 칼빈 논쟁은 성찬론에 있어서의 강조의 차이를 나타내는 것일뿐 서로 이단시한 것은 아니었다.
근대에
이르러 그리스도가 자의적으로 자신의 신성의 전부나 일부를 포기하고 지식의 한계를 포함한 인간의 삶의 모든 상황과 조건들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였다는 케노시스주의가 등장했다.
현대 신학에 있어서는 신약 이후 기독교 전통 안에서 선포되어 온 예수와는 대조적으로 후대에
착색되거나 꾸며짐이 없이 참된 예수, 즉 실제 그대로의 예수를 엄격한 역사적 연구를 통해 알고자 하는 '역사적 예수 연구',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선교의 주제로 삼는 '선교의 주제로서의 예수' 등 과거의 기독론과는 달리 조금 색다른 기독론이 전개되고 있다.
그러나 정통
기독교에서는 칼케돈 신조에 근거한 종교개혁자들의 기독론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고찰을 통하여 설정된 핵심적인 교의가
"예수는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이다" 라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참 사람' 바꾸어 말하면 완전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에 있다.
전통적 교의에서 '참 사람' 이라는 의미는 그것에 관련된 기본적인 맥락을 살펴볼 때, 보편적인 인간의 육과는
무엇인가 다르게 가장 깨끗하고 완전한 육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칼케돈공의회는 기본적으로 카톨릭 신앙의 기본적 성격을 지닌 것이다.
천주교의 무염시태론(無染始胎論; 무원죄잉태론)은 바로 위와 같이 예수의 육이 깨끗함을 주장하는 이론이다.
그러면 예수에 대한 관점이
이렇게 나오게 될 수 밖에 없는가에 대한 이유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논자가 볼 때,
가장 큰 기본적인 이유는 일반적
성경관이 구속사적 관점이기 때문이다.
구속사적 성경관에서는 예수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것으로 구원(구속)에 초점을 맞춘다.
또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드는 구체적인 이유는 예수는 성령으로 잉태되었으므로 그의 육까지 깨끗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생각을 더 확고히
갖도록 해주는 또 하나의 이유는 예수는 동정녀(숫처녀)의 몸에서 잉태되었기 때문에 그의 육도 깨끗하다고 생각하려는 보편적
관념때문이다.
루터와 칼빈을 기저로 하는 종교개혁자들도 위와 같은 보편적 관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
구속사적
성경관은 부분적이면서도 내용의 단절성이 강한 성경관이다.
구속사적 성경관은 구약과 신약을 연결시키는 논리력이 약하며 또한 구약과 신약의
부분적 내용으로 전체화하는 성향이 강하다.
구약의 특정한 일부분만을 따로 떼어 메시야를 예언하는 내용으로 간주하기도 하고 또한 신학의
특정한 일부분만을 분리시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내용으로 파편화시킨다.
그러나 언약사적 성경관은 전체적이면서도 내용의 연결성이
강한 성경적인 진리이다.
구약과 신약을 전체적으로 조감하여 그 핵심적인 내용을 언약과 성취로 보는 관점이다.
예수의 영과 육을 따로
떼어 그 자체에 의미를 두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온 가장 큰 근거와 이유를 하나님의 약속에 두는 것이다.
Ⅲ. 예수의 영
영은 보이지 않는 존재의 원천이다.
많은 학자들이
인간의 구성요소가 영, 혼, 몸(육)이라고 주장한다.
이같은 인간의 구성요소에 대한 3분설은 인간의 요소와 작용(기능)을 혼돈하는 데서
말미암은 것이다.
성경은 인간의 존재를 영과 육으로 나누어 논증하며,
인간의 영적 기능을 언급할 때 혼의 작용을 설명하고
있다.
인간 이외에도 생물과 짐승 같은 것에도 혼이 작용한다고(욥12:10, 전3:21) 성경은 증거한다.
존재하는 것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으로 크게 나누어진다.
보이지 않게 존재하는 것의 대표적인 것이 하나님과 인간의 영이다.
인간의 육은 안과
밖이 고도의 기술적 작업을 통하면 다 볼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영은 과학문명이 아무리 발달하고 좋은 현미경이 발명된다 하더라도
궁극적으로 볼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역사 속에서는 눈으로 존재의 근본이신 하나님의 영을 절대로 볼 수 없다.
하나님의 영에
대하여 오해를 하게 되면 보이는 시각을 통해 영을 확인하려는 어리석은 시도를 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적 존재이기 때문에 신령한 영,
즉 성경을 깨닫는 영으로만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다.
요컨대 영의 가장 근본적인 속성은 보이지 않는 존재성이다.
일반적으로
영의 문제를 취급할 때 하나님의 영에 대해 많이 다루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성경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으며,
아울러 하나님의 존재를 하나님의 영과 불가분의 관계로 연계시켜 많이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의 영 이외의 모든 영이
피조되었다는 것을 고려할 때 창조주의 영이라고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영은 크게 창조주의 영과 피조계의 영으로 나누어 질 수
있다.
창조주의 영은 계시 사역상 하나님의 영 이외에도 여호와의 영, 주의 영, 예수의 영, 진리의 영, 성령 등으로 다양하게 성경에
표현되고 있다.
피조계의 영은 다시 하나님이 선하게 부리시는 영과 악하게 부리시는 영으로 나누어진다.
선하게 부리는 영의 대표적인
것으로는 천사와 중생한 영을 들 수 있고,
악하게 부리는 영의 대표적인 것으로는 마귀와 타락한 영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창조주의 영과 피조계의 영으로 나누는 의도는 영이라는 속성이 수적으로 많이 존재한다는 것을 밝히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니며,
오히려 그것들이 속성상 구분되어져야 함을 주장하려 함에 있다.
창조주의 영은 피조계의 영들을 모두 주권적으로 다스린다는
점에서 피조계의 영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제 예수의 영이 왜 창조주의 영인가를 밝힐 차례이다.
예수의 영은 피조된 영이
아니다.
예수의 영이 피조된 영이 아니라는 것은 성경이 입증해주고 있다.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곧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성도를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였다고 단언한다.
또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 많이 표현되어 있다.
이것은 이 땅 위의
육신의 부자관계처럼 둘이라는 수적 존재를 말해주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영원한 절대의지적 계획이 주체와 대상으로 나누어
설명된 것이다.
영원히 영적으로 존재하시는 분이 수적인 상대로 존재하실리가 없다.
이러한 점을 더욱 굳게 하기 위해 창조라는 성경적
의미를 간단히 언급하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창조라는 차원을 없는 것에서 있게 하는 것으로 정리를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창조는
그러한 의미가 아니다.
성경적인 창조는 보이지 않게, 참으로 존재하는 실체가 현상적으로 보이게 드러난 것을 말한다.
예수의 영은
하나님의 존재를 계시하려는 목적으로 영원 안에서 언약된 것이다.
예수의 영이 창조주의 영인 첫째 이유는 성경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약성경 전체의 핵심적인 증거 내용이 바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점이다.
구약성경 전체가 그리스도를 언약하고
있고 구약의 언약대로 그리스도가 이 땅위에 지금으로부터 약 2000여 년 전에 왔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에 근거를 두고 성취된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 자신의 존재를 계시하려는 목적으로 영원 안에서 계획된 하나님의 근본적인 언약의 대상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영은 피조계의 영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에게 한 언약의 대상으로서 창조주의 영인 것이다.
둘째 이유는
하나님이 여호와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여호와이시다는 것은 신ㆍ구약 전체의 주제이다.
그 주제의 신학적 의미는 하나님은 영원히
존재하시면서 한번 계획하고 약속한 것은 반드시 이루시는 신이라는 것이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증거는 하나님이 여호와이시다라는 신ㆍ구약성경
전체 계시의 근본적 목적을 증거하기 위해 입증되는 신약성경의 주제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은 언약의 주체와 대상이 근본적으로
나누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여호와임을 계시해주기 위해 그리스도의 영을 증거하고 있다.
하나님은 영원히 영으로
존재하시면서 영원 안에서 계획한 자신의 영을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은 바로 창조주의 영인
것이다.
누가복음 24장에는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영으로 존재하심을 설명해 준 내용이 있다.
24:39절에
예수님이 자신을 만져보라고 하시면서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제자들이 보는 바와 같이 예수님 자신은 있다고 증거하셨다.
또한 베드로전서
4:6절에 예수의 영에 대하여 언급한 내용이 있다.
예수님은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되려고 산 자와 죽은
자 모두에게 복음이 전파되게 하셨다는 내용이다.
위에서 영으로 하나님처럼 살려한다는 내용이 인간들처럼 타락한 영이 되었다가 중생한
영이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신성(神性)으로 계시되고 입증된다는 것을 논증한 것이다.
결국 예수의 영은 모든 자를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며 심판하시는 창조주의 영이다.
Ⅳ. 예수의
육
육은 인간의 시조인 아담 타락의 결과물이다.
그러므로 육의 근본적 속성은 죄성이며, 육의 궁극적 결과는
사망이다.
이러한 점을 인식하지 못하면 인간은 어리석게 육 자체를 목적으로 삼아 살아갈 수 밖에 없게 된다.
육의 근본적 속성과 그
의미를 좀 더 깊이 고찰하기 위해 죽음의 성경적 의미를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죽음이란 영과 육이 완전히 분리되는 것을
뜻한다.
분리되었을 때에 참으로 존재하는 것은 영이며, 참으로 존재하는 것만이 진정한 가치가 있다.
죽음을 좀더 세밀하게 나누어
보면, 영적 죽음과 육적 죽음이 있다.
육을 가진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당하게 된다.
그 이유는 육의 근본적 속성이 죄성이고
죄의 삯이 사망이기 때문이다.
육이 죄성이라는 점을 간과하면 육 자체를 깨끗하고 거룩하게 보아 육을 거룩하게 하려는 어리석은 생활을 하게
된다.
육이 죄성이라는 것을 간과한 많은 폐단들이 성경에나 교회사에 이미 많이 드러나 있다.
표면적 유대인 즉 육적 유대인 것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멸시한 유대인들의 생각이나 생활상이 성경에는 많이 드러나 있다.
또한 과거사에 육 자체에 가치를 두어 경건하고 거룩하게
되려는 경건주의자들과 금욕주의자들의 양태가 여러 모양으로 드러나 있다.
요컨대 육을 지닌 인간으로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으며 이런 차원에서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라고 강조하여 밝혀 주고 있다.
일반적으로 육의 문제를 다룰 때 예수가 지녔던
육에 대해 많이 다루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그 이유는 성경에는 모든 육(육체)은 더럽고 추악한 것이라고 강조하여 단언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과연 예수의 육도 결국 모든 인간들의 육처럼 더러운 것일까라는 문제에 봉착하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성경에는 예수
육의 근본적 속성을 예수의 영과 불가분의 관계로 연계시켜 강조하여 여러 부분에서 밝혀 놓았다.
예수가 육을 지니는 방법상에 있어서 성령으로
동정녀(숫처녀)에게서 잉태되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육은 동정녀(童貞女)가 잉태한 육과 유부녀(有夫女)가 잉태한 육으로 나누어 질 수
있다.
방법은 목적을 위해 생기는 법인데, 방법보다 목적이 중요한 것이다.
예수가 성령과 처녀를 통해 잉태되었다는 방법자체가
궁극적 목적이 된다면 결국 목적과 방법의 위치가 전도되어 버리게 된다.
왜 예수가 성령과 처녀를 통해 잉태되었을까?
이에 대한 분명한
목적이 있을 것이다.
그 목적은 예수는 구약에 약속된 참 메시야(그리스도)임을 증명하기 위한 것임을 성경은 증거해
준다.
그렇다면 예수의 육과 모든 인간의 육이 성질상 다른 것일까?
이제 바로 위의 문제에 대하여 언급할
차례이다.
예수의 육은 피조계 (被造界)의 육이다.
피조계의 육은 영원한 것이 아님을 성경은 입증해 주고 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이 영원하다고 성경은 강조하여 밝혀주고 있다.
예수의 육은 영원한 것이 아니었다.
예수의 육은 많은
제한성을 지니고 있었다.
시간적으로 마리아에게서 잉태된 시점부터 십자가 상에서 죽을 때까지 존재하는 육이었다.
예수가 부활하기 이전의
몸과 부활된 이후의 몸은 성질상 완전히 다른 것이다.
예수는 피조계의 육을 지니고 있는 동안 같은 장소나 다른 장소에 같은 형체로나 다른
형체로 여러 가지로는 출현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가 부활한 후의 출현은 성질상 부활 이전의 것과 완전히 다르다.
예수 육의 성질은
모든 인간들의 육의 성질처럼 죄의 덩어리이며 저주받은 육이다.
신이 인간의 몸과 성질상 똑같은 육을 입었다는 자체가 가장 큰
저주이며 계시적 사건이다.
예수의 육은 근본적 속성상 인간의 육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다.
단지 예수의 육은 신학적 의미상 영원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한 자들의 모든 죄를 뒤집어 쓴 육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의 육은 양적으로 표현하자면 인류역사상 가장
많은 죄를 가진 성질의 것이다.
왜 이처럼 예수의 육이 더러운 것일까?
앞에서 이미 언급되었지만 의미를 좀더 첨가하여 정리해
보자.
성경의 말씀(약속)대로 즉 진리대로 택자들의 죄를 모두 대신 진 육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의 육은 구약의 약속대로
아담과 다윗의 것과 성질상 똑같은 혈통을 따라 난 육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육은 근본적으로 모든 인간들의 육과 성질상 똑같은
죄성이며, 양적인 면에서는 가장 많은 죄를 지닌 육이다.
성령으로 잉태되고 또 처녀의 몸에서 잉태되었기 때문에 예수 육의 성질이 거룩하고
깨끗한 것은 결코 아니다.
이러한 맥을 따라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요한일서 4:2)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라고(요한이서 1:7) 경계하여
밝혀주고 있다.
예수의 육체는 구약에서 성전으로 약속되었던 모든 고난을 받았다.
인간이 육을 지니므로 당할 수 있는 고통의
성질과 똑같은 고난을 예수는 자기 육체에 받으셨던 것이다.
만약 예수의 육이 인간의 육과 성질상 다른 것이라면 예수의 고난과 죽음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결국 예수의 육은 모든 인간 육체의 성질과 똑같은 죄덩어리이다.
Ⅴ. 예수의 영과 육의
관계
어떤 문제의 부분을 생각하거나 취급할 때, 그 부분을 원리적으로 포괄할 수 있는 전체를 찾아야 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일 것이다.
왜냐하면 어떠한 부분이라도 그 부분을 포괄하고 있는 전체에서 설명되는 부분은 그 본래의 의미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예수의 영과 육의 관계를 포괄할 수 있는 전체적 주제가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다라는 점을 간과할 수는 없다.
예수의
영이 바로 창조주의 영이고, 예수 육의 성질이 인간의 육과 똑같다라고 하는 부분적 결론이 주어질 수 있는것도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예수에 대한
전체적 결론이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런 차원에서 예수의 영 문제를 고려할 때 예수의 육 문제를 배제하거나, 반대로 예수의 육 문제를 취급할
때 예수의 영 문제를 연계하지 않는 것은 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전통신학이 예수를 완전한 신이며 동시에 완전한 인간으로 결론짓게
된 것도 아마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전체적 원리에서 출발되지 않았기 때문으로 사료된다.
전통신학이 예수의 영과 육을 포괄하여 그렇게 결론
지은 것은 얼핏보면 아주 타당한 것처럼 보인다.
그들의 부분적 함정은 예수를 '완전한 인간' 즉 '참 인간' 으로 보는 의미에
있다.
반쪽만 맞는 것은 결국 완전히 틀린 것이다.
왜냐하면 앞에서 지적했듯이 그 반쪽의 착오가 그것을 포괄하고 있는 전체적 원리의
방향설정이 잘못된 데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한 예로,
예수를 구속주로 볼 때에도 예수의 십자가 사건만의 이유로
구속주로 본다면 너무도 전체와 단절된 판단이다.
예수의 잉태 사건부터 예수가 구속주로 입증되기 때문이다.
예수의 영을 고찰하는
것은 비록 부분적 고찰이기는 하지만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의 핵심적 부분이 된다.
그 이유는 예수의 영은 여호와가 언약한 근본적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예수의 영이 창조주의 영이라는 점도 중요하지만 예수의 영이 바로 언약된 영이라는 점은 더 중요하다.
그 이유는 예수의
영이 영원 안에서 작정되었다는 점이 예수의 영이 창조주의 영이라는 확실한 근거 역할을 해 주기 때문이다.
예수의 육이 성질상 인간의
육과 똑같다는 것은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증거해 주는 하나의 방법에 불과하다.
오히려 예수 육의 의미는 언약된 육이라는 점에 더 강조점이
주어진다.
그 이유는 예수의 육이 구약에 이미 언약되었다는 점이 예수의 육이 성질상 인간의 육과 똑같다라는 것을 입증해 주는 중요한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예수의 영과 육의 관계는 예수의 영 문제와 예수의 육 문제 각각의 것보다 중요하다.
예수의 영 문제와 예수의
육에 대한 논의의 의의는 예수의 영과 육의 관계를 전체적으로 조감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예수의 영과 육의 관계가 더욱 중요한 이유는 예수의
영과 육의 목적을 정리할 수 있는 직접적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예수의 영과 육의 관계는 계시적 관점에서 풀릴 수 있다.
예수의 영은
계시의 목적이고, 예수의 육은 계시의 방법(방편)이다.
예수의 영은 신성(神性)인데, 예수의 육이 성질상 인간의 육과 똑같은 것을
입은 것은 예수의 신성을 드러내려는데 있는 것이지, 예수의 육 자체를 강조하여 드러내려는 것은 아니다.
예수의 육은 예수의 신성을 증거하는
방편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영과 육의 관계는 목적과 방법의 관계이다.
예수의 영과 육의 관계를 볼 수 있는 성경의 구체적
증거를 살펴 보자.
로마서 1:3절에
"이 아들(하나님의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라고
기록되었으며,
이것과 연계되어 4절에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로 증거되어 있다.
여기서 보충적으로 상고해 볼 필요를 느끼는 부분이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라는 의미인데, 과연
예수의 영이 아담이 타락(모든 인간의 타락)하여 그 영이 죽은 것과 같은 성질의 죽음일까? 라는 문제이다.
이 문제는 앞에서 논한 성경적
죽음이라는 것이 어떠한 의미인가를 생각하면 그리 어려운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라는 의미와 예수의 영과 육의
관계를 동시에 풀어갈 수 있는 성경의 증거들이 많이 있다.
그 중에서 베드로전서의 부분만으로 확인해 보기로 한다.
베드로전서
3:18 19절에서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4:6절에도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 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에게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함이니라" 로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볼 때 예수의 영과 육의 관계는 결국 계시의 목적과 방법으로
정리된다.
예수의 육은 예수의 영을 신성으로 증거되는 목적을 위해 주어진 언약된 계시의 방법이다.
Ⅵ. 마무리하는 말
왜 기독교가 도덕적 종교로 많이 인식되고 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는가?
무엇보다 도덕의 근본이 인본주의라는 점을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것이라 생각된다.
도덕의
근본적 속성이 하나님을 제거하고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만을 생각하는 것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일반적인 성경관이 성경에 대한 부분적인 관점인
구속사적이기 때문이다.
구속사적 성경관에 의한 영향으로 예수를 계시를 위한 목적으로 보지 않고 인간(인격) 예수를 강조하여 도덕적 모범의
인간으로 보려는 연구가 많이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예수의 영과 육의 목적은 전체적 성경 내용의 구조에 의해서 조명되어질
수있다.
예수의 영과 육의 목적은 공히 예수를 그리스도로 증거하려는데 있다.
예수의 영과 육의 성질 자체에 한정되어 예수의 영과 육의
목적에 연계되지 않으므로 진정한 신학적 의미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큰 의미는 없게 된다.
예수의 영과 육의 성질이 중요한 것도 예수의 영과
육의 목적을 찾는 중요한 과정이 되기 때문이다.
예수가 그리스도로 입증되면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여호와로 입증된다.
작정되고
언약된 대로 예수가 그리스도로 오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여호와로 증거된다.
신ㆍ구약 성경의 어떠한 부분도 하나님이 여호와로 증거되는
전체적 중심사상과 결부되어 논증이 전개되고 있다.
예수의 영과 육도 영원 안에서 그리스도로 작정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영원 안에서의 계획을 그의 역사적 섭리를 통해서도 완전히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전능하신 분이 아니고서야 계획한 예수의
영과 육을 통해 메시야로 어찌 확인시킬 수가 있겠는가?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자기가 신성을 가지고 계시면서도 인간의 육과
똑같은 육을 방법상 입을 수 있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이 여호와로 증거되는 총체적인 성경관만이 예수의 영과 육의 문제를
전체의 흐름을 따라 성경적인 자리매김을 할 수 있을 것이다.